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강렬한 햇살을 피해 집무실로 대피했던 정성국이었지만 건물 안도 덥긴 매한가지였다.
`건물 안인데도 엄청나게 덥네. 그나마 상투를 잘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때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대장이 집무실로 들어와 정성국에게 보고했다.
"총독 어르신."
"무슨 일인가?"
"손님들이 방문하셨습니다."
"음? 무슨 손님?"
"각 부족의 대추장들이 일행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그래? 각 부족의 대추장들이 모두 이곳을 방문했다고? 나를 만나려고?"
"예. 총독 어르신."
"음...일단 손님들을 회의실로 모시게. 바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집무실을 나갔다.
정성국은 잠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뭐지...무슨 일이라도 있나? 갑자기 왜 단체로 방문한 거지? 그것도 나를 만나겠다고?`
갑작스러운 대추장들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각 부족의 추장이나 대추장이 간혹 개인적으로 정성국을 찾아온 적은 많지만, 대추장들이 한꺼번에 자신을 만나려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 별다른 보고도 없었고...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와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를 반기는 대추장들을 보면서 정성국은 웃으며 그들과 인사했다.
"아. 다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랜만이다. 총독."
포모 족의 대추장이 능숙하게 조선말로 정성국을 총독이라고 불러주자 정성국은 이들의 언어 습득 능력에 좀 놀랐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이들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날 조선족 추장이라고 부르더니만.`
이곳에 남았던 선원들이 원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선원들이 자신이 태어났던 조선에 관해 이야기 했기 때문인지 원주민들은 이주민을 조선족으로, 정성국을 조선족 추장으로 불렀다.
예전 기억이 있던 정성국은 조선족이라는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조선인들이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정성국은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게 꺼려져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을 한민족이나 조선 민족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이주민들을 조선족으로 불러왔기 때문인지 한민족보다는 조선 민족으로 주로 부르곤 했다.
자연스럽게 정성국은 조선 민족 추장이 되어버렸고.
헌데 요새 이주민들이 정성국을 총독 어르신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용케도 정성국을 총독으로 정확히 부른다.
`못 본세에 더 유창해졌네. 얼마나 이곳을 방문했으면...`
속으로 웃으면서 정성국은 포모 족 대추장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오. 조용한 곰. 보기 좋군요. 머리를 자른 겁니까?"
그러자 포모 족 대추장인 조용한 곰은 왠지 어색한 듯 짧은 머리를 만지면서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족원이 일하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생각보다 편하군."
대추장 중에 유일하게 단발을 한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다른 대추장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단발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럼요. 가볍고, 시원하고, 거기에 편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부족의 마을에도 이발소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말에 동의하면서 이발소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하자 정성국의 말을 듣고 살짝 고민하던 다른 대추장들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부족 마을에도 이발소가 있었으면 좋겠군."
"우리 마을에도."
그런 반응을 보고 정성국은 속으로 만족스러워하면서도 당장은 이발사가 부족했기에 그들에게 제안했다.
"음...당장은 이발사가 부족해서 어렵습니다. 허니 각 부족에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을 뽑아 보내주시죠. 그럼 그들을 잘 가르친 후 돌려보내겠습니다."
인력이 부족한 이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대추장들은 그런 정성국의 제안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언제나 고맙다. 총독."
"아닙니다. 돕고 살아야죠. 헌데 이발소 때문에 오신 겁니까? 다른 분들도?"
헌데 고작 이발소 문제 때문에 온 거냐고 묻는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은 그럴리가 있느냐며 피식 웃고 자세를 바로 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그럴 리가. 우리가 이렇게 오늘 총독을 찾아온 이유는 우리의 미래 때문일세."
"으음..."
그러면서 정성국은 회의실에 앉아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다른 대추장들을 바라보았다.
윈투 족 대추장 지혜로운 나무, 마이두 족 대추장 웅크린 늑대, 우티 족 대추장 푸른 안개까지.
모두 이곳 샌프란시스코만에 인접해있는 부족들의 대추장이자 이주민들에게 호의적인 대추장들이었다.
이들 덕분에 큰 다툼없이 손쉽게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고.
헌데 갑작스럽게 이렇게 방문해 진중한 분위기로 부족의 미래를 언급하니 정성국은 더위도 잊고 내심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우리는 자네들을 지켜보았네. 지금까지의 자네들은 비록 숫자는 적지만 현명하고 강인하더군. 그 귀한 소금을 손쉽게 만들어내고 흑요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며 힘들게 사냥하기보단 작물을 재배해 손쉽게 식량을 얻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네. 자네들은 자연을 잘 이해하고 이용하더군."
