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정성국이 머리를 자르고 처음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 그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다 똑같았다.
"헉!"
처음 정성국을 본 호위대 병사들부터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까지.
모두 정성국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정성국이 밖으로 나가 새김포를 돌아다니면서 절정에 이르렀고.
"이보게! 저기 저거...총독 어르신 아닌가?"
일하다가 잠시 쉬는 도중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정성국을 바라본 이주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옆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자신의 친구들을 깨웠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호들갑에 눈을 뜨고 일어나 친구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정성국의 모습을 보고 당혹을 감추지 못했고.
"음? 헉! 총독 어르신의 모습이 왜 저렇지?"
"갓도 없고...아예 상투를 잘라버렸네? 거기에 수염도 밀어버렸고."
"어이구야. 저게 무슨 모습이래?"
처음엔 생소한 모습의 정성국을 보고 당혹하던 그들이었지만 그 반응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정성국의 모습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뭐...시원하겠는데?"
"그렇긴 하겠네. 머리가 짧아서 머리 감기도 편할 테고."
"그렇긴 혀. 머리가 짧으니 금방 마를 테고."
"거기에 상투를 틀 필요도 없으니 편하겠지."
그들도 상투를 트는 게 곤욕이었다.
특히 여름에는 더욱더.
조선인 대부분은 여름에 두피질환을 앓곤 했다.
아무리 속알머리를 밀고 상투를 틀어도 기온이 높아 땀이 차니 별수 있을까.
그나마 개척촌으로 이주하고 나서 정성국이 강조한 위생 교육 덕분에 자주 씻으면서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러자 상투를 트는 게 영 귀찮았던 조선인들이었다.
특히 북미로 이주하고 나선 거의 매일같이 씻기를 강조하는 정성국 덕분에 더욱 그랬고.
그런 상황에서 정성국이 상투를 잘라버렸다.
이들로선 오히려 저런 정성국의 결단이 고맙기까지 했다.
"뭐 애초에 더워서 속알머리를 쳐내고 상투를 틀긴 했는데...이곳은 조선보다 더 더울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차라리 잘된 것 아닌가?"
"암. 나도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긴 했는데 영 눈치가 보였는데 말이지."
"그러게. 총독 어르신이 저런 모습을 한 것을 보면 뭐..."
"아무래도 조선의 풍습을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어느새 지나가버린 정성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 사내가 정성국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그렇겠지. 뭐 생각해보면 이곳은 조선도 아닌데 굳이 불편한 상투를 틀 필요가 있나?"
"그럼. 그렇고말고. 이곳은 조선도 아니고 꼬장꼬장한 양반네들도 없으니 굳이 눈치 볼 필요도 없지."
"암. 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이었다면 예를 차리는 양반네들 덕에 감히 상투를 자르지 못하겠지만 생각해보니 이곳은 조선도 아니고 양반들도 없다.
거기에 이곳의 가장 큰 어른인 정성국도 스스로 상투를 잘랐고.
헌데 왜 이 불편한 상투를 계속 틀어야 하나.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당장 잘라버려야지.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였다.
"에잉."
무리 중 한 사내가 혀를 차자 왜 그러냐는 듯 옆에 있던 사람이 물어보았다.
"아따. 왜 그러는감?"
"이곳은 조선보다 더워서 속알머리를 아예 밀어버렸구만...상투를 자르려면 속알머리가 자랄 때까지 좀 기다려야겠네. 더워죽겠구만."
그 말에 혀를 차던 사내처럼 속알머리를 깔끔하게 밀어버린 사내들이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도 아닌데 삭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잘못하면 왜놈들처럼 희한한 머리가 될 수도 있고.
적당히 속알머리가 자라면 그때 상투를 잘라야겠구나 싶었다.
그들이 보기엔 정성국의 머리 모양이 딱 괜찮아 보였다.
"아! 그건 또 그렇네. 난 아직 안 밀었는데...잘 됐구만. 나도 총독 어르신처럼 상투를 자르고 저런 머리를 해야겠어."
"그러게. 묘하게 단정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감?"
"그렇지?"
정성국을 본 사람들은 이왕 상투를 자르면 정성국처럼 단정하게 머리를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 시대의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위해 정성국이 수많은 일거리를 내버려 두고 새김포를 비롯해 곳곳을 싸돌아다니는 이유였고.
헌데 그때 한 사내가 고민이 된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으음...헌데 총독 어르신은 수염도 깔끔하게 밀어버리셨네?"
"그러게 말여. 허면 수염도 밀어야 하나?"
그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미묘해졌다.
총독 어르신은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리긴 했는데 그러자니 좀 걸리는 것들이 있었달까.
"그건 좀...수염이 없으면 꼭 내시들같아서..."
살짝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 사내를 다른 사람이 타박했다.
"에이. 그럼 총독 어르신이 내시라는 소리인감?"
"아. 그건 아니지만서도..."
정성국이야 면도를 하고 나서 오히려 어려 보인다며 좋아했지만, 조선인들에게 어려 보인다는 것은 장점이 아니었다.
특히나 장유유서가 머릿속에 박혀있는 조선인들에겐 동안은 오히려 단점에 가까웠지.
그때 한 사내가 이곳의 또 다른 구성원들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원주민들도 수염이 없잖여."
"아. 그건 그렇지. 걔들은 지저분하다면서 수염을 밀더만."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원주민들은 대부분 수염을 기르지 않았지만, 어차피 조선인이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거기에 내시처럼 수염이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도 했고.
"아? 그래? 내시들처럼 아예 안 나는 게 아니고?"
