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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1화 (31/850)

31화

정성국은 눈앞에서 퉁명스러워 보이는 박기동을 보고 피식 웃었다.

다 큰 제자 녀석이 마치 심통 난 아이처럼 보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서운한 게냐?"

"아닙니다. 스승님."

"아니기는. 그 튀어나온 입부터 넣거라. 내일이면 떠나는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얼굴만 보여줄 게냐."

그러자 튀어나온 입을 집어넣기는커녕 오히려 입을 더 삐쭉 내밀면서 말하는 박기동이었다.

"어차피 내일도 선착장에 나갈 생각이니 그때 입을 집어넣겠습니다."

그런 박기동의 행동에 왜 그가 그렇게 삐졌는지 잘 아는 정성국은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증기기관의 장착은 시간문제일 뿐이야. 언젠간 범선을 기선이 대체할 게다."

정성국의 말에도 입을 삐죽이면서 말하는 박기동이었다.

"저도 그럴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는 합니다만...그래도 이번 천급 함선에 증기기관이 배제된 것이 영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그건 네가 만든 증기기관이 별로라서 결정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당장 천급 함선에 증기기관을 부착하기엔 어렵다고 판단했을 뿐이지."

"...끙."

박기동 역시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기에 별말 하지 않았다.

"일단 아이누섬과 교역을 네가 만든 기범선이 전담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기범선을 운용해보면서 나올수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계속 증기기관을 발전시키거라."

"얼마나 발전시켜야 천급 함선 정도에 기관을 장착할 수 있을까요?"

"글쎄다...?"

정성국은 박기동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마의 30노트 벽을 깨고 대서양을 횡단해 수많은 이주민을 신대륙으로 실어날랐던 퀸 메리 호가 대략 8만 톤에 20만 마력이었던가? 그럼 톤 당 2.5마력 정도니까...대충 톤 당 1마력 정도면 10노트는 무난하려나?'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최소한 2천 마력은 넘겨야 무난하게 평속 10노트를 유지하지 않겠느냐?"

정성국의 답변에 어느 세월에 2천 마력까지 증기기관을 발전시킬지 골치가 아파진 박기동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끙...10노트의 벽을 깨야 한다는 거군요. 헌데 이번에 새로 개발되는 천급 함선도 그 정도 속도는 나올 거라고 주명이가 그러던데요?"

"예상대로만 된다면 그럴 게다. 돛도 5개나 되는 만큼 바람과 해류가 도와준다면 15노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르지."

"에고...그럼 최소한 평속 15노트 이상은 나와야 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나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안정적인 속도가 보장되는 기선이라면 10노트만 되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정도만 되어도 항로에 투입하여 사용할 만했고 그러다 보면 더욱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 꾸준히 10노트의 속도만 유지한다면 차라리 기선을 쓰는 게 나아. 발전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기선을 꾸준히 운용하는 게 더 나을 테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대서양을 횡단했던 수많은 증기선의 발전사를 떠올렸다.

처음 평균 8노트의 속도로 대서양을 횡단해 가장 빠른 증기선이라는 명예를 얻었던 시리우스(Sirius) 호를 시작으로 마의 10노트의 벽을 넘어 20노트, 30노트의 벽을 깨버렸던 노르망디 호와 퀸 메리 호까지.

덕분에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목숨을 걸고 항해한 끝에 신대륙에 도착하기까지 66일이 걸리던 대서양 횡단이 5일로 단축되었고 수백만의 이주민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 아니겠는가.

"뭐 내 입장에선 기선으로 10노트만 넘긴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다고 본단다. 그 정도만 되면 항로 곳곳에 항구와 연료저장소를 건설해 기선을 운용하겠다고 약속하마. 범선의 경우는 북미대륙에서 이곳으로 회항할 때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결국 필리핀해 근처까지 이동해야 하는 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으음...알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계속해서 증기기관은 발전해나갈 테고 결국은 주명이가 만드는 모든 선박에 네가 만든 증기기관이 들어갈 테니 말이다."

