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정성국은 종이를 내려놓고 집무실 한쪽에서 자리 잡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정평국을 보고 타박했다.
"이놈아. 한성엔 안 갈 거냐?"
그러자 정평국은 찻잔을 내려놓고 형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왜 나를 못 보내서 안달인 게요."
"할 일도 많을 텐데 개척촌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그렇지. 그렇다고 여기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좀 쉽시다. 그리고 원상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기회에 행수들의 역량을 키울 셈이니. 그리고 다음 주에 형님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한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동생의 대답에 정성국은 투덜거렸다.
"거참...핑계는 좋구나."
그러면서도 정평국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내가 떠나면 일에 치여 살 테니 마지막 휴식을 잘 즐기거라.'
곧 정평국이 맡아야 하는 수많은 업무를 생각하고 급격히 마음이 너그러워진 정성국이 다시 내려놓았던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때 정평국이 정성국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형님."
"왜 그러느냐."
"떠나기 전에 이곳에서 혼례를 올려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정성국은 다시 집어 든 종이를 내려놓고 턱을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흠...그 문제는 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다만."
정평국은 자신도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 기억하고는 있소. 헌데 형님. 혹시 그곳에 남은 선원들처럼 원주민과 혼례를 올릴 생각이시오?"
정평국의 물음에 정성국은 안색을 살짝 찡그렸다.
물론 그도 훗날을 생각한다면 원주민과 혼인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효과적으로 저들과 결합하기 위해선 혼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으니까.
다만 정성국으로서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서 주저하고 있기는 하지만...필요하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왜? 넌 반대하느냐?"
정평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오.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지. 형님이 건설하려는 나라의 구성원을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내가 권하고 싶을 정도요. 중원의 역사를 보자면 이민족이 지배 계층에서 자신들끼리 통혼하면 결국 그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소. 그러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통혼하는 것도 괜찮겠지. 허나..."
"허나?"
"꼭 첫째 부인은 아니더라도 조선 여인과도 혼례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보오. 조선인 역시 구성원 중의 한 축을 차지할 테니 말이외다. 아니. 오히려 소수가 될 수도 있겠구려. 그런 만큼 형님의 부인 중에는 조선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보오.“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순간 움찔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구나."
"그렇소. 형님의 성정을 내 모르지 않소만 적합한 처자가 주위에 있지 않소."
그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묘한 웃음기를 띤 정평국의 모습을 보고 정성국은 애써 모른척했다.
"적합한 처자? 누구?"
계속해서 모른 척하는 형의 모습에 순간 버럭대는 정평국이었다.
"아라 말이오! 전아라!"
예상했던 이름이 나오자 정성국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일단 상황을 넘기기 위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설마?"
그러나 정평국은 어디서 그 이름을 자신에게 가져다 대느냐며 단호하게 내쳤다.
"전혀! 그 아이를 감당할 사내가 존재하기는 하오? 그나마 형님한테나 다소곳하지."
정평국의 단호한 어조에 정성국은 그냥 넘어가려는 것을 포기하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흠흠. 그래서 아라와 혼례를 올려라?"
"전에 형님이 그러시지 않았소. 정치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형님이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잘 아오만 그렇다고 형님이 원주민과만 혼인한다면 조선인 이주민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소. 그러니 그들을 보듬어줄 조선 여인이 필요하오."
정성국은 머릿속에 아라를 떠올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라가 세심하게 조선인을 보듬어줄 성격은 아닌 것 같다만..."
딴지를 거는 정성국의 말에 다시 한번 버럭하는 정평국이었고.
"모양새가 그렇다는 거요! 모양새가!"
그런 동생의 반응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평국의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물론 정성국 본인이 조선 출신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인이 원주민 여성 하나라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잘못하다간 파벌이 발생할 수도 있고 훗날 후계 문제까지 고민해야 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전생의 기억이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일부다처제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제대로 표현도 못 하고 자신을 위해 연구소에 틀어박혀 연구와 화약제조에 열중하는 전아라를 떠올리니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현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성국이었지만 어차피 전생에서도 사랑만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면서 애써 자신을 설득했었다.
또한, 정평국의 말처럼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인종이 다른 것은 좋을 것이 없었기에 필요성을 절감하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은 내심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일부다처제를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들 당장 아라와 혼례를 올리기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계속 혼인을 미루고 있던 것이고.
이주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에야 전아라와 혼례를 올리는 게 가능할 것 같았기에.
헌데 그런 형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정평국이 급소를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이에 정성국은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하지만 잘못 하다간 아예 분열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동생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외로 단호했다.
"그거야 형님이 가정을 잘 다스리면 될 문제고."
"흠..."
정성국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자 정평국은 뚱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보시오?"
"좀 의외라서 그런다. 네가 나와 아라의 혼인을 권할 줄은..."
"아라의 출신 때문에? 그게 무슨 상관이오. 조선에서 살 것도 아닌데."
