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지급 함선을 타고 항해에 나섰던 선원들이 오랜만에 집에서 새해를 보내는 동안 정성국은 행정청에 틀어박혀 이주 계획을 짜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김봉길의 도움으로 최적의 항로를 결정하고 윤휴의 도움으로 이주민을 선발했다.
아무래도 첫 이주민을 선정하다 보니 기술자들의 비중이 약간 높았다.
그렇다고 기술자들로 모조리 채운 것은 아니고 절반 정도는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농민을 가족 단위로 이주시켜 적당히 배치해 알아서 땅을 개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소리가 있었지만, 정성국은 바로 기각시켰다.
분명 그렇게 하는 방안은 정성국이나 행정 관료 입장에선 편하겠지만 농민들의 땅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보면 과도하게 욕심낼 여지도 있고 그 때문에 원주민과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괜히 개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했다가 지주 - 소작농 계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특히 잘못하다가는 조선인 대지주와 원주민 소작농으로 굳어질 우려도 있었기에.
그래서 정성국은 내심 북미의 모든 땅을 원칙적으로는 국가의 땅으로 설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기술자가 아니라면, 농사지을 땅을 원한다면 일괄적으로 개척단이라는 단체에 소속하게 하고 그곳에서 일정 기간 일하다가 개척단에 의해 관개된 땅을 임대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는 일정 기간 경작권만을 넘기는 형태가 적당해 보였다.
즉, 국가가 지주가 되는 형태였다.
정성국은 이 방법이 그나마 원주민과의 마찰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이 이방인들에게 허락하는 것이 토지 소유가 아닌 그곳에서 살 권리인 만큼 말이다.
또한, 조선 사람 역시 큰 반발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조선인들은 왕토 사상이 기본 개념으로 깔려 있는 만큼.
즉, 조선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북미 땅은 공전과 국유지만이 존재하는 땅인 셈이다.
이렇게 마음먹고 김봉길이나 북미 땅을 직접 본 선원들 몇을 불러 이야기하고 그런데도 이주할 마음이 드는가 하고 묻자, 그들은 살짝 아쉬워하면서도 경작권이 확실히 보장된다면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직접 확인한 땅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으니 말이다.
해서 정성국은 내심 안도하면서 계획을 짜나가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시점에 오랜만에 정성국이 행정청을 나왔다.
"형님!"
한참을 개척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정평국이 개척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마중 나왔던 정성국은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동생의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오랜만이구나. 평국아. 헌데 몰골이 왜 그러느냐. 쯧쯧."
형님을 보고 반가워하던 정평국은 무심한 정성국의 말에 울컥하여 예전 말투로 형에게 볼멘소리했다.
"뭐요? 내가 뭐 때문에 이런 몰골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형님!"
"하하하.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열심히 인재를 키우라고."
"그게 말처럼 쉽소?"
"쯧쯧. 어려워도 어쩌겠느냐. 안 그러면 네가 과로사 할 거다. 당장 힘들어도 사람을 키우렴."
그렇게 말한 정성국은 동생에게 다가가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곳에 계속 머무를 것도 아니지 않으냐."
"허면?"
"이곳을 맡길만한 믿을만한 녀석을 찾아보거라."
"으음..."
형 정성국의 말에 자신 휘하 인물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고민하던 정평국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형에게 항해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아. 그거야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고. 참. 형님. 항해에 대해 이야기 좀 해보시오."
"하하하. 그래. 그러자꾸나."
정성국은 웃으면서 정평국을 데리고 개척촌에 마련된 집무실로 들어가 차를 건네주며 이번 항해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정평국은 눈빛을 빛내면서 열심히 경청하다 형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감탄사를 토했다.
"허어. 정말 넓긴 넓은가 보오. 그리 오랫동안 배를 타야 한다니."
"그렇기야 하지."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지급 함선으로는 넉넉잡아 5개월은 항해만 해야겠구려? 허. 선원들의 고생이 정말 심하겠소."
그 말에 정성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게다. 아무리 뱃사람이라지만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항해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거기에 항로의 안전까지 생각해보면 1년에 한 번 배를 띄우는 게 최선일 게다."
그런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앓는 소리를 냈다.
"끙...형님이 말한 대로 아이누 섬에 보급 항을 세운다 쳐도...아이누 섬에서 북미의 새로운 개척촌까지 거리가 너무 멀지 않소. 중간에 보급 항이 하나쯤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소. 가뜩이나 이주민을 태우면 식량, 식수 소모량이 클 터인데."
