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38화 (38/850)

38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연구청 소속 장인을 만나고 있었다.

"총독 어르신. 여기 가위입니다."

그러면서 연구청 소속 장인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있던 가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자 안에 있는 가위는 기존의 투박한 가위와는 달리 작고 얇아 가벼워 보였기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정성국이었다.

"음. 주문한 대로 가볍게 잘 만들어졌군."

"헌데 이 가위는 어디다 쓰시려고?"

"머리카락을 좀 손질하려고 그러네."

"아...그...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대놓고 속알머리를 자르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연구청 소속 장인이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가려 들었을 때 정성국은 바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가위를 100개 정도 만들어 두게."

그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정성국을 바라보는 장인이었다.

"예? 100개나 말입니까?"

"그러네. 쓸 일이 있으니 일단 만들어 두게."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장인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어련히 쓸 데가 있겠지 싶어 주문을 받아들였다.

"아...알겠습니다. 또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딱히 없네. 고생했네. 나가보게."

"예. 총독 어르신."

연구청 소속 장인이 나가자마자 정성국은 집무실 한쪽에 탁자 서랍에서 거울이 부착되어있는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거울이 보였기에 정성국은 바로 망건을 풀고 머리를 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낄낄거렸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장발이어도 웃길 노릇인데 불편해서 전에 속알머리를 정리했었기에 주변머리만 더 길었으니 그 모습이 마치 코미디언이 웃기기 위해 가발을 쓴 것 같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성국은 거울을 통해 전에 짧게 잘랐던 속알머리가 꽤 자란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정성국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상투를 자를까 하다 포기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속알머리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성국은 조선에서 출발할 때 여름이라 너무 더워 주변머리 일부를 제외하고 속알머리는 아주 짧게 잘라버렸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상투를 잘랐다면 조선과 결별하겠다는 의도는 확실히 알릴 수 있었겠지만, 이주민들이 보기엔 그 모습이 보기 흉해 오히려 이주민들이 단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자제했었다.

허나 이젠 때가 되었다.

정성국은 한 손으론 가위를, 한 손으론 기다란 주변머리를 잡고 길이를 맞춰 자르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날카로운 가윗날에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 주변머리를 잘라 머리카락 길이를 대충 맞춘 정성국은 잠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흐음...일단 대충은 잘랐는데...이 이상은 역시 무리인가. 허면...호위대장! 잠시 들어오게!"

정성국이 잠시 목소리를 높여 바깥으로 외치자 집무실 밖에 있던 호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총리 어르신. 헉! 음? 헉!"

호위대장이 고개를 들자 머리를 풀어헤친 정성국을 보고 한번 놀라고 주변에 정성국이 자른 머리카락이 보였기에 두 번 놀라고 다시 고개를 들어 정성국의 머리카락의 길이가 몹시 짧은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런 호위대장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는가."

"아니...그...갑자기 왜 머리를 풀어헤치신 건지...아니...상투가..."

정성국의 모습을 보고 꽤 놀란 듯 말을 더듬거리는 호위대장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성국은 이내 그에게 부탁했다.

"됐고. 머리를 좀 짧게 다듬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이곳에서 일하는 원주민 중에 말이 좀 통하고 손재주가 좋은 사람을 좀 불러주게."

"어찌..."

정성국의 말에 놀란 호위대장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려는 순간 정성국이 잽싸게 입을 열어 호위대장의 말을 막았다.

"어찌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머리카락을 자르냐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게. 그렇게 따지면 손톱도, 수염도, 머리카락을 다듬는 것도 하면 안 되는 일 아닌가. 자네는 진짜로 상투를 틀었나?"

그 말에 헛기침하는 호위대장이었다.

"크흠..."

그런 호위대장의 반응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하는 정성국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성국은 전생에만 하더라도 조선 시대에 만연한 유교적 예절 때문에 다른 부분은 몰라도 머리는 자르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론 머리카락도 잘만 잘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기른 머리카락의 양이 엄청나서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상투의 모양과는 달리 상투의 크기가 몹시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상투를 한번 트는데도 힘들고.

해서 적당히 머리카락을 잘라 길이를 조정해 상투를 틀곤 했다.

특히 조선 시대의 경우 달걀 모양의 자그마한 모양이 예쁜 상투의 기준이었기에.

허나 그것도 양반들이나 그랬을 뿐.

움직일 일이 많은 양민은 그마저도 불편해 정성국처럼 가운데 속알머리를 적당히 잘랐다.

이번에 정성국과 함께 온 이주민 중에 양반은 없었고 그 이야기는 이주민 중에 제대로 상투를 튼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정성국의 앞에 있는 호위대장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정성국의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운운하려는 호위대장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더 늦기 전에 단발을 통해 본(本)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구나 싶었다.

양반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의외로 조선인의 유교적 풍습이 깊어 잘못하다 원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곳은 조선과는 달리 남녀 유별하지 않고 잘 씻어서 괜찮다 싶었더니 이런 부분은 또...쯧.'

그러면서 차분하게 호위대장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여는 정성국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은 조선과는 기후가 다르다네. 조선보다 아마 더 더울걸세.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헌데 여름에는 그게 더 심할 거란 말일세. 허면 아무리 속알머리를 쳐내고 상투를 올린다 한들 머리가 답답할 게야."

이런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활동량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는 호위대장이니 병사들의 고충을 모를 리가.

