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대략적인 이주민의 선발이 끝나고 이주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는 와중에 정성국은 오랜만에 연구소에 들러 김신철과 최주명을 만났다.
잠시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에게 정성국이 하나의 종이를 김신철에게 건네주었다.
김신철은 종이를 살펴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으음...이건..."
"가능하겠느냐?"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가늠해보던 김신철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한번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긴 물건을 주물로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강철 용골이라..."
김신철의 말에 최주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신철이 보고 있던 종이를 뺏어가는 와중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배의 크기를 키우려면 별수 없다. 이 방법이 어려우면 용골 두 개를 연결하고 보강재를 덧대어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만..."
"일단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헌데 이걸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크기를 보아하니 천급 함선에 들어갈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천급 함선의 설계를 변경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정성국은 고심이 깃든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할 듯싶다. 실제로 지급 함선을 운용해보니 인제 와서 지급 함선에서 그저 크기만 키운 천급 함선을 건조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서 말이다. 천급 함선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이 맞겠지."
애당초 그가 대충 넘겨주었던 천,지,인 급 함선은 갤리온을 모태로 한 크기만 다른 같은 모양의 배라고 봐도 무방했다.
헌데 실제 배를 타고 이동해보니 갤리온은 화물은 운송하는 것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을 태우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속도가 느린 만큼 더 많은 식량과 식수를 실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승선할 사람의 수는 더 줄어들었다.
정성국은 이주 계획을 짜면서 조금 더 빠른 배의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이곳을 떠난다 해도 큰일이 발생하면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는데 정성국은 웬만하면 지급 함선을 타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해서 빠른 연락선을 만들어 볼까 하다가 아예 생각을 바꿨다.
천급 함선의 설계를 변경하기로.
거기에 처음엔 북미의 풍부한 목재 자원으로 그곳에서 천급 함선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이주민의 숫자를 생각해보니 생각보다 늦어질 것 같아 마음을 바꿔먹었다.
일단 이곳에서 새로운 배를 건조해보기로.
그래서 이들을 불러 운을 띄웠다.
예정대로였다면 정성국이 북미에서 어느 정도 관여하겠지만 계획이 바뀐 이상 이곳에 남아 배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이들이 될 테니 말이다.
정성국의 말에 최주명이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역시 이주민 때문인가요?"
"그래. 당장은 지급 함선뿐이니 별수 없다만...지급 함선의 수송량과 속도를 생각해보면 너무 느려. 더 빠르고 더 커다란 함선이 필요하긴 하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머릿속으로 갤리온의 발전사를 떠올렸다.
갤리온은 시간이 흐르고 전투에 적합한 전열함, 속도에 치중한 클리퍼, 속도와 적재까지 다 잡은 윈드재머로 발전한다.
당장 정성국에게 필요한 것은 윈드재머이긴 했지만 윈드재머는 동력이 범선일 뿐 선체는 철선인지라 당장 만들 기술도 노하우도 없는 만큼 일단은 클리퍼와 비슷한 모양의 배부터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최소한 장폭비를 조절하고 선수 부분의 모양을 V자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속도를 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용골이 필요한 거군요. 허면 기존의 선박과는 모습이 좀 다르겠군요?"
최주명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존의 배보다 길고 날렵한 모습이 되겠지."
"헌데 기동이는 부르지 않으신 것을 보면...범선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정성국의 입장에서는 범선 보다는 기선이 더 매력적이었다.
범선과 기선이 함께 바다를 누볐던 시대에도 범선이 기선보다 더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기선에게 밀려 퇴출당한 것은 결국 화물 운송의 신뢰성 문제였다.
기선은 속도가 일정했기에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범선은 그것이 불가능했으니까.
그런 만큼 최대한 사람을 운송하기 위해선 기선이 좋기는 했다.
그래야 적재량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고.
문제라면 연료였다.
정성국의 예상보다 증기기관의 성능은 만족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배에 증기기관을 장착하자니 연료 보급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항로 곳곳에 항구와 연료저장고를 건설하고 이를 채우기 전에는 사용이 어려웠다.
'아이누 섬에서 역청탄을 발견하고 캘리포니아에서도 탄광을 발견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뭐 당장은 어려우니 일단 범선으로 가야겠지. 아쉽군.'
"우선은 그렇다만...훗날 증기기관을 장착하는 개조 방안도 염두해 두거라."
"알겠습니다."
최주명의 대답에 정성국은 준비해두었던 책들을 최주명과 김신철에게 건넸다.
"이 책은?"
"앞으로 선박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지에 대해 쓴 책이다. 참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정성국이 건네준 책을 소중히 여기는 제자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어 미안하다만...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새로운 배의 개발을 끝내도록 해라."
"으음...기한은 얼마나?"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는 개발이 끝나야 해. 그래야 그때부터 꾸준히 건조해서 훗날을 대비할 수 있단다."
그 말에 김신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주명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알겠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잘 해내리라 믿는다."
* * *
정성국은 선착장에 나와 곧 아이누 섬으로 출항하는 기범선의 선장인 박헌수를 보고 당부했다.
"조심히 운항하도록 하게."
"걱정 마시지요. 대방 어르신."
