41화
"어우. 죽겠네."
정성국은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고 눈두덩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 집무실에 처박혀서 수많은 서류를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이 겹쳐도 이렇게 겹치네. 젠장."
곧 있으면 두 번째 이주민들이 도착할 예정인 만큼 준비할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번에 예정된 이주민은 대략 3500명 정도.
이주민들을 효율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만 해도 일이 산더미였는데 거기에 더해 원주민 부족들이 합류했으니.
그나마 윈투 족이나 마이두 족의 영역은 새마포와 가까웠고 강을 따라 밭과 마을을 조성하고 있었기에 부족원들의 이탈이 적었지만 새김포의 반대편에 위치한 포모 족의 영역이나 우티 족의 영역은 정성국이 생각한 개발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만큼 당장 부족원들의 이탈이 심한 편이었고 이러다간 공동화 지역이 될 우려가 있었기에 포모 족과 우티 족의 영역에도 제대로 된 마을을 건설하고 밭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개발청, 관리청, 행정청에 소속한 사람들은 일에 치여 죽어 나갔다.
그것을 보다못해 정성국이 조금 도와주려다 서류의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상황이고 말이다.
"뭐 나쁘진 않네. 그나마 포모 족의 영역이나 우티 족의 영역도 수원(水源)이 풍부하니 밭을 조성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테고...이번에 도착할 이주민들을 적당히 분산시키면 되겠지."
처음 계획은 새마포를 축으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쭉 뻗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원주민들이 합류한 이상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합류한 원주민 4개 부족을 합하면 원주민들의 인구만 대략 5만 남짓.
당장 원주민들 모두를 중앙 평원으로 이주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원주민들을 모두 중앙 평원으로 이주시켜 개발을 시작한다면 중앙 평원의 개발이 빠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들이 살던 영역은 비게 된다.
이 비어버린 영역에 다른 부족들이 확장을 시도할 테고 후에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거기에 인구가 집중되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위생 문제도 고려해야 했던 정성국은 이 기회에 이주민들의 영역을 넓히면서 인구를 적당히 분산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증가할 것을 고려해보면 순식간에 영역이 넓어진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지. 그리고 덕분에 광산에 배치할 인력이 많아져 철의 생산량도 늘어났으니. 문제는 교육인데...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고.'
원주민들의 합류가 결정되자 정성국은 대추장들에게 부탁해 각 마을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선발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선발되어 이곳에 온 원주민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었고.
이들은 이곳에서 단기간 교육받은 후 다시 자신의 부족 마을로 돌아가 부족원들을 가르칠 테고.
그러다 보면 최소한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해 질 테니 그때가 되면 원주민들의 인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최소 1, 2년은 걸릴 테고 그 전에는 정성국을 비롯한 행정 인력이 갈려 나간다는 사실이지만.
'정 뭐하면 이번에 오는 배편으로 개척촌에 편지를 보내 내년에는 개척촌의 행정 인력들을 최대한 보내라고 독촉하면 되겠지.'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 밖에서 호위대장이 문을 두드렸다.
"총독 어르신. 하얀 들꽃님이 오셨습니다."
"그런가? 들여보내게."
정성국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이 열리고 한 원주민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들어왔다.
원주민 특유의 긴 땋은 머리를 한 소녀와 성인의 경계에 선 여성.
푸른 안개의 딸이자 이번에 정성국의 곁에서 일하게 된 하얀 들꽃이었다.
"총독 어르신. 다녀왔습니다."
"그래. 잘 다녀왔느냐? 별일은 없었지?"
"예. 별일 없었습니다. 아. 그리고 연구청장님이 건네주신 편지입니다."
"그래?"
그러면서 하얀 들꽃이 품 안에 간직했던 편지를 꺼내 정성국에게 건네주었다.
정성국이 편지를 받아 들자 편지에선 묘한 풀 내음이 나는 것 같아 멈칫했지만 이내 편지를 펼쳐 내용을 살펴보았다.
편지에는 원주민들의 교육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의사소통이 되는 원주민들 중에 체력과 손재주가 뛰어난 원주민들을 뽑아 연구청에 소속시켜 장인으로 만들기 위해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정기 보고였다.
"흐음. 순조롭군. 아. 고생했으니 이만 퇴근하거라."
"총독 어르신이 일하시는데 아랫사람인 제가 어찌 퇴근하겠습니까."
하얀 들꽃의 능숙한 조선말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집무실 한쪽에 놓인 간이 침대를 쳐다보았고 하얀 들꽃 역시 그런 정성국의 시선을 따라 간이 침대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이곳에서 잘 생각이니 바로 퇴근해라. 이 더운 날 연구청의 공방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총독 어르신. 적당히 쉬어가면서 일을 하시지요. 날도 더운데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러면서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걱정 말라는 듯 활기차게 말했다.
"걱정 말아라. 그래서 저걸 가져다 놓은 거다. 조금만 더 일하고 잘 생각이니 먼저 퇴근하거라."
설득해도 정성국이 듣지 않을 것을 직감한 하얀 들꽃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허면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정성국은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나가는 하얀 들꽃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른 녀석들을 떠올렸다.
대추장을 따라온 수행원들 가운데는 그들의 자식도 있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성국이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들을 그냥 놓아둘 리가 있겠는가.
대추장들을 배웅할 때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곧바로 대추장들의 허락을 받아 그들을 채용하려 했다.