다른 대추장들은 조용한 곰에게 일임했는지 그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처음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네. 애초에 자네들이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던 것은 자네들과 교류하면 더 나은 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네. 자네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나서 우리는 자네들과의 교류를 통해 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대추장들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헌데 이번 새마포에 조성된 드넓은 밭에서 나오는 많은 작물을 보고, 그리고 개척단에 소속되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던 부족원들의 의견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혹시 이들이 개척단이 조성한 밭에 욕심을 내는 것인가 싶어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틀어지면 골치 아픈데? 어쩐다? 그냥 조성한 밭을 싹 저들에게 넘길까? 이대로 계속 교류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끌어들일 계획이었는데 싸우는 순간 계획이 틀어지는데. 곧 이주민이 올 시기라 너무 욕심을 부려 밭을 개간한게 이들을 자극한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초조해졌다.
정성국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원주민과의 관계였다.
괜히 그가 원주민과의 결혼까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과 충돌하는 순간 서로간에 앙금이 생길 테고 그럼 지속해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당장 개발하기도 바쁜데 원주민과의 충돌이라니.
그럴 바엔 차라리 조성된 밭을 그냥 저들에게 넘겨서 충돌을 피하는 것이 나았다.
정성국이 순간적으로 그렇게 계산을 끝냈을 때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다른 부족의 대추장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정했네."
목이 말랐는지 잠시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마시는 조용한 곰을 보면서 정성국은 잔뜩 긴장해 침을 삼켰다.
조용한 곰은 물을 마신 후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부족들은 이제부터 자네들과 함께하기로."
"어라?"
부정적인 말이 나올까 잔뜩 긴장했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그저 눈을 깜박였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오히려 조용한 곰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정성국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헌데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그 말에 조용한 곰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뭐 이유는 여러가지네만...자네들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더군.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던가? 우리가 자네들과 교류해 조금씩 발전해나갈 때 자네들은 우리가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발전해나가겠지. 안 그런가?"
정성국은 신음을 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으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혜로운 나무와 웅크린 늑대였고 그런 둘을 잠시 바라보던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 곧 있으면 새로운 이주민들이 또 이곳으로 온다지? 거기에 매년 이주민들이 늘어날 거란 소리도 있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네들은 강성해질 테고."
"..."
이에 정성국은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될 거라 짐작했으니까.
다만 그 말을 저들의 얼굴에 대고 이야기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푸른 안개는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결국 자네들에게 동화될 테고. 아. 오해하지 말게.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딱히 거부할 생각은 없네. 다만 언젠가 자연스럽게 도태될 바엔 차라리 자네들과 함께 자네들이 말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 싶었네."
"으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자연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 없는 나라에 대한 개념을 어느새 파악한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거기에 지금 이곳 새김포와 가까운 부족은 텅 비었다네. 젊은 부족원들은 대부분 개척단에 소속되어 있으니 말일세. 나를 비롯한 대추장들은 개척단에 소속된 부족원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았네. 그들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며 굳이 부족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이더군. 그러니 차라리 부족별로 합류하는 게 나은 선택이겠지. 자네들은 그동안 공평하게 우리를 대했으니 말일세."
일손이 부족했던 정성국은 개척단에 원주민들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조선인과 똑같이 대했다.
즉, 매 끼니 식사를 풍족하게 제공했고 숙소를 제공했으며 매월 식량을 화폐 대신 지급해 여러 생활용품을 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조성한 밭을 배정받을 수 있다고 알렸고.
그러니 개척단에 소속된 젊은 원주민들은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단 이곳에서 지내고 싶어 했다.
그뿐일까.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와 말을 구경했던 원주민 중에는 말에 반한 젊은 원주민들이 꽤 많았다.
특히 군사청 소속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본 젊은 원주민들은 언젠가는 저들처럼 되겠다며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일단 먹고살기 위해 개척단에 소속된 친구들도 꽤 있었고.
그랬으니 이곳 새김포와 가까운 원주민 마을은 젊은 남성들이 확 줄어들 수밖에.
당장은 새김포와 가까운 부족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쏠렸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릴 것이다.
이들 대추장은 바보가 아니었고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서로 논의한 끝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들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곧 부족원 전체의 뜻이기도 했다.
이곳 원주민들의 대추장이란 직위는 자신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왕과는 달리 부족원의 의사를 살펴 결정을 내리는 자이니 말이다.
그것을 생각한 정성국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추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담담하게, 혹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성국은 이들의 그런 미소에 잠시 울컥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럴 거라 예상하지 않았는가.
다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대추장들의 통찰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기에 부족민들을 위해 바로 결단을 내렸고 덕분에 그의 예상과는 달리 몇 년 단축되었을 뿐.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건대 원주민들을 절대 차별하지 않고 잘 보살펴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