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정성국은 집무실 옆에 있는 원탁이 놓인 조그마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정성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런 그들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회의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서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찬 정성국은 바로 자신의 오른쪽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바로 보고를 들어볼까? 먼저 개발청장부터."
정성국의 지시에 어느덧 개발청장의 자리를 맡게 된 한창호가 입을 열어 보고를 시작했다.
"예. 총독 어르신. 일단 일차적으로 이주민들이 쉴 숙소는 모두 건설했습니다. 그 외에 석회를 사용해서 제대로 된 선착장의 건설 역시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개척촌에서처럼 기중기를 설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외에도 하수 시설의 정비나 목욕탕 등의 공용 건물, 그리고 시장의 건설을 완료했습니다."
정성국은 현재 총독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당장 마을 하나 건설된 상황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자신을 왕이라 부르라고 할 정도로 정성국의 낯짝이 두껍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원상의 대방 자리를 동생에게 넘긴 상황에서 언제까지 대방 어르신으로 불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고민 끝에 총독이란 자리를 만들고 스스로 총독의 자리에 앉았다.
고작 마을 하나 만들어두고 총독이라고 하는것도 좀 웃기긴 한데 그렇다고 촌장으로 부르라고 하기도 뭐하고.
원주민들을 끌어들일 것을 감안해 스케일을 좀 키웠다.
또한, 총독이란 자리를 만든 김에 여러 조직을 정비하고 모두 청으로 통일해버렸다.
그리고 각 청의 수장을 청장으로 통일했고.
그러자 이주민들은 그들을 새로운 높은 관리로 인식하고 조선에서처럼 대감이나 영감이란 호칭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총독 대감, 청장 영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게 왠지 어색했던 정성국은 그냥 호칭을 어르신으로 통일시켜 버렸다.
개인적으론 어르신이란 호칭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동안 대방 어르신이라고 불리어 왔었기에 그나마 익숙하기도 하고 이주민들과 친근함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흐음. 고생했군. 허면 바로 새마포의 개발에 들어갈 생각인가?"
"예. 물론 새김포의 개발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만...슬슬 날이 풀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 인력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전에 새마포에 선착장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지어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주민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도 개척단에 소속되어 빠르게 개발을 하고 있었지만, 슬슬 파종 시기가 다가오면 상당수의 인원이 빠져나가는 만큼 개발청장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네. 그럼 그렇게 하고...다음은 연구청장?"
"일단 지시하신 대로 새김포와 새마포를 오고갈 배들의 건조가 끝났습니다. 다만 너무 작은 배들뿐이라...대규모 운송을 위한 증기선의 건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원래 연구청은 말 그대로 연구를 위해 만든 곳이었지만 당장은 무언가를 연구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당장은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를 건조하는 일을 맡은 연구청이었지만 개척촌에서 거대한 함선과 증기선을 개발하던 사람들이 고작 돛대 하나 달린 조그만 나룻배를 만들려니 죽을 맛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증기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연구청장이었다.
새김포에서 새마포로 이동하려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라 당장 건조한 나룻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 무척 느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그를 보고 물었다.
"증기선이라...지금 남은 증기기관이 몇 개지?"
"3개입니다. 그중 50마력 증기기관 2개를 사용해서 100톤급 선박 2척 정도만 건조해 운용한다면 당분간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당장 이곳에서 증기기관을 만들 수는 없었기에 개척촌에서 미리 가져온 증기기관은 모두 5개였다.
그중 2개를 이미 설치해서 사용하고 있었기에 남은 증기기관은 3개.
연구청장은 그 중 다시 2개를 사용해 100톤급 증기선을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정성국 역시 운송을 위해 증기선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문제는 인력 아닌가."
연구청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개척단처럼 원주민들을 고용해 건조하면 됩니다.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한 50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연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왼쪽에 앉아있는 이곳의 물자를 모두 관리하는 관리청장을 바라보았다.
