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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6화 (36/850)

36화

선착장에 서서 장도에 오른 지급 함선 3척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성국은 이내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서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조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정성국이 이주민들과 함께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선착장에 남아있던 선원들이 살던 목조 건물과 공용 창고로 쓰던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면 천막이 가득했던 공간에 하나둘 목조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주민들이 천막에서 지낼 수야 없는 법이니까.

한가지 인상적인 풍경이라면 곳곳에 원주민들이 구경하거나 혹은 건물 짓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정성국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원주민들의 새김포 출입을 막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의 출입을 불허할 수는 없었다.

아예 원주민들과 교류 없이 살아갈 게 아닌 다음에야.

거기에 원주민들도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주민들을 총동원해서 다시 한번 데리고 온 동물들을 깨끗하게 씻기고 축사를 청소한 후 원주민들의 출입을 허락했다.

아무래도 원주민들에게는 생소한 동물들이었기에 구경하러 오는 원주민들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정성국의 예상은 적중했다.

새김포의 출입 제한이 풀리자 주변의 원주민들은 새로운 구경거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이런 원주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바로 조선에서 데리고 온 마소들이 머무는 축사였다.

원주민들에게 가축화된 동물은 조그마한 개뿐이었기에 커다란 마소를 보고 신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엔 커다란 동물들을 보고 무서워하던 원주민들이었다.

허나 조선인들이 잘 설명해준 덕에 공포심을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덩치와는 다르게 그저 여물을 되새김질하기에 바쁜 순박한 소를 보고 안심했고 날렵해 보이는 말을 보고 그 자태에 감탄했다.

특히나 정성국의 명령을 받고 주변을 정찰하기 위해 말을 타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거나 말의 위압감이나 빠르기에 무척 놀라기도 했다.

동물을 이동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원주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원주민들은 마을로 돌아가 자신들이 본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점점 새김포를 방문하는 원주민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성국은 내심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별다른 전염병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축사를 매일같이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는 목부들은 죽을 맛이겠지만...뭐 어쩌겠어. 그런데 이건 마치 동물원 같은 느낌인데? 아니면 목장 체험?'

허나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이곳에 방문하는 원주민들에게는 무조건 우두 접종을 했다.

애당초 개척촌에서 우두를 왕창 준비해오기도 했고.

거기에 소도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우두를 늘릴 수도 있었다.

다만 원주민들이 반발할까 살짝 걱정했었지만 의외로 원주민들의 반발은 없었다.

이상해서 알아보니 김종삼이 이곳을 방문하는 원주민들에게 우두 접종을 하면서 이미 그럴싸하게 둘러댔던 것이다.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조선인 비전의 주술이라니...거참. 뭐 상관없나? 어차피 원주민들에게 우두 접종을 하는 게 중요하니...'

정성국이 알기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준 질병 중의 하나가 천연두로 알고 있었고 그를 막을 방법을 알고 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나름 위생에 신경 쓰고 있는 조선인이 천연두를 옮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성국이 괜히 비누를 보급하고 하수를 따로 모아 처리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 남쪽에도, 그리고 동쪽에도 유럽인들이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에 여러 병균을 옮기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의 유럽인들은 걸어 다니는 생화학 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현시대 유럽인들에게는 위생 관념이란 전무했다.

이는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흑사병의 전염은 모공을 통해 전염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모공을 차단해야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목욕은 질병에 전면 노출되는 멍청한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씻는 것에 무척 인색했었고 수많은 병균을 달고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러 병균에 면역이 있었던 유럽인들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면역이 전혀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 대부분이 그들과 접촉하자마자 전염병이 퍼져 죽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정성국은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모든 원주민에게 최소한 우두 접종은 할 생각이었다.

'다른 병의 치료도 가능하면 좋았을 텐데...'

정성국이 비록 이런저런 지식이 있다고는 하지만 의학은 논외였다.

그나마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치료 약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예방만이 가능할 뿐.

'일단은 우두 접종으로 천연두는 막을 수 있고...그 외의 전염병은 나도 속수무책이긴 한데...최소한 공공위생을 신경 쓰고 깨끗하게 물을 관리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뭐 나머진 김 의원에게 맡겨야 할 테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김 의원을 떠올렸다.

김 의원은 이번에 북미로 이주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본명은 김순호였다.

다만 보통은 김 의원으로 부르곤 했는데 이 김 의원과 정성국은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처음 김 의원은 시골 마을에서는 의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돌팔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의원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일반인보다야 아주 약간의 의학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덕분에 치료하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일도 있었고.

다만 김 의원을 탓하기엔 양민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었기에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의원이 사는 마을 근처에 시골 양반 집의 장손이 가벼운 고뿔에 걸려 가볍게 앓기 시작했고 시골 양반은 깜짝 놀라 김 의원을 불렀다.

김 의원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아는 좋은 약제를 모조리 섞어 약을 지어 장손에게 먹였지만, 오히려 그 약을 먹고 장손은 열이 올라 심하게 앓다 결국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시골 양반은 단번에 김 의원을 때려죽이려 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시골 양반의 영향력으로 마을에서 쫓겨난 김 의원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아이를 죽였다는 자괴감에 망연자실해 정처 없이 떠돌던 김 의원이 굶어 죽기 직전 그에게 죽을 건네준 사람이 바로 어린아이였던 정성국이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된 정성국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약을 처방한 김 의원의 경솔함에는 혀를 찼다.

