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대방 어르신."
"왔는가?"
정성국은 뒤에서 김봉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던 지급 함선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김봉길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하선은 다 끝냈는가."
"예. 가져온 모든 물품을 모두 내렸습니다."
"그래. 고생했군."
그러자 김봉길은 자신보단 직접 물품을 옮긴 사람들이 힘들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보다는 선원들과 이주민들이 더 고생했지요. 최소한 내년에든 제대로 된 선착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국 역시 이곳에서 물품을 직접 사람들이 들고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일단 석회부터 찾는 게 급선무겠어."
"예. 앞으로도 수많은 화물이 이곳으로 운송될 것을 생각하면 개척촌처럼 이곳도 석회로 만든 선착장과 기중기가 필요합니다."
"뭐 천천히 하나씩 갖춰나가야겠지."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개척촌을 떠올렸다.
'개척촌을 한번 만들어봐서 할만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곳은 직접 다 찾아서 만들어야 하니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개척촌의 경우 사람이 문제였지 필요한 물품의 경우 조선 각지에서 사들여 운송했기에 비교적 개발이 쉬웠지만, 이곳은 달랐다.
비록 지급 함선에 여러 필요한 물품을 실어 나르긴 했지만, 그 양이 얼마나 되겠는가.
거기에 이주민들까지 실어날라야 했으니.
'금광이고 은광이고 당장은 의미가 없네. 뭐 어차피 이주하는데 들어가는 돈이야 평국이가 교역을 통해 벌어들이고 있으니 크게 상관없고. 거기에 당분간은 스페인 몰래 이곳을 키워 나가야 하는 만큼 그들과 교류해 부족한 물품을 구할 수도 없지. 일단 당장은 자급자족을 위해 식량 생산에 주력하면서 철광과 탄광이나 찾아봐야겠네.'
그러면서 정성국은 일단 철을 직접 캘 생각을 하자 골치가 아파졌다.
'끙. 개척촌에선 돈만 주면 조선 각지에서 선철을 구해 쉽게 강철을 뽑아낼 수 있었는데 이젠 직접 광물을 캐야 할 판이니. 어휴. 역시 답은 원주민뿐인가.'
워낙 일손이 부족한 만큼 원주민들의 도움은 필수였다.
'일단 당분간은 원주민들에게 일당으로 제공할 식량 생산에 전념해야겠네. 그리고 당장 암염을 캐러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으니 소규모 염전도 좀 만들어 보고. 식량과 소금이면 원주민들을 꾀기엔 충분하겠지. 그러자면 일단 이곳을 적당히 개발하고 바로 안쪽으로 들어가야겠네.'
그렇게 정성국이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하고 있을 때 문득 아직 김봉길 선장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정성국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참. 언제 떠날 생각인가."
"작년과 비슷한 시기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혹여 바람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항로는 똑같이 유지할 테지?"
"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허면 중간에 들를 섬들에 절대 함부로 개입하지는 말게."
이에 김봉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어...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곳도 그렇고 유구국도 그렇고. 괜히 왜국과 마찰이 일어나면 귀찮아지네."
그러자 김봉길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 저희를 보고 눈을 부라리던 그 왜놈들 말입니까? 에이. 어차피 그곳은 잠시 들려서 식수나 보충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 같은 왜놈들이라지만 숫자도 몇 안 되던데 감히 덤비기야 하겠습니까. 저번에야 고작 한 척뿐이었지만 이번엔 무려 3척이 한 번에 들이닥치면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런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회의적이라는 듯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네만...그치들이 그렇게 상식적인 작자들이 아니니 항상 조심하도록 하게. 또한, 유구인들이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 문제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유구인들이 언급되자 의외라 김봉길의 눈이 커졌다.
"음? 유구인들이 말입니까?"
"계속해서 배의 숫자는 늘어날 걸세. 그러다 보면 자네 말마따나 왜인들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지만...오히려 그것 때문에 유구인들이 왜인들과의 충돌을 유도할수도 있는 문제네."
정성국의 말에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봉길이었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희의 힘으로 왜놈들을 내쫓으려 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네."
그러나 김봉길이 보기엔 당장 지급 함선 3척만으로도 충분히 왜인들을 혼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허나...뭐 그런다 해도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유구를 점령하고 있는 놈들이 왜국 조정이 아니라 고작 지방의 조그마한 왜구들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후장식 화포도 있겠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말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자신감에 쓴웃음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물론 그도 막부 전체가 아닌 일개 번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 판단하진 않았다.
비록 사쓰마 번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고 해도 말이다.
'뭐하면 멀리서 화포로 항구나 해안가를 초토화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현시점에서 유구 섬에 영향력을 끼치겠다고 비싼 포탄값과 선원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쓰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마쓰마에 번과 싸워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인들의 지지를 받는 게 더 나았다.
어차피 아이누 섬의 항구가 발전하기 시작하면 주변의 아이누들이 그곳으로 몰릴 테고, 그러면 마쓰마에 번이 집적대는 건 필연적이라고 봤다.
그때를 대비하고 있던 정성국이었기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뭐 당장 그들을 내쫓는 거야 쉽겠지. 허나 그 이후엔? 우리가 떠난 뒤에 보복받을 수도 있네. 우리가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며 지켜줄 게 아니라면 아예 개입하지 않는 게 상책일세. 거기에 포탄 재고가 넉넉한 것도 아니고."
