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정성국은 전아라의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딱딱한 침상, 그 맞은편에 놓인 책장과 그를 가득 메운 수많은 서적,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과 책장 위에 촛대가 방안을 밝혀 주었다.
스무 살의 여인이 머무는 곳이라고 보기엔 꽤 삭막한 느낌의 방이었기에 정성국은 속으로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전아라는 침상 옆에 있는 책상에서 의자를 빼내 정성국에게 권하고는 자신은 딱딱한 침상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안자고 연구 중이었느냐?"
"네. 대방 어르신."
"연구도 좋지만 좀 쉬어가면서 해라. 바깥 공기도 좀 쐬고."
"아닙니다. 대방 어르신. 연구할 게 많아서 시간을 허투루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점점 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짐작은 갔으니 말이다.
"끙...미안하구나. 연구 시간을 넉넉히 주지 못해서 네가 쉬는 시간을 희생하면서 연구하게 만들어서."
"어?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대방 어르신의 탓이 아닙니다."
혹시 정성국이 오해라도 할까 봐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전아라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래. 알았다. 참. 포탄 생산에 문제는 없느냐?"
"예. 대방 어르신. 예정대로 이번에 떠나는 지급 함선에 포탄 적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고생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포탄을 생산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적재하는 포탄의 숫자가 너무 적은 듯한데..."
이번 항해에 나서면서 지급 함선에 적재되는 포탄은 함선마다 60발.
얼핏 보면 충분해 보였지만 이번에 장착된 화포가 후장식 화포이고 후장식 화포의 발사속도를 보면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지급 함선에 장착된 후장식 화포 4문 가운데 실질적으로 2문을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대포 하나당 발사할 수 있는 포탄은 30발.
분당 5발은 충분히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순식간에 소모될 것이 뻔했다.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수량의 포탄을 위해 출항 시기를 늦출 수는 없었고 어차피 이번 항해에선 3척의 지급 함선이 함께 움직이는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뭐 좀 부족한 감은 있다만...3척이 이동하는 만큼 화력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해적들도 지급 함선 정도의 배 3척이 함께 이동하는 것을 보면 쉽게 덤비지도 못할 테고."
그러자 전아라는 다행이라면서 정성국을 보고 방긋 웃었다.
"그러면 다행입니다만...조금 있으면 이곳을 떠나시는군요."
"그렇지."
담담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어느덧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또한, 큰 눈망울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고.
'허. 이 녀석이 이리 쉽게 눈물을 보일줄은...내가 참 나쁜 놈이구나...'
정성국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속으로 탄식하며 애써 그녀를 다독였다.
"왜 울상이냐.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하지만...그게..."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자리를 잡고 너를 부르마."
"...예? 저를요? 아! 연구인력을..."
정성국의 말에 순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시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겉모습만 드셀 뿐이지 이리 연약한 아이를 그동안 맘고생 시켰으니...내가 죽일 놈이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품 안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내 전아라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시무룩하던 전아라는 갑자기 정성국이 자신의 손을 잡자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도 순간 얼굴을 붉히고 글썽거리는 눈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성국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자 시선을 돌려 손바닥 위를 바라보았다.
"...어? 이건?"
"그동안, 네 마음을 모른척해서 미안하다."
"...오라버니."
전아라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금가락지를 보고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리개를 준비할까 했지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정성국에게는 반지가 제일 나아 보였다.
다만 방물장수를 통해 구할 수 있는 건 두툼한 옥가락지가 대부분이라 정성국이 보기엔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개척촌의 장인에게 급히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다이아를 구해보는건데...흠. 나중에 구해봐야겠네.’
"오랜만에 그렇게 부르는구나. 아라야."
"...흑."
어렸을 때 자신을 부르던 호칭을 입에 올린 아라를 보고 문득 옛 생각이 나던 정성국은 아라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자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잘못하면 네가 더 상처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이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곳으로 떠나는 만큼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럼!"
그렁그렁한 눈망울과는 대조적으로 환하게 웃는 전아라를 보면서 다음으로 준비했던 말을 하기가 꺼려진 정성국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는 너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다가 훗날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다른 부인을 들여야 한다고,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전아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기에 그녀가 혹시 잘못된 소문을 듣고 마음의 상처라도 받을까 두려워 애써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도 알겠지만, 이번 개척은 결국 원주민들과의 화합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난 저들이 원한다면 저들과의 혼인도 생각하고 있고."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전아라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혼란스러운 눈초리로 정성국과 손바닥 위의 금가락지를 바라보았다.
"...허면 이건 무슨 의미로?"
"난 네가 첫째 부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너에겐 잔인한 말이 되겠지만..."
순간 전아라는 단숨에 다가와 정성국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연한 풀 내음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전아라는 입술을 떼고 물러나 정성국을 보고 배시시 웃으며 손바닥 위에 있던 금가락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끼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다만 한가지 약조해주세요. 제가 신대륙에 가기 전까지는 다른 부인을 들이지 않겠다고."
정성국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전아라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또한, 가정의 법도는 중요한 법입니다. 허니 다른 부인을 받아들이기 전에 저에게 미리 말씀해주세요. 제가 됨됨이를 확인해 보고 잘 교육할 테니."
"어...어. 그러마."
"또 다른 말씀은 없으신가요? 오라버니?"
"어...없지."
