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정성국의 반응에 옆에 있던 김봉길도 잽싸게 망원경을 꺼내 눈에 가져다 댔다.
"오. 몰라보겠는데요?"
그들이 전에 정박했었던 지역은 그들이 떠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이 떠날 때만 해도 임시로 만든 조그마한 선착장만이 존재했던 항구에는 어느덧 여러 선착장과 더불어 카누들이 바글바글했다.
또한, 그들이 머물렀던 적당한 크기의 야영지를 제외하면 숲이 울창했던 지역은 어느덧 숲보다는 원주민 특유의 수많은 티피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외곽으로는 개간된 밭이 보였고 그곳에서 여러 작물이 자라고 있었고.
그들이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던 김봉길은 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헌데 대방 어르신. 이건 오히려 곤란해 진 거 아닙니까? 저희가 머물 장소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그런 김봉길의 말에도 망원경에 눈을 떼지 않고 한참을 샅샅이 훑어보던 정성국이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예? 뭐가 말입니까?"
"저 풍경 말일세."
"음?"
계속해서 망원경에 눈을 떼지 않고 살펴보는 정성국을 보면서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다시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는 김봉길이었다.
그렇게 잠시 망원경을 통해 티피들이 있는 곳을 살펴보던 김봉길은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그러고보니...미완성인 천막도 많고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군요? 어? 설마?"
김봉길이 보기에 저 정도 규모라면 최소 사오백 명이 머무는 큰 부족이 아닐까 싶었다.
허나 규모를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이에 곧바로 다시 망원경으로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에 미완성인 티피들, 즉 나무로 뼈대만 엮은 티피들이 꽤 많이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쪽에서 나무로 티피의 뼈대를 설치하는 원주민들을 보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설치만 한다? 자신들이 머무르기 위한 곳이 아니라면 설마...?'
그때 정성국은 선착장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유유히 다가오는 카누를 발견하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곳에 타고 있는 사람을 확인한 정성국은 망원경을 눈에서 떼며 환하게 웃었다.
"뭐 정확한 건 저 친구에게 확인해보면 알겠지. 일단은 이곳에서 정박하세.“
그 말에 김봉길은 카누에 타고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카누에는 이곳에 머물렀던 김종삼이 타고 있었다.
이를 보고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잠시 정선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김종삼이 타고 있던 카누는 일단 정박해있는 지급 함선으로 다가와 줄사다리를 타고 지급 함선으로 올라왔다.
지급 함선에 승선한 김종삼은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마치 헤어진 부모를 만난 것 마냥 눈물을 글썽이면서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대방 어르신!"
"오랜만이구나. 종삼아. 잘 있었느냐?"
정성국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안부를 묻자 김종삼은 이내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방 어르신도 별일 없으셨군요."
"그래. 다른 녀석들은 잘 있고?"
"물론입니다. 다들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남아있던 선원들에게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김종삼의 답변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거 다행이구나. 헌데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고...일단 이주민들을 쉬게 하는 게 우선이라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러자 김종삼은 무엇을 물어볼지 알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시지요."
"혹시 저곳에 다른 원주민 부족이 들어선 것이냐?"
정성국의 질문에 역시나 싶었는지 바로 고개를 흔드는 김종삼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곳은 이번에 도착할 이주민을 위한 원주민들의 배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허어...역시 그랬나."
정성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에 고마우면서도 탄식했다.
이들의 행동에 정성국의 머릿속엔 동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동부의 원주민들도 처음 그곳으로 이주했던 불쌍한 유럽인들을 도와주었다.
굶어 죽어가는 유럽인들에게 식량도 제공해주고 걸핏하면 농사를 망치는 유럽인들에게 이곳에 맞는 작물과 농사법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움을 받고 정착한 유럽인들은 곧 원주민들의 땅을 탐내 그들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했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해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 학살을 시작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다.
그리고 정성국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이주민들을 환영해주는 원주민들을 품고 함께 이곳을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을 뿐.
그때 김봉길이 김종삼의 말을 듣고 감탄하면서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어이구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야영지 터도 제대로 다져놔서 부족한 천막만 조금 설치하면 당장 이주민이 내려서 쉴 수 있겠는데? 헌데 이거 너무 과하게 친절한 것 아닌가? 야영지 터를 넓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저 많은 원주민 천막까지?"
그러자 김종삼은 왜 원주민들이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원주민들이 친절하더군요. 순박하기도 하고. 거기에 저희 덕분에 식량이 풍족해졌으니까요. 그 은혜를 갚는다면서 여러 부족이 조금씩 도와주었습니다."
그 말에 짚이는 것이 있었기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아. 종자를 나눠준 건가?"
"예. 처음 대방 어르신이 떠나고 나서 남은 녀석들과 함께 조그맣게 밭을 만들어서 대방 어르신이 명하신 대로 밀을 심었습니다. 가끔 이곳에 방문하는 원주민들이 그걸 보고 꽤 관심을 두더군요."
"아하. 그럼 겨울 밀을 수확하고 나서 그걸 원주민에게 나눠준 건가 보네?"
