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이누 섬에서 하루를 쉰 정성국과 이주민들은 곧바로 다시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바람과 해류의 도움으로 쭉쭉 나아갔지만 그럼에도 워낙 먼 거리였기에 항해 일수가 길어졌다.
개척촌에서 아이누 섬까지 7일이 걸렸던 것과는 달리 아이누 섬에서 중간기착지로 생각한 어널래스카 섬까지는 그 두 배가 넘는 16일이나 걸렸기에 이주민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며 정성국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눈앞에 보이는 섬이 곧 상륙할 중간기착지라는 것을 듣고 몹시 기뻐하고 있는 이주민들이 가득했다.
그런 이주민들을 잠시 쳐다보고 있을 때 김봉길이 다가왔다.
"대방 어르신.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그렇군. 고생했네. 헌데 저곳에 임시로 선착장을 만드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
정성국이 갑판 위에서 기뻐하는 이주민들을 바라보고 묻자 김봉길은 그의 마음이 짐작되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건설하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미리 준비해두었기에 하루면 충분합니다. 바로 선원들을 재촉하지요."
"음. 미안하네만 고생 좀 해주게."
김봉길은 전에 정박했었던 해안가 가까이에 배를 정박시키고 보트에 선원들을 태워 배에 있던 목재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능숙하게 선착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주민들도 갑판에서 선원들이 하는 일을 바라보기보다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덕분에 노을이 질 무렵 임시로 선착장이 건설되었고 오랜만에 땅을 밟겠다며 이주민들 대부분은 배에서 내려 야영을 택했다.
* * *
선원들과 이주민들이 합심해서 야영지를 건설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정성국을 향해 김봉길과 각 배의 선장들이 다가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선장님."
"왔는가. 그래. 다들 별일은 없었나? 이주민들은 괜찮고?"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의 뒤편에 서 있던 2번 함의 선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별일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3번 함의 선장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주민들은 괜찮았습니다만...말은 6마리, 소는 4마리가 폐사했습니다."
그러나 정성국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만큼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도 힘든 판에 비좁은 곳에서 지내야 하는 동물들은 오죽 힘들까.
'오히려 그 정도면 잘 관리한 거겠지.'
북미에 마소를 운송해야 하는 만큼 정성국은 개척촌에 도착하자마자 건조 중이던 3번째 지급 함선을 말과 소를 운송하는 데 적합하게 내부 구조를 개조했다.
덕분에 3번 함은 마소 모두 암수 합쳐 각 100마리씩 총 400마리를 태우고 있었다.
거기에 그를 관리할 목부들이 추가로 탑승하고 있었고.
아마 이 때문에 마소의 폐사가 적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가? 처리는?"
"바로 도축해 훈제로 만들었습니다."
3번 함 선장의 말에 정성국은 쓰게 웃었다.
"쩝...꽤 비싼 식량이 되어 버렸군. 잘했네. 아. 그리고 목부들에게 힘들겠지만, 최대한 위생을 신경 써달라고 하게."
"물론입니다. 목부들이 매일같이 마소의 똥오줌을 치우느라 바쁘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래. 부탁하네."
* * *
"대방 어르신. 출항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가.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
"예. 대방 어르신."
정성국이 명령을 내리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손짓했다.
곧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돛이 내려오며 바람을 받아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갑판 위에서 선착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겠지?"
김봉길은 정성국의 혼잣말을 듣고 곧바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만약을 대비해 충분히 보강해 두었으니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이곳도 천혜의 양항(良港)이라 바다가 거칠어진다고 할지라도 크게 파손되지는 않을 겁니다."
"흐음. 그랬으면 좋겠군."
그때 김봉길이 정성국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대방 어르신."
"음? 할 말이라도 있나?"
의아하다는 듯 선착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김봉길을 쳐다보는 정성국을 향해 김봉길이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 섬은 계속해서 중간기착지로 이용될 테니 섬 이름을 지어 주시지요."
"음? 선원들끼리 대충 지어 기재하라고 하지 않았나."
쿠릴 열도부터 알류샨 열도까지 워낙 많은 섬이 죽 이어져 있었고 예전 기억으로 이름을 짓기엔 그 어원을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해서 선원들에게 알아서 섬 이름을 지으라고 이야기해 두었던 정성국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의문을 품었다.
정성국의 의문에 김봉길이 곧바로 대답했다.
"일단 조그만 섬들이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대충 지은 이름이다 보니 계속해서 불리긴 좀 그렇습니다. 이 섬은 이제 계속해서 방문할 섬이니 그럴듯한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던 정성국은 눈앞에 김봉길을 보고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름 붙일 게 많긴 하지. 아직 베링이 태어나지도 못했으니 그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베링 해, 베링 해협, 베링 섬 등의 이름을 쓰기도 애매하고. 어차피 이 친구가 훗날 이 바다를 처음으로 횡단한 배의 선장으로 기록될 것 같으니까...'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흐음...그럼 이 섬은 봉길 섬이라고 하게."
김봉길은 그런 정성국의 말에 움찔했다.
"예? 설마..."
"자네 이름을 붙인걸세."
그러자 화들짝 놀란 김봉길이 고개를 흔들고 두 손을 저었다.
"어찌 저 중요한 중간기착지에 제 이름을 붙인단 말입니까."
"왜 못 붙이겠는가. 어차피 먼저 발견해서 이름을 붙이면 그만일세. 이 항로를 발견한 것도 다 자네의 공이니 이 섬의 이름을 자네의 이름으로 하세. 저 남만인들도 대부분 그런식으로 섬의 이름을 짓는다네."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하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다는 생각에 들떠 얼굴이 벌게지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그게 제 공이라기보다는 대방 어르신의 공이 크지 않습니까?"