“마침 잘됐네요. 마침 평화에게 받은 좋은 향의 차가 있거든요. 차 마실 시간은 되시죠?”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의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면 제대로 플래그 세우는 건데? 괜찮겠지?’
* * *
정성국은 계속해서 자신을 보고 히죽대는 강평화를 보고 그를 째려보았다.
"뭐? 왜?"
"히히. 아닙니다. 스승님."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도 자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듯 히히거리는 제자를 보고 정성국은 헛기침하며 집중하기를 요구했다.
"크흠. 집중하자. 평화야. 시간이 얼마 없단다."
"흠흠. 예. 스승님."
강평화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정성국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묻기 시작했다.
"생산은 별문제 없지? 부담되진 않고?"
"그렇습니다. 스승님. 어차피 지급 함선이 매달 건조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후장식 화포의 생산은 크게 부담되진 않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소총은?"
"마찬가지로 생산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또한, 갑오 소총의 성능을 최대한 떨어트린 후장식 소총의 개발 역시 끝났습니다."
강평화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반색하고 급히 묻기 시작했다.
"오? 그래? 그건 생산 단가가 얼마쯤 나오더냐?"
"대략 쌀 6섬 정도입니다."
"허어. 그렇게 싸다고?"
"신철이 녀석 덕분에 단가를 더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서 조총을 떠올렸다.
조총의 생산 단가가 대략 쌀 3섬의 가격인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성능은?"
"사거리를 확 줄였습니다. 강선을 파지 않아서 조총처럼 50보를 넘어가면 제대로 조준해서 사격해봐야 거의 못 맞춘다고 봐야겠지요."
"결국 조총처럼 탄막을 구성해야 한다는 거군. 허면 발사속도는?"
"그야 갑오 소총과 비슷합니다만...속도도 떨어뜨릴까요?"
"가능하겠느냐?"
"뭐 중간에 장전 방식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산 단가가 조금은 오를 것 같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당장 이 소총을 팔아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나중에 필요하다면 적당히 찍어 팔 마음도 있었다.
훗날 아이누나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총을 요구한다면 상황을 봐서 이 다운그레이드 된 소총을 넘겨줄 생각이기도 했고.
그런 만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게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당장 조총에 숙련된 사수도 분당 2, 3발이 한계인 상황에서 이 소총은 분당 10발은 거뜬히 발사할 수 있다 보니 생산 단가의 상승을 감수하더라도 발사속도를 늦추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았다.
"대신 잘 만들어야 한다. 남만인 기술자들이 분해해 보고 손쉽게 갑오 소총처럼 간결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란 소리다."
정성국의 말뜻을 알아들은 강평화는 히죽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그래.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어? 또 시키실 게 있습니까?"
의아한 표정을 하는 강평화를 보고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돌이는 갈아야 제맛이지. 어딜 쉬려고.'
절대 자신을 보고 히죽거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물론이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예? 다음 단계라면?"
"지금 지급 함선에 장착된 후장식 화포를 육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개조해 보아라. 그게 끝나면 구경을 더 키운 새로운 화포의 개발에 착수하고 말이다."
강평화는 이해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음...육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말입니까? 뭐 가벼우니 방어 요새라도 건설하실 생각입니까?"
"요새에 장착할 화포도 필요하고...야전에서 사용할 화포도 필요하지."
정성국의 말에 강평화는 조금은 회의적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아무리 가벼워도 그거 야전에서 쓰기 쉽지 않을 텐데요. 당장 마소도 부족한 판국에."
정성국도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다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렇기야 하지. 다만 훗날을 생각해서 미리 개발을 시작하란 뜻이다. 열심히 운송하고 잘 관리하다 보면 마소도 좀 늘겠지. 끙. 일단은 요새에 장착할 만한 화포부터 개발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뭐 지금 만들고 있는 후장식 화포를 적당히 개조하면 되겠지요. 아무래도 요새에 장착할 화포라면 사정거리를 조금 더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그러면야 더 좋겠지. 아무튼, 앞으로의 개발은 네가 책임져야 할 테니 알아서 판단하거라."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하라는 정성국의 선언에 강평화의 안색은 구겨졌다.
"끙...알겠습니다. 아. 헌데 새로운 화포의 구경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배로 키울까요?"
강평화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달라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현재 후장식 화포의 구경은 60mm였다.
예전에 별생각 없이 3인치 대포를 만들라고 지시하자 장인들은 인치는 또 뭐냐는 반응에 정성국은 그제야 아차 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었다.
그간 장인들에게 미터법을 가르치고 익숙해졌는데 인제 와서 또다시 야드 파운드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해서 미터법으로 바꿔 76mm로 개발하라고 이야기하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기준을 인치로 할 필요가 있을까.
인치를 기준으로 화포를 만들면 결국 76mm니 127mm니 하는 구경이 나올 텐데 미터법만을 배운 장인들이 왜 저런 구경을 개발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결국, 고민 끝에 이곳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무기체계의 기준은 내가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60mm의 개발을 명령했었다.
그런 만큼 새로운 화포의 구경을 굳이 영국이 만든 구경으로 따라갈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흐음...너무 한꺼번에 키우기보단...일단 20mm씩 키워 보아라."
강평화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새로운 화포의 구경은 80mm 가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래. 구경이 커지는 만큼 포탄의 위력도 커질 테니 안전에 항상 유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앞으론 네가 무기 전반을 통솔해야 하니 꼼꼼하게 챙기고."
스승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평화의 얼굴엔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 아라가 아니라요?"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