"예. 스승님."

넙죽 대답은 하면서도 아직 얼굴이 어두운 박기동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찬 정성국은 준비해두었던 서책을 박기동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시간 남으면 이것도 연구해 보아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책을 받아들고 그 안을 살펴보던 박기동은 점점 흥미롭다는 듯 서책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이건? 증기기관차...입니까? 모양이 조금 다른 거 같은데요?"

"다르지. 그건 증기기관차가 아니니까. 굳이 표현하자면...증기자동차...라고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하면 증기 트랙터 라고 하는게 맞겠지만...영어도 좀 가르쳐야하나.'

정성국은 천급 함선이 범선으로 결정 난 이후 박기동이 묘하게 삐졌다는 소리에 여러 연구 거리를 넘겨주기로 하고 적당한 녀석을 찾았다.

그러다 선택한 것이 바로 증기자동차를 변형한 증기 트랙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북미대륙은 광활했고 이 땅들을 개간하려면 인력으론 턱도 없었다.

축력으로 대체하려 해도 당장 이곳에서 마소를 옮기는 판국이었다.

그렇다면 기계로 대체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사람이 부족한 판국이라 가능한한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나았다.

뭐 당장이야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 성과가 나겠지 싶었다.

"음...이건 용도가 뭡니까? 증기기관차의 대체품입니까?"

박기동의 의문에 정성국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람을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허면?"

"당장은 마소를 대신에 밭을 개간하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만들라는 거지. 그것도 대규모로."

"아! 허면 이 뒤쪽에 거대한 쟁기 같은 것을 달아서?"

"그렇지."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기동은 서책에 눈을 처박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거 꽤 괜찮아 보이는데요? 연구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고."

정성국은 그런 제자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놈도 천생 공돌이야. 신기술만 보면 눈이 벌게지는. 뭐 덕분에 이 녀석이 삐진 것도 풀렸고, 나도 편하니 좋은 거겠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허나 쉽지 않을 게다. 거기에 무게도 신경 써야 할 테니."

증기기관차는 철로가 있지만 이 녀석은 비포장도로와 밭을 개간해야 하는 만큼 이동을 생각하자면 무게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허나 박기동은 그런 난관이 있어 오히려 재미있다며 방긋 웃었다.

"그거야 그렇겠죠."

"그건 천천히 연구하거라. 일단 우선은 증기기관의 출력 향상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잘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아직 주변은 어둑했다.

덕분에 바람은 선선했다.

정성국은 잠시 선착장에 정박한 3척의 지급 함선을 바라보았다.

저 지급 함선에는 모든 물자와 이주민들이 탑승해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이주민들이 하나둘 집합해 깨끗하게 씻고 새 옷을 받은 후 배정된 지급 함선의 선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떠나기 위함이었다.

이곳 개척촌의 남은 사람들은 이들의 목적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전라도를 비롯해 곳곳에 땅을 사두고 그곳을 경작하고 관리할 이주민을 가끔 뽑아서 배를 태워 이동시켰기에 이들도 조선 곳곳으로 흩어지겠거니 했을 뿐.

어차피 이 시대에 자신이 사는 마을을 벗어나면 연락이 쉽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목적지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애초에 관이야 막대한 콩고물 덕분에 못 본 척했고.

그러나 요란법석을 떨 필요는 없었기에 별일 아닌 것처럼 평소대로 물건을 싣고 사람들을 태웠다.

'그리고 이제 출항만 하면 되겠지.'

정성국은 선착장까지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새벽이라 쌀쌀한데 뭐하러 나왔습니까 들."

정성국이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 먼저 가볍게 말을 걸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결국, 정성국은 포기하고 먼저 윤휴와 그 뒤에 서 있는 윤의제에게 다가갔다.

"백호 어르신."

"...조심하시게. 무탈하길 빌겠네."