문제라면 여성인 하얀 들꽃을 제외한 대추장들의 자식인 굳건한 바위, 음흉한 여우, 게으른 곰은 젊은 남자답게 행정청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사청에 소속되기를 원했다.
어차피 원주민 부족들이 합류하고 영역이 증가하면서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병사를 늘리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던 만큼 정성국은 아쉬워하면서도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러나 이들을 일반 병사가 아닌 지휘관으로 키우고 싶었던 정성국이 군사청장에게 언질을 주었으니 지금쯤이면 힘든 훈련을 받고 여러 공부를 하느라 죽을 맛일 것이다.
'차라리 하얀 들꽃처럼 이곳에서 일하는 게 더 편했을 텐데...쯧.'
* * *
집중 훈련이 끝나고 게으른 곰은 연병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죽겠다."
그런 게으른 곰의 투덜거림에 그 옆에 서 있던 굳건한 바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워서 그런지 좀 힘들긴 하네."
그런 굳건한 바위의 대답에 오히려 게으른 곰은 황당한 표정으로 굳건한 바위를 바라보았다.
"좀? 이게 좀이냐? 말 한번 타보려고 소리에 군사청으로 들어온 건데 말은커녕 훈련하기 바쁘니 이거야 원. 거기에 씻고 나선 또 교육이잖아?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게 머리에 들어오긴 하냐고."
그 말에 흐르는 땀을 닦던 음흉한 여우가 게으른 곰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편하게 살려면 부족 마을에 남았어야지. 이들은 워낙 부지런해서 어디에 속하든 편히 쉬긴 힘들어."
음흉한 여우의 말에 게으른 곰은 기어코 등을 땅바닥에 대고 누워 석양 때문에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에이. 여긴 신기한 게 많아서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젠장.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게으른 곰의 투덜거림에 굳건한 바위는 음흉한 여우와는 다른 견해를 내보였다.
"글쎄. 어차피 곧 마을에 남았어도 바빠질걸? 포모 족과 우티 족의 영역에도 마을을 세운다고 했잖아? 네가 부족 마을에 남아있었어도 개척단에 소속된 사람들처럼 일하느라 정신없었을걸? 특히 대추장님이 네가 게으름 피우는 걸 두고 볼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신음을 흘리는 게으른 곰과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음흉한 여우였다.
"으..."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 반응을 보고 굳건한 바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말을 타는 전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러니 그만 투덜대고 빨리 씻으러 가자. 그리고 오늘 저녁은 삼계탕이라고 했어."
그 말에 누워있던 게으른 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헉!"
"정말?! 그 닭을 푹 삶은 음식 말이야?"
두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하는 음흉한 여우를 보면서 굳건한 바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에 한 번 맛보았던 삼계탕을 떠올린 둘은 재빠르게 목욕탕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며 굳건한 바위를 보고 소리쳤다.
"야! 뭐해! 빨리 씻으러 가자!"
* * *
원주민들이 수렵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매번 고기를 풍족하게 먹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수렵을 통해 손쉽게 사냥을 하고 매 끼니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그렇기에 이들의 주식은 주로 도토리였다.
도토리를 채집해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들어 이를 부쳐 먹었달까.
그런 원주민들에게 이주민들이 나누어 준 각종 작물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비록 쌀은 워낙 물이 많이 필요한 작물이라 강가 주변에서만 경작할 수 있었지만, 밀은 달랐다.
거기에 콩, 고구마를 비롯해 여러 채소까지.
원주민들의 식탁은 자연스럽게 풍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고기는 좀 달랐다.
이주민들이 들여온 동물 중에 말과 소는 식량보다는 축력(畜力)을 이용하기 위해 들여온 만큼 철저히 통제하는 상황이라 말고기와 소고기는 당분간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고기는 닭고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오히려 이곳 새김포에서는 닭고기를 먹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크게 양계장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있었기에 만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염장해 새김포에서 유통하는 것으로 충분히 단백질 섭취가 가능할 거로 생각한 정성국이 닭을 새마포를 중심으로 조성된 마을과 원주민 마을에 우선하여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사청 소속의 병사들은 매일 생선은 먹을지언정 닭고기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게 이들이 삼계탕을 먹으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이유였다.
"으으...역시 맛있다. 생선과는 전혀 다른 이 고기의 맛이란."
닭 다리를 뜯어 소금을 찍어 먹으며 닭고기를 찬양하는 게으른 곰이었다.
옆에서 음흉한 여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확실히 이 고기는 부드러워서 더 맛있는 것 같다. 전에 사냥을 통해 먹었던 고기들과는 전혀 다른 맛이야."
게으른 곰은 그동안 사냥을 통해 먹었던 고기들의 맛을 떠올리며 닭을 찬양했다.
"그러게. 닭은 정말 좋은 새야. 날지도 못해서 키우기도 쉽다던데."
"아아. 확실히 이들이 이곳에 정착해서 정말 다행이긴 해. 아니었다면 이런 맛있는 식사는 꿈도 못 꿨을 텐데."
그러자 이들의 옆에서 조용히 닭을 해체하고 있던 굳건한 바위 역시 음흉한 여우의 말에 동의했다.
"음...이들이 정착한 이후로 먹을거리가 풍족해졌으니. 이들에겐 대정령의 가호가 함께 하는 것 같아."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뒤쪽에서 조용히 식사 중이던 탐사대 대장은 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원주민들의 호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원주민들에게 식량을 너무 퍼준 것이 아닐까 했는데 저들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총독 어르신의 명령이 옳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