특히나 정성국은 위생을 강조했기에 병사들은 매일 씻어야 했기에 더욱 긴 머리를 불편해했다.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정성국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병사들과 이주민들에게 위생을 귀에 박히게 강조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자주 씻게 해서 매일 상투를 트는 것을 귀찮게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사람은 귀찮은 것보다는 편한 것을 찾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조선인들에게 상투를 귀찮은 것으로 인식시킨다면 나중에 단발을 손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었고.

더해서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으니 단발을 할 적기라고 보았다.

"그렇기는 하지요...그래서?"

"그렇네. 이곳은 조선이 아닐세. 조선의 풍습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허나 머리를 자르고 싶은 이주민들도 풍습을 따르느라, 혹은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자르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내가 먼저 상투를 자른다는 소릴세.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부담 없이 상투를 자를 수 있겠지. 그뿐인가? 원주민들 역시 우리를 따라 머리카락을 자를 수도 있을 테고."

원주민들은 상투를 틀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장발이었기에 그들에게도 단발의 유행을 불어넣고 싶은 정성국이었다.

"으음..."

정성국의 말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더는 단발에 대해 반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정성국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짧아야 머리를 감기도 편하네. 머리 감는 게 편하면 자연스럽게 자주 씻을 테니 머릿니도 사라지겠지. 그동안 열심히 위생 교육을 했으니 이 머릿니가 사람의 건강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 거라 믿겠네."

이 시대, 특히 조선 시대에 양반들은 머릿니를 오히려 건강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머릿니가 있다는 소리는 그만큼 몸이 건강하다는 뜻이고 머릿니가 없다는 뜻은 몸이 건강하지 않아 머릿니가 떠난 만큼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달까.

정성국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고 그렇기에 개척촌을 만들고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런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다.

특히나 배에 타기 전 이주민들이 몇 번이고 씻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기도 했고.

그런 만큼 호위대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성국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으음...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허면 안전을 위해 제가 머리를 다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원주민에게 맡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혹여 원주민들이 가위를 잘못 다루기라도 하면..."

"쯧쯧.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굳이 잡일을 하는 원주민을 데려오라고 한 이유는 그에게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을 맡길 생각이라 그러네. 이발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러한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지."

호위대장의 과한 걱정이다 싶어 타박하는 정성국이었지만 호위대장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발사(理髮師)라...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일단 총독 어르신의 머리는 제가 손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손재주가 있는 원주민들을 뽑아 이발사로 만들고 그들의 경험을 위해 일단 호위대 소속 병사들을 붙여주겠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면 방어대 소속 병사들과 탐사대 소속 병사들도 말입니다."

이발사 육성을 위해 머리를 자를 대상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군사청의 병사들을 제공하겠다는 호위대장의 말에 정성국은 솔깃했다.

군사청은 정성국을 경호하는 호위대,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방어대, 주로 말을 타고 주변을 탐색하는 탐사대, 이렇게 총 3개 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다 합쳐 총 100명의 병사가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음...괜히 강제로 단발을 강요해봐야 좋을 것은 없긴 한데...병사는 또 다르단 말이지? 오히려 병사들은 짧은 머리가 더 편할 거야. 씻기도 편하고. 오직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안은 받아들이자. 크흠.'

정성국은 오직 병사들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어디 보자...한 10명쯤 깎다 보면 대충 감을 잡겠지? 그럼 대충 이발사는 10명 정도 뽑아서 곳곳에 이발소를 만들면 되겠네.'

그렇게 이발소까지 차릴 생각을 한 정성국은 가위를 호위대장에게 건넸다.

"뭐 정 꺼림칙하면 그러게. 여깄네. 받게."

정성국이 넘겨준 가위를 받아든 호위대장은 정성국의 근처에 다가와 물어보았다.

"예. 총독 어르신. 허면 어떻게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까요?"

"모든 머리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로 잘라주게."

"알겠습니다. 허면 실례하겠습니다."

호위대장은 조심스럽게 정성국의 머리카락을 쥐고 가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성국은 거울을 보며 단정한 자신의 모습에 전생이 기억나 그리움이 섞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의외로 솜씨가 좋은데? 나중에 이발사를 해도 되겠어."

그런 정성국의 농담에 호위대장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총독 어르신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리 주게."

"예."

정성국은 호위대장에게 가위를 건네받고 앞머리와 구레나룻을 살짝 다듬어 마무리했다.

그리고 거울을 다시 바라보고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머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운데...수염은 어쩐다. 이왕 머리카락을 자른 김에 면도를 해버릴까?'

조선에서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기에 수염이 없는 어린이나 환관은 얕잡아보곤 했기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이내 수염도 밀어버리기로 했다.

원주민들은 오히려 수염을 기르는 것을 청결하지 못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차피 상투를 잘라 이곳은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주민들에게 확실히 깨닫게 해줄 생각이었으니 하는 김에 수염도 밀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위생 문제도 있을뿐더러 애초에 동양인은 서양인과는 다르게 체모가 얇아 정성국이 보기에는 멋도 없었다.

결정을 내린 정성국은 가위를 이용해 면도를 마쳤다.

연구청의 장인이 만든 가위는 날이 잘 세워져 있었기에 쉽게 면도할 수 있었다.

긴 수염을 가위로 적당히 다듬고 가위의 한쪽 날을 이용해 깔끔하게 면도를 끝낸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T자형 면도기부터 만들라고 해야겠다. 겁나 불편하네. 근데 3중 날은...힘들겠지?'

오늘따라 문명의 이기가 그리운 정성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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