어깨를 으쓱하며 정평국이 대답했다.
정성국은 동생의 쿨한 발언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쿨병이라도 걸려왔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허어."
정평국은 그런 형의 얼굴을 보고 그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말을 덧붙였다.
"형님이 언젠가 그랬었지요. 인연이 닿은 여인과 단둘이 백년해로하겠다고. 그때부터 대충 눈치는 챘었소. 아라만 형님에게 연정을 품은 것이 아니라 형님도 아라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아라와 내가 함께 있을 때 묘하게 내 눈치를 보기도 했었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게 희한하기는 했지. 형님이 아라의 신분을 꺼릴 리는 만무했으니까. 그래서 형님이 아라와 거리를 두는 게 나 때문이 아닌가 했었소."
'내가 얘 앞에서 눈치를 봤던가? 오히려 난 아라의 나이 때문에 거리를 둔 건데...'
"크흠."
정성국의 헛기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평국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난 형님이 이곳에서 하늘이 되기를 바랐소. 그렇기에 양반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게 뻔한 아라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은 사실이고. 특히 후계를 생각해보면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 않소. 허나 이젠 상관없지.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보오. 괜히 양반 처자와 혼인하는 것보다야. 노비 출신의 여인과 혼인하는 것으로 조선과는 아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허어."
급진적인 정평국의 발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는 정성국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도 아니고...잠깐 못 본 사이에 왜 이리 확 바뀐 거 같지?'
정평국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을 보고 오히려 툴툴거렸다.
"그러니 더는 내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혼례를 올리시구려. 그게 뭐요. 사내대장부가."
정평국의 툴툴거림에 정성국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미소지었다.
"...네 뜻은 알겠다. 허나 당장 혼인을 치를 수는 없다."
"또 뭐가 걸리는 게요?"
"이놈아. 혼인을 올리고 일주일 만에 헤어지라는 게냐? 그럴 바엔 차라리 새로 정착한 곳에서 혼인을 올리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느냐."
그 대답에 정평국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아라의 입장에선 그게 더 잔인한 것 아니오? 기약도 없이 더 기다리란 뜻인데?"
정평국 역시 전아라가 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전아라는 정성국을 대신해 화약 생산을 총 책임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연구소를 떠날 수 없었고 지금이 아니라면 당분간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북미에 어느 정도 거점을 만든 후에야 연구 인력이 이동할 테니 말이다.
덕분에 요사이 정성국이 연구소에 들러 찾아올 때만 환하게 웃을 뿐, 그 외에는 연구소에 틀어박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게 옆에서 보기 안쓰럽다는 이야기도 했고 그래서 정평국이 총대를 멘 것이다.
어차피 그녀와의 혼인을 찬성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끙...그거야 뭐 떠나기 전에 장래를 약속하면 되겠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아라의 속을 잘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어떻게 그 아이를 달래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속 편한 정성국의 답변에 정평국은 이런 형을 스승으로 지극히 모시는 녀석들을 떠올리고 타박했다.
"거참...다른 제자 생각도 좀 하시구려. 가뜩이나 아라에게 휘둘리는 녀석들인데 그런 약속을 하면 아라가 가만히 있겠소? 엄청 쪼아대면서 난리 칠 게 뻔한데?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주명이와 기동이는 아라의 등쌀에 말라 비틀어질걸?"
"...“
정평국의 일침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 정성국이었다.
* * *
정성국은 캄캄한 밤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연구소를 경비하는 대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가 정성국을 보고 묵례를 취하곤 했다.
그때마다 정성국은 대충 인사를 받아주며 연구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외곽의 건물 입구에 서 있던 경비대원들이 정성국을 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끼익!
정성국은 익숙하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2층의 맨 끝으로 빠르기 이동해 한 문 앞에 서서 잠시 한숨을 쉰 후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혼자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니까! 누구야!"
"나다."
"어?"
쿠당탕!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기에 시선을 돌렸다.
정성국의 방문에 놀랐는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든 미색이 고운 여인이 정성국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이세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대방 어르신?"
"별일 없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네 생각이 나서 들렀다."
"아..."
정성국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전아라였고 그를 보면서 정성국도 괜히 어색해서 시선을 돌렸다.
전아라는 정성국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정성국을 스승님이라는 호칭보단 대방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제자였다.
그녀가 정성국을 스승님이 아닌 대방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를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짐작했기에 별말 하지 않았었고.
잠시 어색해하는 정성국을 빤히 쳐다보던 전아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오늘은 연구소에 오는 날이 아니지 않나요?"
전아라의 질문에 정성국은 슬쩍 둘러댔다.
"갑자기 이야기할 것이 있어 잠시 들렸다."
"아...그랬군요. 아! 들어오시겠어요?"
"그래도 되겠느냐?"
"물론이죠!"
그러면서 전아라는 곧장 문에서 비켜 정성국을 안으로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