허나 김 의원은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최소한 죄책감은 존재했고 아직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생각했다.

'무식한 게 죄긴 한데...심성은 나쁘진 않은데? 한번 기회를 줘 볼까?'

전생에 실제로 잘못 진료하거나 수술해놓고 의료소송 때문에 모른 척하는 의사들의 기억이 떠오른 정성국은 김 의원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정성국이 의학에 대한 지식이 있던 것은 아니라 직접 무엇을 알려준 것은 아니고 제대로 된 의원의 제자로 들여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해 주어 의원으로 키워준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정성국이 15살이 되었을 때.

정성국의 아버지였던 정석보가 아프다는 소식에 은혜를 갚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온 김 의원이었지만 결국 정석보를 치료하진 못했다.

이에 김 의원은 낙담해 정성국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며 차라리 자신을 때려죽이라며 몽둥이까지 건넸지만 김 의원에게 아버지의 병이 반위(反胃)였다는 것을 알게 된 정성국은 그저 자신과 동생을 홀로 키운 아버지의 박복한 운명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정성국은 김 의원에게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현대 의학이 발전했어도 암을 정복하지 못했는데 고작 한의학으로 위암을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곳까지 와줘서 고마웠다고 다시 돌아가라고 한마디 했을 뿐.

그러나 김 의원은 은혜를 갚겠다며 정성국 주변에 남았다.

그리고 정성국이 개척촌을 세울 때 그곳에 머물며 정성국의 권유에 따라 총명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런 김 의원에게 정성국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의서를 모두 구해주었고.

적당히 시일이 흘렀을 때 자신이 아는 여러 상식을 책으로 엮어 던져주었다.

서양의 여러 의학 상식을 번역한 것이라며.

뭐 의학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공공 보건 쪽에 관계된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최소한 그 책에는 전염병의 원인 등이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처음엔 그저 흥미로 책을 살피던 김 의원이었지만 정성국이 이 책을 읽고 의학을 더욱 발전시키라는 말에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김 의원은 정성국에 빚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정성국이 건네준 책을 읽고 또 읽었을 뿐.

그러면서 그가 알던 상식에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어 고민이 깊어질 무렵.

책에 적혀있던 우두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정성국이 건네준 책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책에 적힌 병의 근원이라는 세균의 개념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현미경을 통해 알게 된 김 의원은 무섭도록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이 이제는 돌팔이라기보다는 최소한 이 시대에는 명의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정성국은 이번 이주할 대상에 김 의원과 그 제자 중 일부를 추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혹여 원주민들에게 전염병이라도 퍼진다면 이를 치료하고 관리할 만한 인물은 김 의원뿐이었으니까.

* * *

정성국은 새로 지은 목제 건물 한쪽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김종삼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정성국은 조금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오. 그래? 그게 정말이냐?"

그러자 김종삼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곤조곤 말했다.

"예. 대방 어르신. 물론 일이 많아 계속해서 자리 잡고 살핀 것은 아닙니다만...최소한 1월에는 저희가 교대로 감시했었습니다. 헌데 범선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어디서 감시한 거지?"

"저기 뒤편의 산 중턱에 감시초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계속해서 살폈습니다. 저기서 망원경으로 살피면 꽤 멀리까지 보이거든요."

"흐음."

정성국은 김종삼의 대답에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작년에는 마닐라 갤리온의 항해가 실패했을 뿐인가? 그게 아니면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기는 하지만 혹시 모를 암초를 피하고자 먼바다에서 항해하는 걸까? 아. 어쩌면 시기가 안 맞아 이들이 못 봤을 수도 있고 혹은 이곳 남쪽으로 도착했을 수도 있구나. 변수가 너무 많네.'

그가 알기로 마닐라 갤리온의 이상적인 항로를 따라 항해할 경우 캘리포니아 북부에 도착하게 되고 그러면 남하하는 도중에 조선인들이 자리 잡은 지역을 지나게 된다.

물론 그럴까 봐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만 깊숙이 자리 잡았기에 어지간해선 안쪽 만에 자리 잡은 새김포를 발견하기는 힘들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라면 앞으로도 100년은 더 지나야 안쪽에 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스페인이지만 정성국이 조선인 이주민들을 끌고 온 이상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고기를 잡겠다고 조그만 배를 타고 만에서 그물을 던지던 조선인들을 마닐라 갤리온이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종삼을 불러 작년에 이곳에 지내면서 범선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김종삼이 입을 열었다.

"아. 참. 포모 족은 가끔 멀리서 범선을 보긴 했답니다. 다만 매년 보는 것은 아니고 잘해야 3, 4년에 한 번 정도라던데요?"

"포모 족이면...새김포의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던가?"

"예. 대방 어르신."

김종삼의 답변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너무 과하게 걱정한 건가? 뭐 매번 이상적인 항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특히 마닐라 갤리온은 태평양을 횡단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올라가다 해적에게 털리는 경우가 꽤 많았다고 하니...어라? 잠깐.'

정성국은 기겁하며 김종삼을 쳐다보고 물었다.

"잠깐...혹시 포모 족은 그들과 접촉했다던가?"

그러자 김종삼은 정성국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안다는 듯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냥 빈 해안가에 간혹 잠깐 머무는 것을 멀리서 보기만 했었답니다."

"아...그래? 알겠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새김포에 방문하는 원주민들의 접종이 다 끝나면 일차적으로 포모 족의 마을에 방문해 우두를 접종해야겠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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