"실제로 선원들을 통솔해서 배를 운항한 것은 자네이지 않나. 그러니 부담 갖지 말게. 아. 그러고 보면 이 바다도 아직 이름이 없지? 이 바다도 자네의 이름을 따서 짓도록 하지. 봉길 해. 어떤가."
"허억."
한 바다의 이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짓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기함한 김봉길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지도가 떠올랐다.
태평양에 비견될 수는 없지만 동해보다 넓은 이 풍요로운 바다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다니.
김봉길은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생각에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건...좀...과한거 같습니다. 어찌...제가..."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뭐 어떤가. 처음으로 이곳을 항해한 배의 선장이 자넨데. 그런 자네를 기리기 위해 붙인걸세."
그러면서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베링에게 미안하니 베링 섬은 그대로 이름을 붙이도록 하고...뭐 베링 해협은 아마도 헌수 해협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정성국이 박헌수를 훗날 북쪽으로 보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 김봉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너무 과분하다면서 차라리 정성국의 이름을 붙이는 게 맞지 않느냐고 이야기했다.
"차라리 대방 어르신의..."
그러자 정성국은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아니. 최소한 바다 이름은 뱃사람의 이름을 따는 게 맞는다고 보네. 그러니 우리 원상의 선장 중에 가장 선임이자 처음으로 이 바다를 항해한 자네의 이름을 붙이는 게 맞겠지. 그러니 그렇게 기재하게. 명령일세."
"어...예."
단호한 정성국의 명령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봉길을 뒤로 한 채 정성국은 선실로 내려가며 생각했다.
'그 악명높은 베링 해에 내 이름을 붙이라고? 성국 해? 나중에 겨울마다 이곳으로 조업하러 몰려드는 수많은 선원이 내 이름이 붙은 바다에서 쌍욕을 해댈 것이 뻔한데? 자네의 희생을 잊지 않겠네. 선장.'
극한 직업으로 불리는 겨울철 대게잡이 어선의 선원들에게 욕을 먹고 싶지 않았던 정성국이었다.
* * *
"저긴가?"
"그런가 본데?"
"와. 산맥들 좀 보게. 개척촌이 생각나는데?"
"그러게 말여. 음? 저 강으로 들어가는 건가?"
"강이 아니라 바다라고 그랬잖여. 자네는 교육 시간에 졸았는감."
"크흠."
갑판에 올라왔다가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게 된 운 좋은 이주민들이 잔뜩 흥분해서 목을 빼면서 북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정성국은 선미에서 그런 이주민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김봉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생했네. 선장. 고작 두 번째 항해인데 능숙하구먼?"
"그럼요! 제가 원상 최고의 선장 아니겠습니까!"
바다와 섬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이후로 묘하게 텐션이 올라간 김봉길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정성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용케 기간을 단축했군?"
첫 항해일 때는 봉길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20일이 넘게 걸렸던 것에 비해 이번 항해에는 16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에 감탄한 정성국이 그 비결을 묻자 김봉길은 씩 웃고 말했다.
"예. 저번에야 초행이라 해류를 파악하지 못해 좀 고생을 했지만, 이번엔 해류를 잘 타서 말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허면 이제부턴 이렇게 빠르게 올 수 있다는 건가?"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난처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뭐...바람이 도와준다면야 가능합니다만..."
바람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에 정성국은 쓰게 웃고 입을 열었다.
"일단 이번 항해는 총 52일이 걸린 셈인가?"
"예. 다만 이번 항해에는 크흠. 봉길 섬에서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45일 안쪽으로 단축해 보겠습니다."
"그런가."
김봉길의 호기로운 답변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해봤다.
이번 항해에서 실질적인 항해 일수는 40일이었다.
다만 아이누 섬에서 하루를, 그리고 봉길 섬에서 10일을 넘게 보냈다.
봉길 섬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낸 이유는 이주민들의 휴식 문제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훗날 이주민을 위한 야영지의 확장과 선착장의 보강, 그리고 식량 확보였다.
특히 아이누 섬의 경우 이미 비축해 놓은 식량을 옮기기만 하면 됐던 반면 봉길 섬에서는 직접 식량을 확보하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게 가공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쯧. 배가 좀 여유로우면 좋으련만. 봉길 섬에도 제대로 된 항구를 건설하고 식량을 비축해둔다면 지급 함선으로도 43일 만에 이곳 북미로 오는 게 가능해 보이기는 하네. 당장 더 줄이기는 힘들어 보이고. 결국, 넉넉잡고 50일 정도 생각하면 되려나.'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정성국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유유히 샌프란시스코만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보이는 조그마한 섬.
'흠...저게 그 유명한 앨커트래즈섬인가. 나중에 해군 기지나 방어 요새로 쓰기 딱 좋긴 하구나.'
샌프란시스코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섬이 있었기에 위치가 좋아 처음에는 요새를 지었던 미국이었다.
그러다 남북전쟁 이후 범죄자들을 가두기 시작했고 후에는 군사 감옥으로, 연방 교도소로 바뀌게 되고.
나중엔 관광지로 바뀌게 되는 앨커트래즈섬을 보고 정성국은 생각했다.
'위치는 정말 좋은데 여기에 요새를 건설하면 스페인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묵혀 둬야겠네. 흐음.'
위치가 좋긴 했지만 당분간 스페인의 눈을 피해 조용히 정착하고 싶었던 정성국은 애써 앨커트래즈섬에서 눈을 뗐다.
잠시 후 정성국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