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박기동이 선착장에 모여든 인파를 가로질러 정성국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기동아."
"이렇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스승님."
박기동의 정성국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주변을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목적은 이루셨습니까?"
"그렇단다."
"오오. 정말 그렇게 넓던가요?"
기대감이 섞인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는 박기동을 보면서 정성국은 주변에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먼발치서나마 보려고 나온 인파를 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말하기는 어렵구나. 일단 이동하자꾸나."
"예. 스승님."
박기동도 사람이 많은 선착장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별말 없이 먼저 나서서 길을 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파를 헤치고 행정청으로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경비대원들이 다가와 정성국과 박기동 주변에서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덕분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온 정성국은 저 멀리 보이는 기범선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옆에 있던 박기동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헌데 네가 여기 나와 있는 건 저 배 때문이더냐?"
그러자 박기동은 자부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스승님. 주명이 녀석과 합작해 만든 배입니다."
"그래?"
"예. 스승님이 주고 가신 여러 서적을 보고 어떻게 증기기관을 개량해야 할지 방향은 잡았는데 실제로 증기기관을 개량하려니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예. 증기기관의 마력을 올릴수록 증기압이 강해지는데 이를 버티지 못해 사고도 있었구요."
사고가 났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놀라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저런! 다친 이는 없느냐?"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시제품들은 위험해서 최대한 안전하게 멀리 떨어져서 구동했기에..."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성국이었다.
지금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척촌의 중요한 재원들이었기에 그들의 안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기술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고로 그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생각만해도 끔찍한 정성국이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런 스승의 반응에 빙긋 웃은 박기동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아무튼, 그 사고 이후로 증기기관을 비롯해 증기가 이동하는 파이프 등을 두텁게 해서 새로운 증기기관을 만들려는데 신철이가 찾아왔었습니다."
"신철이가? 설마?"
"예. 그토록 골머리를 썩이던 강철의 질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질 좋은 강철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화색이 도는 정성국이었다.
동시에 고작 반년 만에 대단한 성과를 거둔 이들을 향해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 고작 반년 외유했을 뿐인데 그사이 발전이 놀랍구나."
"다 스승님 덕분이지요. 신철이가 그러더군요. 평국이가 구해다 준 석탄 덕분에 코크스를 만드는 게 가능했고 덕분에 질 좋은 강철을 양산할 수 있었다고. 스승님이 떠나시기 전에 평국이에게 일러두었다면서요?"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밀무역하러 배를 띄울 예정이었기에 정성국은 떠나기 전에 정평국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두었었다.
여러 작물 종자, 특히 감자와 고구마 등 여러 구황 작물을 구할 것과 더불어 중국에서 사용하는 석탄을 구해 김신철에게 전해주라는 말을 했었다.
이에 정평국이 천금을 써서라도 구해오겠다고 의욕을 내보이더니 어떻게 잘 구했나 보다 싶었다.
"그러긴 했다만...용케도 역청탄을 구했나 보구나."
"청나라 곳곳에서 구한 석탄을 모조리 가져다주었고 신철이는 그걸 다 코크스로 만들어봤다고 합니다. 그중에 성공한 게 몇 개 있었고 그중에서 산둥성에서 켄 석탄이 제일 싸게 구할 수 있어서 평국이에게 꾸준히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단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래? 산둥성이라...그나마 다행이구나."
"예. 밀무역만 아니라면 더 싸게 구해올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한소리 하더군요."
"뭐 그거야 감수해야겠지."
대답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박기동은 왜 스승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짐작했기에 모르는 척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튼, 덕분에 증기기관 개량도 꽤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해서 이번에 새롭게 개량한 증기기관을 탑재할 새로운 배가 필요해 주명이에게 졸라댔고 덕분에 나온 녀석이 바로 저 녀석입니다. 실험선에 비하면 참 멋지더군요."
"실험선?"
