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32화 (32/850)

32화

정성국은 복도를 지나치며 슬쩍슬쩍 선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주민들의 분위기는 괜찮았다.

배멀미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었지만 그 외에는 오랜만에 편하게 쉴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히려 이주민 중에 몇몇은 강제로 공부해야 하는 게 더 힘들다고 구시렁거리는 경우도 몇 있었다.

이번 항해는 장거리 항해였고 중간에 내릴 수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갑판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것 외에는 좁은 선실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주민을 대상으로 여러 교육을 시행했다.

기본적인 한글부터 지금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무엇인지 등등.

'그러고 보면 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교육 시간도 줄어들겠네. 미리 준비해둬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선실들을 지나쳐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에서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김봉길은 갑판으로 나온 정성국을 보고 다가왔다.

"대방 어르신. 딱 맞춰 나오셨군요. 곧 선원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아.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 저기 보이는 게 아이누 섬이지?"

정성국이 갑판에 서서 옆으로 보이는 산맥을 가리키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곧 작년에 정박했었던 아이누 만(아니바 만)에 도착할 겁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선착장 정도는 만들어 두었을 테니 곧 보이지 않겠습니까."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허리춤에서 망원경을 꺼내 앞쪽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망원경을 통해 선착장과 그곳에 정박하고 있는 기범선이 보였다.

"오. 저기 보이는군."

그 말에 김봉길도 망원경을 꺼내 눈에 가져다 대고 곧 정박할 선착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튼튼한 나무로 만든 선착장은 여러 개가 만들어져 있어 지급 함선 3척이 동시에 정박하고도 남았다.

"허어. 꽤 잘 만들어뒀네요. 덕분에 편하게 하선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군. 다행이야. 미리 준비하길 잘했군."

정성국이 망원경에 눈을 떼며 만족한 듯 이야기하자 김봉길은 정성국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했다.

"허면 예정대로 이곳에서 하루 정박할까요?"

"그래야겠지. 이곳에서 식수와 식량을 보급받고 바로 떠나야 하네. 이주민들을 생각하면 더 쉬게 해주고 싶지만..."

정성국이 배에 타고 있는 이주민을 생각해 잠시 말을 흐리자 김봉길은 바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미리 준비해 두었지만, 다음 정박할 섬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아아. 도착하자마자 준비한 나무로 대충 선착장을 만들고 사냥을 해서 식량을 채우는데도 꽤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러니 그때 섬에서 적당히 쉬게 하면 되겠지."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착장을 만드느라 고생할 선원들을 생각하곤 살짝 아쉽다는 듯 말했다.

"미리 곳곳에 쉴만한 장소를 만들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자 정성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러고 싶긴 했지만, 범선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그들이 개척한 항로를 따르자면 바람과 해류를 거슬러 이동해야 했고 그러면 너무 느려서 답답할 정도이다 보니.

화물을 가득 싣고 개척촌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모든 화물을 내린 빈 배가 회항하는 속도가 더 느리다는 계산에 미리 배를 보내 하나씩 징검다리 식으로 항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당장은 범선뿐이니 말일세. 그나마 저기 저 기범선이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항로 곳곳에 조금씩 항구를 늘려나갈걸세."

"그렇습니까? 허면 나중에 이주할수록 편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게 갑판에서 정성국과 김봉길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느덧 배가 아이누섬의 항구에 도달했다.

선원들이 배를 선착장으로 모는 동안 김봉길이 갑판에서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낯익은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저기 박헌수 녀석이 마중 나와 있네요."

"그렇군. 박 선장이 일을 참 잘해두었어."

"에이. 선장이 배를 잘 몰면 그만이죠."

정성국이 박헌수를 칭찬하자 잽싸게 초를 치는 김봉길이었다.

정성국은 그런 김봉길을 보고 혀를 차며 놀렸다.

"쯧쯧. 후배를 시기하는 건가? 추하네. 이 사람아."

"아니 뭐...시기라기 보다는...저 녀석이 맡은 배가 기범선이라 나중에 새로운 기선이 건조되면 바로 그 배의 선장으로 옮겨갈까 봐 살짝 견제하는 거죠. 헤헤헤."

한결같은 새 배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고 말았다.

"거참...새 배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기는 한데...당장 건조되는 천급 함선만 해도 범선이니 오히려 자네가 더 유리하지."

"뭐 그렇긴 합니다만...대방 어르신은 내심 기선을 더 높이 평가하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항로 곳곳에 항구가 건설되면 결국 대방 어르신도 기선을 선택하실 테지요."

의외로 날카로운 김봉길의 분석에 살짝 놀란 정성국은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흐. 날카롭군. 허나 너무 걱정 말게. 어차피 다 똑같은 배일 뿐 아닌가."

"오! 그렇지요! 그러니 나중에 제가..."

"자네는 일단 이 배에 애정부터 좀 갖게. 에잉."

* * *

정성국이 먼저 지급 함선에서 하선하자 선착장에 나와 있던 박헌수 선장이 다가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오랜만일세. 선장. 선착장을 아주 잘 만들어뒀군."

정성국의 칭찬에 박헌수는 빙긋 웃으며 아이누인들의 도움이 컸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누인들 덕분입니다. 그들이 도와주어서 단기간에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

"예. 투로시노가 동족들에게 잘 이야기한 것 같더군요."

박헌수의 보고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시선을 돌렸다.

정성국이 바라본 곳에는 베어진 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그거 다행이군. 저쪽까지 모두 항구로 만들 생각인가?"