"흐음...그건 그렇지. 다만 당분간은 별수 없으니 이곳을 이용할 생각이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북태평양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꺼내 펼쳐서 알류샨 열도의 어널래스카 섬(Unalaska)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널래스카 섬은 알래스카반도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섬으로 아이누 섬에서 캘리포니아로 이동하는 항로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이었다.
물론 거리를 생각하면 좀 돌아가는 형태가 되겠지만 알류샨 열도의 섬 중에서 큰 편이고 식량과 식수를 구하기 수월했기에 그렇게 정했다.
"흠. 이번 항해에서 이곳에 정박해 본 적 있소?"
"그럼. 이곳에서 식량과 식수를 보충했었다. 뭐 항구를 만들고 이를 관리할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은 어려울 것 같고...다음 항해 때는 이곳에 들러 임시로 선착장을 만들고 잠시 상륙해 쉬면서 식수와 식량을 보급하는 곳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로 새로운 개척촌까지 항해한단 소리겠구려."
"그렇지."
잠시 머릿속에서 항로와 배의 적재량을 계산해보던 정평국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음...허면 지급 함선에 한 500명쯤 태울 수 있으려나?"
"아마 그쯤 될 게다."
정성국이 동의하자 정평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한숨만 나오는구려. 이래서 얼마나 이주시킬 수 있겠소. 거기에 각종 동물도 필요하다 하지 않으셨소? 아니 이리 넓은 땅에 마소가 없다는 게 참..."
그러면서 한탄하는 정평국이었다.
정평국으로서는 저 드넓은 땅에 마소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덕분에 실어나를 이주민의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서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 정평국을 보면서 피식 웃는 정성국이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아니겠느냐. 계속해서 배를 건조하고 있으니 점점 늘어나겠지...거기에 새로운 배도 만들고 있으니."
"아. 그 기선이라는 것 말이요?"
"그래. 아직은 기범선이지만...아. 그러고 보니 네가 청에서 역청탄을 구해왔다지? 정말 고생했다."
정성국의 칭찬에 히죽거리면서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정평국이었다.
"어휴. 말도 마시오. 청나라 곳곳의 석탄을 종류별로 구하려고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다행히 그중에 신철이가 원하는 석탄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속이 심하게 쓰렸을게요."
"하하하. 덕분에 질 좋은 강철을 양산할 수 있었고 덕분에 증기기관의 개량이 가능해지지 않았느냐."
그러나 정평국은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도 기대를 많이 했었지만, 전에 이곳에서 조운선을 개조한 실험선을 확인한 후론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야 하오만...문제는 기선이 정말 효용이 있겠소? 아무리 봐도 기관이 차지하는 자리에 연료까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수송량이 줄어들어 애매해 보이더만."
"증기기관의 효율이 향상한다면 대신 더 빨라질 게다. 그러면 수송량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1년에 2번 배를 띄울 수 있어 만회할 수 있다 이거구려?"
"그래."
단호한 형의 대답에 정평국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허면 그 기선이라는 배를 만드는데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일단 시험 삼아 만든 기범선을 운용해 여러 문제점을 찾아봐야 할 테니 당분간은 이대로 가야겠지. 아. 밀무역하는데 배는 더 필요 없느냐?"
그러자 정평국은 밀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물을 떠올리고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충분하오. 그 희한하게 생긴 골도자기가 그리 비쌀 줄은 몰랐소. 남만인들이 그것을 보고 감탄을 토하면서 무척 비싸게 사들이더이다."
"아무래도 그럴 게다. 저들의 생활양식과 기호에 맞추어 생산한 물건이니 말이다. 거기에 파손될 일 없으니 운송도 쉽고."
"아아. 덕분에 고작 인급 함선 한 척으로도 정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소. 거기에 계속해서 저들과 정기적으로 교역하기로 약조하였으니 당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오. 그리고 저들의 재력이 무한한것도 아니라 굳이 물량을 늘릴 필요도 없어 보이고."
예상했던 대답에 만족한 정성국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해적을 만나지는 않았느냐?"
"해적? 나도 전에 형님의 말씀을 듣고 살짝 긴장하기는 했는데 딱히 해적을 만난 적은 없소. 아. 형님은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해적을 만났다고 했소?"