"아. 스승님이 떠나시고 나서 바로 주명이를 졸라 만든 증기기관을 장착한 배가 한 척 있긴 합니다. 저희끼리는 그걸 실험선이라고 부르고요. 다만 주명이 녀석이 일손이 부족하다면서 조운선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모양이 영..."
그러면서 박기동은 선박 개발자인 최주명이 새로운 배를 설계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면서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정성국에게 하소연했다.
최주명이 지급 함선을 건조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 정성국은 그런 박기동의 반응을 웃어넘겼다.
"하하. 그래? 헌데 그 실험선하고 저 배에 장착된 증기기관의 마력은 얼마지?"
"실험선의 경우는 증기기관 개량과는 별개로 증기선의 기술 축적과 스크루 추진 방식을 실증하려고 만든 배이다 보니 50마력이었고요. 저 녀석은 무려 150마력입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높은 출력에 놀란 정성국은 발걸음을 멈추고 박기동에게 다시 물었다.
"허. 그래? 저 배의 속력은?"
"기관만을 사용했을 때는 6노트가량 나오더군요. 돛을 사용해서 바람을 잘 타면 10노트까지도 나오고요."
박기동의 대답을 듣고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대로 된 증기선이 1800년대에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유럽과 150년의 격차가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지. 지금 저 배의 스펙을 보면 간린마루 이상은 되어 보이니 200년 가량의 격차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짓던 정성국은 이내 유럽의 잠재력을 떠올리고 곧바로 미소를 지웠다.
'최초의 공업용 증기기관이 등장해 널리 알려지는 시기가 지금이지 아마? 물론 제대로 된 상업용 증기기관은 100년은 지나야 나타날 테지만 그건 증기기관의 효용성에 의문을 갖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 토마스 뉴커먼이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한 것을 보고 효용성이 있다고 판단되자 순식간에 기술이 발전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우리가 나중에 유럽과 교류하게 된다면 저들의 기술 발달 역시 가속화될 테지. 그것을 생각하면 유럽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해야 할까?'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가 1800년을 기점으로 만료되면서 수많은 발명가가 달라붙어 증기기관이 급격히 발전하는 것을 알고 있던 정성국은 잘못하다 저들의 기술발전이 빨라질까 두려운 마음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들과는 다르게 정성국은 제대로 된 기술발전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그것이 크나큰 이점이기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인력이 적다는 건 약점이었다.
증기기관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잘못하다간 저들의 기술발전이 빨라져서 훗날 열강의 출현이 더 빨라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저들의 발전이 무섭다고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캘리포니아에 쳐박혀 유럽과의 교류를 차단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야 없는 법이지. 어차피 북미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뭐 증기기관이 가진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소총보다 더 부담스럽긴 하지만...그렇다고 저들이 우리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나갈 것이 두려워 캘리포니아에 처박혀 평생을 살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들이 기술적으로 따라붙기 전에 제대로 자리 잡고 발전해나가면 될 거야. 거기에 북미만 제대로 장악한다면...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정성국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실컷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정말 바쁘겠네. 날이 풀리기 전에 미리 이주민을 선정해두고 바로 북미로 보내야겠다. 이제부턴 죽어라 달려야겠네. 젠장.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그렇게 고민을 끝낸 정성국은 문득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박기동의 얼굴을 보고 아차 하며 애써 안색을 펴고 그의 성과를 칭찬하며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허허. 정말 고생했다. 기동아."
박기동은 배의 속력을 묻고 안색이 심각해졌던 스승의 반응이 의아했으나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크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하하하. 아닙니다. 스승님. 오히려 신철이의 공이 더 크죠. 아. 덕분에 평화가 개발 중이던 후장식 대포 개발도 꽤 수월하게 진행 중이라고 하니까요."
김신철이 새로운 강철 양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짐작했던 일이라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허. 그래? 그거 참으로 다행이구나. 천자총통만으로는 아무래도 좀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다음번 항해에는 무기를 교체하는 게 가능하려나?"
"음? 설마 실전을 겪으신 겁니까? 태평양에서요?"