"예. 백호 어르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성국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윤휴였다.

"아마 앞으로 얼굴 보기는 힘들 테지?"

이에 정성국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양반 꽤 오래 살지 않나? 1680년에 죽는 것도 환국에 휘말려 죽는 만큼 더 오래 살것같은데...? 20년이면 아무리 못해도 20노트 속도의 연락선 정도는 나오겠지? 그럼 그때 얼굴 보러 오면 되겠네.'

"글쎄요?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잘 기반을 닦아 놓을 테니 훗날 한번 놀러 오시죠."

"허허허. 다 늙어서 고된 뱃길을 감당할 수나 있겠는가."

그러면서 윤휴는 정성국에게 다가와 조용히 부탁했다.

"다만 자네의 뿌리는 조선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네."

다소 염려가 깃든 윤휴의 눈동자를 보고 정성국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백호 어르신.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래. 믿겠네."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윤휴 뒤편에 서 있던 윤의제를 바라보았다.

윤의제와 꽤 친하게 지냈기에 이렇게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장남이라 선산을 지켜야 한다는데.

정성국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윤의제를 불렀다.

"형."

어차피 미리 만나서 할 이야기는 다 했었기에 윤의제는 별말 하지 않았다.

"그래. 조심히 가고. 나중에 한번 놀러 가마."

"그래. 꼭 놀러 오라고."

그렇게 윤휴와 윤의제와 작별인사를 끝낸 후 옆에서 담담하게 정성국을 바라보고 이는 정평국에게 다가갔다.

"형님."

"먼저 가 있으마. 적당히 정리하고 오너라."

"예. 형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라. 아.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북미로 올 땐 혼자 오지 마라. 일만 하지 말라고. 알겠냐?"

그 말에 피식 웃는 정평국이었고 정성국은 바로 그의 어깨를 두어 번 꽉 두드린 후 뒤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스승님."

"어차피 내가 할 말은 미리 다 해두었으니 더 할 말은 없구나. 앞으로는 너희들이 잘 상의해서 연구 단지를 꾸려나가도록 해라. 적당히 자리가 잡히면 그때 부르마."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연구도 좋지만, 건강을 생각해라. 그리고 너희들도 북미로 올 땐 짝을 찾아서 와라. 알겠느냐?"

"뭐 저희는 아직 인연이 없다보니...흐흐"

그러면서 다들 전아라를 보고 히죽거리는 바람에 정성국은 헛기침했다.

"크흠. 아무튼, 다시 한번 당부하겠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특히 평화하고 기동이는 명심해!"

"예. 스승님."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 정성국은 제자들 틈 속에 있는 전아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제자들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무시하고 시선을 전아라에게 고정했다.

정성국이 다가오자 전아라는 당분간 보지 못할 정성국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오라버니."

"너 역시 마찬가지다. 항상 조심하고. 건강 꼭 챙기고."

"알겠사옵니다. 오라버니. 곧 다시 볼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아라는 두 손을 포개고 있었다.

슬쩍 보니 정성국이 건네준 금가락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성국 역시 어차피 전날, 같이 시간을 보낸 만큼 별말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전아라의 모습을 망막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한번 도닥인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들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정성국은 몸을 돌려 가운데 정박해 있는 지급 함선에 올라탔다.

정성국이 지급 함선에 오르자 김봉길이 다가왔다.

"대방 어르신. 이제 출발할까요?"

"준비는 다 끝난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이제 가세."

"예."

고개를 끄덕인 김봉길이 물러나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돛을 펼치자 슬금슬금 선착장을 빠져나가는 지급 함선 위에서 정성국은 갑판으로 이동했다.

정성국은 갑판에서 선착장에 모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도 손을 들어 마지막으로 배웅했고 선착장의 끝까지 달려 나온 전아라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려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1661년 6월 28일.

정성국과 이주민 1200명이 탑승한 3척의 지급 함선이 유유히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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