"예. 선장님. 밀을 수확하고 가루를 내어 전을 부쳐서 대접해주자 다들 잘 먹더군요. 그리고 그 이후로 저희가 여러 종자를 심는 것을 보고 배우기 시작했고 말입니다. 이곳을 좀 돌아다녀 보니 이들은 주로 수렵과 채집 위주의 생활이었습니다만...저희가 하는 것을 보고 부족 마을 주변에 저희가 나눠준 종자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확도 거두었구요. 그 이후로 도와줄 것은 없는지 자주 찾아오더군요."
그러면서 김종삼이 대략 이곳에 있었던 일을 압축해 이야기했다.
그것을 들으면서 정성국은 생각했다.
역시 친해지는 데는 먹을 것을 나누는 것만 한 게 없다고.
특히나 이곳에 있던 원주민들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으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다.
물론 이곳은 풍요로웠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만은 했지만 제대로 인구를 부양하기란 쉽지 않았다.
원주민들이라고 농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합한 작물이 없었을 뿐.
그나마 중미에는 그나마 옥수수와 감자가 존재했지만,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농사 대신 채집을 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이 나타나 제대로 된 작물을 전해준 셈이다.
그걸 깨닫고 원주민들이 그렇게 관심을 보였던 것일 테고.
이곳에 남은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작물을 재배한 원주민들은 손쉽게 수확의 기쁨을 누렸고 다양한 먹거리를 얻었다.
그들이 그동안 주식으로 먹어왔던 도토리와는 전혀 다른.
그러니 원주민들이 이들에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때 남아있던 선원들이 슬쩍 이야기했다.
다른 이주민들이 더 올 텐데 이곳에 자리 잡아도 괜찮겠냐고.
이에 샌프란시스코만에 인접해 있던 여러 부족은 오히려 환영했다.
그동안 이곳에 남았던 선원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어왔었기에.
특히 이들이 가진 기술은 대단했고 덕분에 흑요석으로 사냥하던 때에 비하면 편해지지 않았나.
거기에 이들은 먼저 호의를 베풀었고.
그러니 곧 이곳으로 다른 이주민들이 도착할 거라고 하자 오히려 서로 나서서 도와주려고 나선 것이다.
그런 흐름을 짐작한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 중인 김종삼을 바라보았다.
김종삼을 비롯한 이곳에 남았던 선원들이 정말 잘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정성국이 이들을 이곳에 남기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을 해주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들의 고생을 위로했다.
"정말 큰 일을 해냈어. 정말 잘했네. 잘했어."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던 김봉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러게 말입니다. 헌데 이곳에서 작물이 잘 자라든?"
아무리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조선인의 관심사는 땅이라 그런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는 김봉길이었다.
그런 김봉길의 질문에 김종삼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예. 고작 밭에서 몇 가지 작물을 심어본 게 다입니다만...옥토라 그런지 잘 자라더군요. 생산력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고작 이곳만 해도 그런데 전에 작은 배로 이동해 탐색했던 안쪽까지 들어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정말 대단할 것 같습니다."
"허."
김종삼의 대답에서 이 땅의 생산력에 대한 자신감을 느낀 김봉길이 감탄했다.
정성국이야 애초에 이곳이 비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말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선착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허면 저 선착장에 있는 카누들은?"
"도와주러 온 원주민들이 타고 온 카누입니다. 헌데 제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일찍 출발하신 겁니까?"
그러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던 김봉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아. 여기 원상 최고의 선장 덕분에 조금은 단축할 수 있었지. 좀 일찍 출발하기도 했고."
그러자 헤헤거리는 김봉길 선장이었고 김종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로 정성국에게 물었다.
"대방 어르신이 위생과 방역을 철저히 하시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다 끝낼 생각이었습니다만...어쩔까요? 바로 원주민들을 돌려보낼까요?"
정성국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도 데리고 온 만큼 당분간은 철저히 원주민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타고 다닐 말과 일을 시킬 소, 그리고 이곳으로 오면서 각 배의 갑판에서 신선한 달걀을 제공해주었던 닭까지.
모두 이곳엔 없는 동물들이었고 그렇기에 이곳 원주민들의 면역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인간에게 치명적인 병균은 대부분 가축에서 생긴다고 알고 있었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괜히 이곳에 원주민이 출입했다가 전염병이라도 걸리는 날엔 우호적이었던 분위기가 사라져버릴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당분간 돼지는 함부로 못 데려오겠는데...일단 다음에는 양과 염소 정도만 더 추가해 데려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김종삼에게 말했다.
"그러도록 하게. 저들의 뜻은 정말 고맙지만, 마소도 끌고 왔는지라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이 근처엔 절대로 오지 말아 달라고 꼭 전해주고."
다시 한번 당부하는 정성국의 말에 김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부분은 확실히 이야기해 두었습니다만 사람을 보내 다시 한번 말해두겠습니다. 당분간은 출입을 금한다고."
"그래. 부탁하지."
그 말을 끝으로 김종삼은 바로 지급 함선에서 내려 카누를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가 도와주던 원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그들을 되돌려보냈다.
원주민들은 선원들이 기다리던 이주민들이 도착한 것을 축하하며 카누를 타고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이 다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정성국은 지급 함선을 선착장에 정박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1661년 8월 20일.
개척촌을 떠났던 1200명의 이주민이 처음으로 북미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