의아하다는 듯 묻는 박기동을 향해 정성국은 목소리를 죽이면서 말했다.
"유구국으로 올라오는 길에 해적선과 조우해 교전을 했단다."
정성국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박기동이 스승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피면서 빠르게 그의 안부를 확인했다.
"어? 어디 다치신 덴 없으신 거죠?"
그런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별다른 피해 없이 해적선을 격침하긴 했다. 다만 운이 좋았어. 먼바다에선 생각보다 멀리 있는 선박을 맞추기가 쉽지 않더구나."
"그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결국, 포문수를 늘리거나 후장식 화포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고민했던 일이 상당수 풀렸구나."
"다행이네요. 헌데 정말 해적이 있던가요?"
"그럼. 특히 저 남쪽 바다엔 해적이 정말 많단다. 어라? 그러고 보니 평국이는 별말 없더냐?"
정평국이 보낸 인급 함선의 경우 동남아 해역까지 내려가진 않았겠지만, 마카오 근처에도 해적이 꽤 많다고 알고 있었기에 의아한 목소리로 혹 들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예. 해적과 조우했단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그래? 운이 좋았나 보구나."
그렇게 정성국은 박기동과 그동안 개척촌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행정청으로 걸어갔다.
* * *
행정청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윤휴가 정성국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반겨줬다.
그에 반해 정성국은 반가워하면서도 내심 긴장해 살짝 굳은 얼굴로 윤휴에게 인사했다.
"오셨는가."
"오랜만입니다. 백호 어르신.“
인사 후 그동안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곧 윤휴가 북미에 대해 입을 열자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래. 그곳에 다녀오니 어떻던가. 자네의 생각만큼 비옥한 땅이던가?"
"예. 정말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정성국을 보고 윤휴는 빙긋 웃었다.
"그런가? 그런 얼굴로 그렇게 이야기하니 어떤 곳일지 궁금하기는 하구만.“
윤휴의 대답에 정성국은 정중한 얼굴로 권유했다.
"이 기회에 백호 어르신도 한번 그곳을 가보는 것이 어떠십니까?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경험해보는 것은 분명 다르지요."
이제 슬슬 답변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정성국을 보며 그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던 윤휴는 곧 웃었다.
"허허...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내 역할은 아닌 듯싶네."
윤휴의 대답에 순간 속내가 복잡해진 정성국이 되물었다.
"...허면?"
"내 자네의 성향을 모르지 않아. 자네가 유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잘 알고. 헌데 자네가 탐탁지 않음에도 유학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이유는 아마 행정 인력 때문이겠지. 맞는가?"
"..."
정성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휴라면 모를까, 다른 유학자들은 정성국은 계륵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정성국을 보며 빙긋 웃은 윤휴가 입을 열었다.
"근묵자흑이라 했네. 자네가 꿈꾸는 나라를 만드는데 고지식한 유학자들은 오히려 방해가 될걸세."
"...허면?"
"자네가 떠난 이후로 자네가 만든 기초 학교에서 나이가 적당한 똘똘한 아이들을 추려 행정청에 배속시켜 두었네. 다음에 이주할 때는 이들을 데리고 가서 행정을 맡기면 될걸세.“
"...백호 어르신."
"자네가 이곳을 떠난다 한들 이곳 개척촌을 아예 버릴 생각은 아니리라 믿네."
"물론입니다."
"허니 내가 남아서 이곳을 건사하도록 하겠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자네 동생도 이주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내가 조선에 남는게 맞다고 보네. 그리고 자네가 내 장남과 잘 어울리는 것을 아네만...의제는 가문을 잇고 선산을 지켜야 하는 만큼 의제도 이곳에 남을걸세. 대신 둘째 녀석부터는 본인이 원한다면 기꺼이 자네에게 보내도록 하겠네."
유학자로서 조선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지만, 이곳에 남아 자신을 뒤에서 돕겠다는 윤윤휴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백호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