정성국의 어조에 섞인 단호함을 깨닫고 김봉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알겠습니다."
정성국은 대답하는 김봉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안타까운 건가?"
이에 김봉길은 슬쩍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뭐 우리가 예전에 왜놈들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째 남 일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정을 바꾸진 않았다.
'그들이 좀 안타깝긴 한데 당장은 여유가 없으니...나중에 여유가 되면 그때 생각해봐야지.'
"이해는 하네. 허나 당장 배 한 척이 아쉬운 상황이니 어쩌겠는가."
이런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유구인을 향한 동정을 고이 접어두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무슨 뜻인지 잘 알겠으니 걱정 마십시오."
정성국은 그런 김봉길의 자세에 빙긋 웃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를 믿겠네."
* * *
해가 지고 어두워져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무렵.
한 천막 안에서 정성국이 다시 한번 꼼꼼하게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호롱불의 도움을 받아 살펴보았다.
그 종이엔 이곳을 어떻게 개발할지, 길은 어느 방향으로 낼지, 취수는 어디서 할지, 하수는 어떻게 처리할지, 밭은 어디에 조성할지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 개척촌에서 대략 만들어 두었지만, 이곳에 도착해 이곳의 지형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몇 가지를 변경했기에 정성국이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정성국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대로만 하면 될 것 같네."
그러자 그 탁자 너머로 그동안 개척촌 건설의 실무를 도맡았기에 이주민으로 선발된 대목장 한창호가 입을 열었다.
"대방 어르신. 허면 이대로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창호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정성국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헌데 대방 어르신. 이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모호 합니다. 대방 어르신께서 이곳의 지명을 지어주시지요."
"끙..."
한창호의 말에 정성국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애초에 작명에는 자신이 없는 정성국이었다.
거기에 그는 예전 지명들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지명을 짓는 것이 더 힘든 감이 없지 않았다.
'지명 붙이는 거 정말 힘든데...그냥 대충 지을까? 아니지. 생각해보면 앞으로 수많은 지명을 지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대충 지을 수는 없어. 일단 지명을 어떻게 붙일지 규칙을 세우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럼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고민해봐야 좋은 이름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당분간 큰 도시로 발전될 곳의 이름은 조선에서 따오자. 대충 위치에 맞춰서 지역 이름을 붙이고 그 앞에 '신'을 붙이면...아니다. 한자보단 우리말인 '새' 를 붙이면 되겠지.'
처음엔 의주와 신의주를 생각해서 '신(新)'을 붙일까 했던 정성국이었지만 굳이 한자를 쓸 까닭이 없었기에 '새'를 붙이기로 했다.
어차피 유럽인들이 새롭게 개척한 신대륙 대부분 도시들이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뉴 암스테르담이니 뉴 요크니 하는 도시부터 저 남쪽에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 역시 새로운 스페인이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원주민들이 사는 곳은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부족 이름을 따 지으면 될 거 같네. 그리고 훗날 주(州) 이름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따거나 그들이 바라는 이름을 택하자.'
결국, 정성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북미에 원주민들과 결합해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훗날 이들 부족의 이름이 잊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 땅에 먼저 살았던 선주민이었기에 지명으로나마 그 이름을 남겨주고 싶었던 정성국이었다.
그렇게 정성국이 원칙을 정하고 한쪽에 있던 이 일대의 지도를 꺼내 비어있는 탁자에 펼쳤다.
'그럼 어디 보자...지금 이곳을 뭐라고 붙일까. 새인천? 이건 살짝 아까운데...이건 샌프란시스코를 개발해 그곳에 지명을 붙이도록 하고...그래. 이곳은 새김포 항이라고 하자. 그리고 이 안쪽에도 항구를 하나 만들 생각이니 이곳은 새마포 정도로 붙이면 되겠지.'
내심 자신이 정한 이름이 만족스러웠던 정성국은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한창호를 보고 이야기했다.
"앞으로 이곳을 새김포라고 부르지. 그리고 이 안쪽에 만들 항구는 새마포로 하고."
정성국이 지도에 손을 대며 두 곳을 가리키며 이름을 정하자 한창호는 무난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갑자기 드는 생각에 빙긋 웃었다.
"호오. 허면 이 안쪽은 훗날 새한성이 들어서는 겝니까?"
정성국은 그런 한창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다시 시선을 내려 눈으로 새크라멘토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기억에 새크라멘토가 들어서는 자리였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저곳에 도시를 만들고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긴 해야 할 텐데...새한성 보다는 차라리 서울을 붙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정성국은 잠시 미국의 수도였던 워싱턴을 떠올렸지만 당장은 남의 식민지였으니 바로 신경을 껐다.
'뭐 북미를 모두 차지한다면야...유럽을 생각해서라도 대서양에 집중하기 위해 동부에 수도를 건설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건 먼 훗날 일이겠지. 다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이곳에 수도를 세우는 게 살짝 불안하긴 해.'
캘리포니아 지역은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걸쳐 있었기에 지진이 간혹 일어났다.
이주민들 역시 도착하고 나서 약한 지진을 경험하고 살짝 놀라기도 했고.
다만 이곳에 오는 도중 받은 여러 교육 중에 그에 관한 이야기도 미리 해두었기에 큰 혼란은 없었다.
'뭐 수도를 정하는 거야 먼일이니까. 서울 이란 이름은 당분간 남겨 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