"그랬지. 너도 조심하거라. 결국, 거래를 지속하면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해적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테고."
형의 말에 걱정스러운 어조로 실전을 경험했던 그에게 묻는 정평국이었다.
"흐음...형님 말씀을 들어보니 형님이 개발한 그 대장군전이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셨소?"
"물론 해적선을 상대하는데 대장군전이면 충분하긴 하다만 문제는 먼바다에서는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그렇긴 하겠지. 허면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가까이 다가가 한 방을 노려야겠구려?"
"일단 후장식 화포에 대한 개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일단 밀무역을 전담하는 배의 무장부터 교체하자꾸나."
예상치 못한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의외라 눈이 커졌다.
"허. 그게 드디어 완성되었소?"
"그게 다 네가 역청탄을 구해온 덕분이다."
"허허허. 허면 해적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려."
"그렇기야 하다만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선장에게 당부해두거라. 최대한 먼바다에서 상대하고 생존자를 없애라고."
"으음...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냉정하게 말하는 정성국을 보고 정평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선장을 교육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정성국이 이번 항해를 통해 얻었던 가죽들을 떠올리고 그 처분을 맡겼다.
"그리고 이번에 항해하면서 가지고 온 가죽들도 네가 처리하거라."
"아. 그 항해하면서 원주민들과 교역했다던 모피 말이요? 북경에 팔아야 하나?"
모피를 어디에 팔아야 할지 고민하는 정평국을 보고 정성국이 대답했다.
"그래도 되고 남만인들에게 팔아도 될 게다."
"남만인들? 그들이 모피를 산다는 거요?"
물론 세계지도를 본 정평국이 남만인들이 실제로 더운 남쪽에서 사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까지 와서 모피를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동생의 표정을 보고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피는 부드러운 금이라고 불릴 만큼 비싼 물건이었고 그렇기에 유럽인 들이 이 부드러운 금을 얻기 위해 북미로 시베리아로 향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이다. 저들에게도 모피를 꽤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게다."
"흐음...뭐 적당히 나눠서 팔아보고 더 비싸게 쳐주는 곳에 팔면 되겠지."
확신에 찬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이내 수긍했다.
"그래. 그러면 될 게다. 그리고 슬슬 네가 원상의 대방 자리를 맡거라."
"음?"
"왜 그리 놀라느냐. 너도 짐작했을 것 아니냐."
"그건 그렇소만..."
"그리고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면 천천히 원상의 기반을 북미로 옮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원상은 새로운 개척촌에 새워질 상단의 조선 지부 정도가 되겠지."
"으음..."
"그러니 그것을 고려해서 이곳에 남아 원상을 맡을 인물을 키우도록 하거라. 내가 북미로 떠난다면 당장 아이누 섬과의 교역과 항구 개발까지 네가 맡아야 하는 만큼 할 일이 정말 많아질 게다."
수많은 일 폭탄을 떠넘기고 북미로 도주하겠다는 형의 선언에 부아가 치민 정평국이 다시 볼멘소리로 구시렁거렸다.
"허어. 일은 다 떠넘기고 훌쩍 떠나면 그만이오?"
"그러니 너도 일을 떠맡을 사람을 키우란 소리다. 이 녀석아."
정성국의 타박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는 정평국이었다.
"에휴...그럼 언제 떠나실 생각이시오?"
"지금 건조 중인 지급 함선이 완성되면 떠날 생각이다. 대충 시기도 맞고."
그거 돌아왔을 때 건조가 거의 마무리 되었던 2번 함과 건조가 완료되자마자 다시 건조에 착수한 3번 함을 떠올린 정성국이 대답했다.
"허면 총 3척의 지급 함선으로 떠나는 셈이구려."
"그렇게 되겠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을 물끄러미 바라본 정평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조선에 안 올 생각이시오?"
"글쎄다...그건 잘 모르겠구나."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다시는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최소한 범선을 타고 돌아오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연락선 같은 빠른 기선을 만들어야 할까?'
그런 형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여는 정평국이었다.
"...허면 내가 장가를 가기 위해서라도 후임자를 구해놓고 북미로 향해야겠구려?"
"하하하. 그래. 혼자 늙어 죽기 싫으면 빨리 믿음직한 후임자를 구하거라. 아니면 석 달 안에 짝을 데려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