"흠...관리청장. 여유가 되나?"
정성국의 말에 관리청장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 정도면 가능합니다."
관리청장의 긍정적인 대답에 연구청장의 안색이 밝아졌고 그런 연구청장을 보고 피식 웃은 정성국은 증기선의 건조를 허락했다.
"그래? 그럼 조그맣게 선거를 만들고 증기선을 건조해보게. 설계도는 있지?"
"그럼요. 그리고 개척촌에서 실험선을 개조해 봤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 허면 원주민들을 잘 교육해서 만들어 보게."
"예. 총독 어르신."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연구청장 옆에 앉아있던 교육청장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엔 교육청장?"
"예. 총독 어르신. 일단 만을 접하고 있는 원주민 마을 3곳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또한, 새김포에도 학교를 세웠구요. 그곳에서 원주민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말을 배우길 원하는 원주민 어른들에게도 말과 한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끙...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항해 때 선원들을 좀 많이 남길 걸 그랬어. 말을 가르칠 사람이 너무 적으니...쯧."
당장 원주민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조선인은 이곳에 남았던 5명뿐이었다.
그나마 이들을 통해 조선말을 배운 원주민들이 몇 있긴 했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뿐이지 아직 다른 원주민에게 말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었고.
해서 그나마 큰 부족 3곳에 조그마한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과 결혼해 이곳에 남았던 선원 중 3명을 선생으로 채용했다.
남은 1명은 이곳 새김포에서 원주민들에게 말을 가르쳐주고 있고 김종삼은 김 의원과 우두 접종하느라 바빴다.
그런 현실이다 보니 정성국은 작년에 더 많은 선원이 사고 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뭐 차차 나아지겠지요. 그리고 의외로 원주민들의 언어 습득 능력이 꽤 빠릅니다. 이대로 꾸준히 가르치다 보면 훗날 우리말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대부분 원주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정성국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교육청장의 소리에 반색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참. 원주민들은 여성들도 교육받고 있지?"
정성국이 보기에 이곳 원주민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보았다.
가뜩이나 사람 손이 부족한데 남녀를 구분해 무엇하랴.
그런 만큼 남녀노소 구분없이 무조건 가르치라고 이야기했었다.
일단 말이 통해야 고용해서 뭘 시키기라도 하지 싶었달까.
"예. 원주민 남성 중 대부분은 개척단에 소속되어 조선인들과 부대끼면서 말을 배우는지라 학교에 오는 성인 중 대부분은 원주민 여성들입니다."
"잘 됐어. 나중에 그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이 될 테니 잘 가르치게."
"으음...뭐 나쁠 것 없겠지요. 헌데 총독 어르신. 원주민들에게는 언어와 기본 상식만 가르치실 생각입니까?"
정성국은 교육청장의 말에 그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정정해줬다.
"음? 그럴 리가 있나. 다만 문제라면 당장 우리가 데려온 선생들은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는 만큼 개척촌과는 다르게 원주민들에게 우리의 언어만 가르치는 선생을 따로 두자는 뜻일세."
"아. 일단 그렇게 해서 원주민들이 조선말을 사용하게 되면..."
"그때 개척촌에서 가르치던 대로 가르치면 되겠지. 다만...흐음."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개척촌에서 가르치는 역사의 경우는 조선인들만 가르치게. 원주민들의 경우 따로 그들의 부족 출신대로 나누어 그들의 어른들에게 교육받도록 하게. 그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말일세."
그런 정성국의 말이 의외였던지 교육청장은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역사 교육을...말입니까? 허나 총독 어르신이 전에 그러셨지요.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역사 교육을 통해 소속 집단의 동질감을 심어주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총독 어르신이 원하는 원주민과 조선인의 통합을 생각하면 오히려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 효율을 생각하면 그러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허나 썩 내키지는 않는군. 그리고 이들은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네. 그런 그들에게 개척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삼한 시절의 영토가 어땠고, 고려 시대에 어땠고, 몇십 년 전에 왜국이 쳐들어왔고 그들은 나쁜놈이다...이런걸 가르쳐봐야 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강력한 통합을 원한다면 그들의 말과 역사보다는 자신들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면 된다.