자신만만한 박헌수의 답변에 정성국은 웃으면서 혹시나 모를 위험을 상기시켰다.
"그래. 그리고 예정대로 자네는 그곳에 남아 주변을 탐사하도록 하게. 혹시 아직 유빙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곳곳에 견시수를 두고.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그래. 고생하게나."
정성국은 박헌수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 주고 물러났다.
박헌수는 정성국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발걸음을 옮겨 기범선에 승선했다.
정성국은 잠시 기범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단 괜찮단 말이지. 의외로 내구성도 괜찮고. 계속해서 기동이 녀석을 쪼아서라도 증기기관을 발전시킨다면...경신 대기근 전에 쓸만한 증기 수송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문제라면 역시 연료 보급인데...이건 결국 이번 아이누 섬의 개발과 캘리포니아 개발에 달린 문제니...흠.'
그때 선착장을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정성국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정성국을 따라 배에 올라탔던 아이누 인들이었다.
이번 항해는 아이누섬에 항구와 더불어 교류할 거점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아이누인 들과의 의사소통이 절실했고 덕분에 개척촌을 구경하며 견문을 넓히던 아이누인 들의 귀환이 결정되었다.
정성국은 아이누 인들의 맨 앞에 있던 투로시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오. 왔는가. 오랜만이구나. 투로시노.“
투로시노를 비롯한 아이누인들은 거의 10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가게 되는 셈이라 그런지 다들 들떠있었다.
"응. 대방 어르신."
"야! 이럴 땐 네 라고 해야지!"
투로시노의 대답에 옆에 있던 조장이 투로시노의 팔을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성국은 그 모습을 보면서 괜찮다며 웃었다.
"하하하. 괜찮다. 1년도 안 되었는데 말이 통하는 것만도 어디냐. 그래.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가는구나. 고생했다."
"아니다. 덕분에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었다. 고맙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이곳에서 배운 것을 잊지 말고 네 고향을 발전시키길 바라마."
그러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알았다. 그런데 대방 어르신. 부탁이 있다."
"음? 무슨 부탁?"
"이곳에 있는 학교를 우리 고향에도 세워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말을 가르쳐 줄 선생도 말이다."
투로시노의 요청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당장은 사람이 부족한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으음...당장은 어렵다. 사람이 부족하니까."
"그런가...“
정성국의 대답에 시무룩해지는 투로시노 였고 뒤편에 있던 아이누인들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이를 보고 정성국은 진땀을 흘리며 곧바로 말을 더했다.
"일단 항구 근처에 건물을 지어줄 테니 그곳에서 너희들이 직접 가르쳐라. 그리고 우리의 언어도. 훗날 책과 선생을 보내주마."
정성국의 확답에 투로시노는 얼굴이 밝아졌다.
"아. 고맙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한 얼굴로 투로시노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아.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절대로 일정 수 이상의 해달을 잡지 마라. 말했던 대로 우리는 각 섬마다 매년 정해진 수의 모피만 사들일 거다. 알았지?"
정성국은 아이누 들과 교역할 마음을 먹으면서도 이들이 함부로 해달을 사냥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분명 그가 직접 파악하기로는 생각외로 해달의 수가 많긴 했지만, 돈에 눈이 먼 원주민들이 함부로 사냥해 멸종시킬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전생에서는 원주민들보다는 러시아인들의 탐욕 때문에 거의 멸종위기에 빠졌던 해달이었지만 북미의 비버 같은 경우는 서양인들과 교류하면서 돈맛을 알게 된 원주민들이 술과 화약을 얻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사냥해 멸종위기에 빠졌었으니.
정성국이 해달을 보호하려는 것은 해달 모피의 물량을 조절해 지속해서 판매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생태계 파괴를 막아 어족 자원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해달은 자연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달은 성게를 잡아먹어 성게 수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달을 함부로 사냥해 개체 수가 줄게 되면 해달의 주식인 성게가 미친 듯이 늘어나게 되고 덕분에 성게가 먹어 치우는 대형 해조류가 줄어들어 바다가 사막화된다.
그렇게 대형 해조류가 모두 사라지니 물고기들이 알을 낳을 장소가 없어져 어족 자원이 급감하게 되고.
특히 해달이 분포하는 지역은 대부분 북쪽의 섬이기에 어족 자원이 감소하면 원주민들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생태계에 관해 설명해봐야 원주민들이 이해할 리 없었으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락코 말이지? 알았다. 매년 정해진 수만 잡겠다. 그리고 락코 모피는 오직 당신들에게만 팔겠다. 우타리(아이누 인들이 동족을 부르는 호칭)들에게 확실히 말하겠다."
투로시노의 진지한 대답에 미소지은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했다.
"그래. 고맙다. 나중에 보자."
"그래.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투로시노와 아이누 들은 정성국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기범선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곧 기범선이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정성국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시작인가? 당장은 아이누 섬이지만...천천히 영향력을 늘려나가야겠지. 그러면서 적당한 곳에 연료저장고를 건설해 나가다 보면 증기선을 운용할 수 있을 거야. 이제 이쪽은 평국이 녀석에게 맡겨야지. 알아서 잘 하겠지. 뭐.’
동생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무책임한 형, 정성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