"예. 천천히 선착장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이곳 사람들도 배를 타고 물질을 하는 만큼 저들이 쓸 선착장도 건설할 생각이구요."

박헌수의 보고에 정성국은 훗날 이곳에 세워질 항구의 규모를 상상해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보고대로 저 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까지 모두 선착장을 건설한다면 훗날 수백 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좋군."

"아. 그리고 선원들의 보고인데 이곳에 해삼이 좀 있답니다."

"해삼?"

"예. 다만 조선의 해삼과는 생김새가 좀 다르다던데 이게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확신이 없는 박헌수의 말이었지만 이를 듣던 정성국은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거 의외로 대박인데? 해달 모피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해삼이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한국인이었던 정성국은 해삼은 가끔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안줏거리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그의 입맛엔 별로라 잘 먹지도 않았기에 미처 생각을 못 했었다.

허나 중국인들의 해삼 사랑마저 모르진 않았다.

오죽하면 남자에겐 해삼이, 여자에겐 전복이 이롭다는 뜻의 남삼여포(男蔘女鮑)란 사자성어까지 존재할까.

중국인들은 상어 지느러미, 전복, 해삼을 바다의 삼보(三寶)로 생각했었고 특히나 해삼의 경우는 중국인들이 전 세계 해삼의 90% 이상을 소비했었으니.

덕분에 일본에선 중국에 해삼을 내다 파느라 남은 내장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제일 비싸다던 해삼이 홋카이도의 해삼이라지? 해삼은 오히려 찬 바다에서 나온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고 들었으니 이곳의 해삼도 최소 상품이란 소린데. 정말 잘 됐네.'

해삼의 경우 수온이 낮아야 성장이 빠른 편이라 찬 바다에서 나온 것을 상품으로 친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해삼은 돌기가 다른 해삼보다 많아 최상품으로 치고.

최상품의 해삼이 300g에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린다는 뉴스를 기억하고 있던 정성국은 또 다른 돈줄이 생기자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정성국은 박헌수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니. 충분히 가치가 있을걸세. 새로운 교역품을 찾다니...정말 잘했네. 선장. 잘했어."

정성국이 과하게 기뻐하며 칭찬하자 잠시 어리둥절하던 박헌수는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교역품으로의 가치가 있다면...앞으로는 해삼도 채취할까요?"

박헌수의 말뜻을 파악하고 정성국은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돈이 되는 것은 맞지만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데 뭐하러 직접 물질을 해서 캔단 말인가.

"직접?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아이누인들에게 우리가 사들인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박헌수를 보며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이것도 해달 모피처럼 매수량의 제한을 둬야 할까? 그런데 해삼은 말려서 파는 거라...어느정도로 제한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데.'

돈이 된다고 무제한으로 잡았다가 괜히 씨를 말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제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으나 대충 수를 파악할 수 있었던 해달과는 달리 해삼은 그게 어려웠다.

'쩝...이런 일을 전담할 부서를 하나 만들어야 할까. 그러고 보면 해삼은 양식도 가능하지 않나? 양식 산업이라...흐음...어업 연구소?'

정성국은 어업 연구소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시대에 바다는 공유지나 다름이 없었고 그런 만큼 가능한 한 무제한으로 남획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니지. 이건 굳이 지금 시대라서 그런 게 아니야. 명태를 생각해보면 뭐...결국 욕심이 문제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생선인 명태는 수많은 이름이 존재하는데 이는 그만큼 한국 근해에서 많이 잡힌 풍부한 어종이었다는 뜻이다.

허나 무차별적인 남획으로 인해 결국 한국 근해에 잡을 수 있는 명태는 사실상 절멸했고.

90년대인데 설마 남획이 주는 폐해를 몰랐겠는가.

다 알면서도 어민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공무원들은 실적에 눈이 멀어서 노가리와 명태는 다른 생선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저인망을 사용해 싹쓸이한 결과가 한국 명태의 멸종이었을 뿐.

'일단 어느 정도 제한은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고. 결국, 어업 연구소를 세워서 양식 산업도 함께 진행해야겠네. 그리고 하는 김에 농업 연구소, 축산 연구소 등등 다 만들어둬야겠군.'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정성국은 일단 박헌수를 보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저들이 채취해 온 해삼을 잘 말려서 건해삼으로 만들어 청나라에 가져다 팔면 되는데 해달처럼 물량에 좀 제한을 두지. 일단은...1년에 최대 1천 근 정도로 하지."

"건해삼 1천 근이라...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고개를 끄덕인 박헌수를 보고 정성국은 해삼에 팔렸던 정신을 붙잡고 애초에 물어보려고 했던 탄광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탄광은 찾았나?"

그러자 박헌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예. 아이누인들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찾았습니다."

"그래? 흐음...이곳에서 먼가?"

그 말에 박헌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광의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탄광에서 이곳까지는 거리의 문제도 있고 산맥 때문에 운송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 그곳에서 이곳까지 육로로 석탄을 운송해오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다행히 그곳 근처에 항구를 세울만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 새로 항구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운반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예상했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그곳 주변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런가. 허나 문제는 인력인데. 그곳에도 아이누인들이 있던가?"

"예. 이곳의 아이누인들 보다도 조금 열악한 느낌이라...그곳의 사람들을 고용해 석탄을 캐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흐음. 알겠네. 일단 서찰을 써줄 테니 개척촌으로 돌아가 행정청에 넘겨주게나."

"예. 대방 어르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