"아녀. 우리가 수염 다듬듯이 걔들은 수염을 아예 밀어버리더라고. 전에 건물을 지을 때 원주민하고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끼날로 수염을 밀더구먼."
한 사내가 원주민이 면도한 모습을 떠올리고 입에 올리자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웬 도끼날이 나오냐면서 황당해했다.
"엥? 도끼날로?"
"그려. 시퍼런 도끼날로 조심스럽게 수염을 밀더라고. 왜 그걸 쓰냐고 물어보니 돌칼을 보여준 것을 보면...그동안은 돌칼로 수염을 잘랐나 보더라고."
사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다.
"허이구야. 그걸로 수염을 밀 수 있나?"
"그래서 원주민들은 조개껍데기로 수염을 뽑기도 하더구먼."
원주민들도 청결을 위해 면도를 한다는 사실에 조선인들의 마음이 슬쩍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결.
총독 어르신인 정성국이 언제나 강조하던 단어 아니겠는가.
그 때문인지 총독 어르신도 이미 수염을 깨끗하게 잘랐고.
"으음...뭐 생각해보면 이곳은 조선보다 더우니 총독 어르신처럼 깨끗하게 수염을 밀어버리는 것도 괜찮아 보이긴 해."
"그렇지. 거기에 하도 청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 보니까..."
"수염 관리하는 것도 영 불편하고 말이지."
"뭐...어차피 상투를 자르는 김에 수염까지 밀어야겠네."
"그러게. 어차피 이곳은 조선이 아니니까 말이여."
"근데 부엌칼이나 낫으로 자르기엔 영 불편한데...조그만 칼이라도 사야겠구만."
* * *
정성국은 새김포를 배회하면서 자신을 향한 시선과 쑥덕거리는 것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반응이 괜찮았달까?
하긴 이들도 직감했을 것이다.
이곳의 여름은 조선과는 다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만큼 상투가 불편할 것은 명확했고.
다만 주변의 눈치 때문에 함부로 상투를 자르지 못했던 것인데 이곳에서 가장 높은 정성국이 몸소 보여주지 않았나.
불편한 상투는 가차 없이 잘라버리라고.
그러니 이주민들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병사들부터 머리를 자르고 바로 이발사들을 곳곳에 배치해야겠네. 그리고 면도칼도 준비해두고. 아예 이발소에서 면도칼을 팔면 잘 팔리겠네.'
* * *
혹시라도 병사들이 반발할까 살짝 걱정했던 정성국이었지만 오히려 병사들은 환호했다.
애초에 병사들 대부분은 정성국의 추종자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에게나 후장식 소총을 지급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에 원상의 경비대원이 되려면 능력보다는 충성심이 최우선이었다.
그런 만큼 정성국이 상투를 자른 것을 보고 바로 따라서 상투를 자르려던 병사들에게 이발사를 보내 쉽게 머리를 다듬을 수 있었던 병사들은 오히려 정성국의 배려를 칭송할 수밖에.
처음으로 머리를 다듬는 이발사들의 솜씨가 썩 좋지 않아 머리 모양이 살짝 우스꽝스러운 건 둘째치고.
덕분에 정성국의 배려에 감사하며 처음으로 이발사들에게 머리를 맡겼던 병사들은 좀 울상이었지만.
이발사로 뽑힌 원주민들은 군사청 소속 모든 병사의 머리를 자르면서 이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받은 정성국은 바로 곳곳에 이발소를 만들고 그들을 배치했다.
그들에게 머리를 맡겼던 병사들이 마을 곳곳에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트렸고.
곧 이발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총독 어르신도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겼다는 소문에 이주민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머리를 손질해달라며 이발소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일까.
원주민들도 이발소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이발소를 방문해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잘라 본 이주민들은 그제야 장발이 얼마나 불편했었는지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같이 개척단에 소속되어 일하는 장발의 원주민들에게 머리를 자르면 굉장히 편하다고 한번 이발소를 방문해보라고 권유했었고.
거기에 이발사들은 원주민들이었기에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가 괜히 저들이 머리를 자르겠느냐고, 단발을 한 저들이 굉장히 만족해한다는 소문을 흘렸다.
그러자 원주민들에게도 단발의 유행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이발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곳에서 매일같이 나오는 머리카락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문제는 여성들인데...이것까지 내가 개입해야 하나? 솔직히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긴 한데...'
다만 이발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라는 점이 살짝 아쉬운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이라는 본보기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리고 상투나 장발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기에 기회가 생기자 단발을 하는 남성과는 다르게 여성들은 별로 반응이 없었다.
‘위생을 생각하면 적당히 여성들의 머리도 자르는게 나쁠 것은 없는데...문제는 내가 개입하고 싶어도 여성의 헤어스타일에 대해 빠삭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생머리나 단발머리 정도? 헌데 그러려면 결국은 여성 모델이 필요하단 소린데 마땅한 사람이 있으려나...?'
남성들이 단발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상투가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성국이 먼저 모범을 보인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상투를 자른 사람이 정성국이 아니라 일반 이주민이었다면 이런저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여성들에게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여성 중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돌아다녀야 여성들이 따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정성국은 무의식중에 개척촌에 있을 전아라를 떠올렸다.
'생머리나 단발머리를 한 아라라니...쓰읍.'
정성국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개척촌에 있는 아이를 불러올 수는 없고...그렇다고 아무런 여성의 머리를 자른다고 다른 여성들이 과연 따라 할까 싶은데...‘
그가 보기에 이주민 중에서는 딱히 조건에 맞는 여성이 없었다.
’일단은 좀 두고 보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여성 모델을 찾아보긴 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