허나 제국주의 시절 그러한 교육을 통해 주류 민족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여러 소수 민족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은 그런 방식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이곳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말이 서로간에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조선말을 공용어로 정할 생각이라 혹여 저들이 자신 부족의 언어를 잊을까 걱정하는 판국에.
정성국은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훗날 수많은 부족을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나라에 더 이로울거라고 보았다.
그런 정성국의 뜻에 교육청장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물론 계속해서 출신 부족별로 따로 가르치겠다는 소리는 아닐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겠지. 지금 우리가 이곳에 와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그 말에 교육청장은 정성국의 뜻을 파악하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허면 당분간은 출신에 따라 역사를 가르치고 훗날 새로운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네. 다만 그때에도 출신 부족에 따라 그들의 역사를 따로 가르치긴 할 걸세. 자신의 뿌리는 알아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허면 각 부족의 주술사나 아니면 노인들을 초청해야겠군요."
그런 교육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아무래도 부족 역사를 가르치려면 그래야겠지."
"알겠습니다. 총독 어르신."
그리고 정성국은 자신의 왼쪽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럼...관리청장이나 행정청장은 따로 보고할 건 없지?"
""예.""
저 둘은 매일같이 그에게 이런저런 보고를 하는 만큼 이 자리에서 보고할 것은 없었다.
"군사청장은?"
경비대원들이 속해있기에 그냥 경비청으로 부를까 하다가 좀 아닌 것 같아서 군사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군사청의 주요 업무는 일단 마을의 보호지만 다행히 주변에는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들뿐이라 현재는 그보다는 탐사대를 조직해 주변 정찰에 집중하고 있었다.
"탐사대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탄광을 찾았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탄광을 찾았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반색하며 그 위치를 물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어디라던가?"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새마포 강 건너 남쪽의 산이라더군요."
"엥? 그렇게 가까운 곳에 탄광이 있었다고?"
"예. 일단 새마포를 기준으로 북쪽 방향부터 찾았던지라 발견이 늦었습니다."
주변부터 탐색할 것을 괜히 위치를 정해주었다 발견이 늦었다는 소리에 쓴웃음을 짓고 정성국이 연구청장을 바라보았다.
"이것 참...그럼 이제 강철 생산이 가능하겠군?"
"뭐...일단 광산을 건설하고 광물을 캐는 게 우선이겠지요. 그리고 동시에 소규모 제철소의 건설도 필요하구요. 문제라면..."
정성국과 연구청장의 시선이 개발청장을 향하자 개발청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끙...필요한 일이란 것은 압니다만...일손이 너무 부족한데요?"
그 말에 군사청장이 나서서 탐사대의 보고를 알려주었다.
"일단 탄광도 그렇고 철광도 그렇고 근처에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들이 있으니 최소한 광물을 캐는 것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관리청장. 그들을 고용할 여유는 있지?"
"음...많은 인원을 고용하긴 어렵습니다. 각각 100명 정도가 한계일 듯하군요. 헌데 이러면 이젠 새로운 일을 벌이기엔 힘들 겁니다. 총독 어르신."
이 이상은 한계이니 좀 작작 일을 벌이라는 말에 정성국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했다.
"으음...뭐 당분간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겠지. 다만 우리가 이곳에서 강철을 생산한다면 원주민들과 교역할 물품이 하나 늘어나는 걸세. 훗날 식량과 소금, 철제 제품이라면 원주민들을 끌어들이기 한층 쉬워질걸세. 그러니 좀 무리를 해야겠어."
정성국의 확고한 의지에 관리청장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보고 사항은?"
"딱히 없습니다. 총독 어르신."
"그럼 군사청은 당분간 탐사대 운영에 집중해 주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