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찬바람이 매섭게 불며 갑판 위를 맴돌았지만, 선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엔 부족했다.
대부분의 선원뿐만 아니라 경비대원들도, 저 구석의 아이누 인들도 다들 갑판에 나와 오랜만에 보는 조선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견시수가 망원경을 눈에서 떼면서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개척촌이 보입니다아!"
견시수의 외침에 갑판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반색했다.
"정말?"
"오! 드디어!"
"그럼요!"
견시수의 확언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우와!"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한 반년은 됐지?"
"아아. 그쯤은 됐지. 여름에 출발했는데 겨울에 온 셈인가?"
"그러네. 어? 잠깐만. 그러면 새해가 지났던가?"
그러자 한 선원이 대충 계산해보다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안 지난 거 같은데?"
"딱 좋네! 당분간은 푹 쉬게 해준다고 했으니 집에서 새해를 보내면 되겠구만!"
"그러게! 대방 어르신도 후하게 포상을 약속했으니 말이여."
"암암."
그런 선원들을 보면서 정성국과 김봉길은 선미루에 올라 망원경으로 저 멀리서 보이는 개척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고생했네. 선장."
"아닙니다. 대방 어르신."
"그래도 이렇게 오랜 항해를 별다른 문제 없이 이끈 자네의 공이 커. 포상 기대하게나."
"하하하. 감사합니다. 대방 어르신."
그렇게 정성국이 김봉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망원경을 움직여 오랜만의 개척촌을 살펴볼 때 문득 건선거에서 건조되고 있는 배 한 척이 정성국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 저건...?"
김봉길은 정성국이 바라보는 곳을 보고 반가움에 탄성을 질렀다.
"오. 새로운 지급 함선이군요. 거의 건조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이 추운 날씨에도 배를 만드느라 고생이 심하겠어."
"일한 만큼 받아가는 곳이 바로 개척촌 아닙니까. 그러니 추운 게 대수겠습니까. 거기에 두툼한 겨울옷도 마련해 주는데."
무슨 고생이냐는 듯 이야기하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두툼한 겨울옷을 마련해준다 한들 찬바람을 맞아가며 바깥에서 일하는 게 어디 쉽겠는가.
다만 훗날을 생각하면 더 많은 배를 건조해야 했기에 저들의 사정을 봐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그때 김봉길이 새로운 지급 함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성국에게 물었다.
"대방 어르신. 다음 항해는 언제입니까?"
"글쎄...아무래도 날이 풀려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정성국의 대답에 김봉길은 살짝 조바심이 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십니까? 그래도 그곳에서 밭을 일구려면 봄이 되기 전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뱃사람이라 한들 땅에 대한 집착은 조선 사람의 특징인가? 아니군. 한국인도 땅 사랑이 참 남달랐지.'
땅을 너무 사랑해서 열심히 땅 투기를 했던 전생의 국회의원들이 생각나 피식 웃은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이동한 항로로 말인가?"
"예."
냉큼 대답하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실소를 흘렸다.
'이번 항해에 큰 어려움이 없어서 그런가...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돈데? 그 오호츠크해와 그 베링해를 봄이 되기 전에 가겠다니...나중에 알류샨 열도에 항구를 만들면 지휘관으로 보내버려...?'
그렇게 잠시 김봉길의 다음 보직을 생각해보던 정성국은 인력 낭비가 될 것 같아 계획을 취소하고 현실을 알려주었다.
"허허허. 그 항로가 그리 만만한 항로가 아닐세. 이번 항해도 시기를 잘 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꽤 고생했을 거야."
"그렇습니까?"
대답은 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은 혀를 차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이누 섬을 기준으로 위쪽은 겨울에 항해하기엔 위험하네."
"춥기 때문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바다도 군데군데 얼거든."
"바다가...말입니까?"
"그렇다네. 아이누 섬도 말이 섬이지 겨울엔 바다가 얼어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고."
정성국의 설명에 김봉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탄식을 했다.
"허어. 얼마나 춥길래..."
"춥기도 하고 그곳 바다와 연결된 강에서 흘러나오는 수량 때문에 염도가 낮아져 그렇기도 하네. 아무튼, 겨울에는 바다가 얼어서 항해하기 어렵고...그럼 봄에는 어떻겠나."
잠시 생각해보던 김봉길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답했다.
"설마...그 얼음이 녹으면서 떠내려오는 겁니까?"
"정확하네. 그래서 봄에도 바로 출발하기 어려운 감이 있지.“
그러자 김봉길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해보다가 안색을 흐리며 입을 열었다.
"으음...대방 어르신. 그러면 배를 띄우는 건 기껏해야 1년에 한 번이 한계인 겁니까?"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위험을 감수한다면 1년에 두 차례의 출항도 가능할 것 같긴 했다.
다만 배 한 척이 소중한 시기였고 사고가 나면 수많은 이주민이 위험할 테니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당분간은 1년에 한 차례의 출항만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범선으론 그렇다네."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봉길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면 이주하기도 쉽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그렇다네. 그래서 배를 더 많이 건조하려는 거고. 아니면 새로운 배를 만들어야겠지."
새로운 배라는 말에 김봉길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새로운 배라고 해봐야 당분간 건조가 보류된 천급 함선뿐이니 말이다.
"새로운 배 말입니까? 천급 함선도 결국 크기만 클 뿐이지 범선이지 않습니까."
"기선이라는 게 있다네. 범선이 돛을 이용해 바람의 힘을 이용한다면 기선은 증기의 힘을 이용해 나아가지."
새로운 개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김봉길은 곧 기대감에 찬 얼굴로 정성국에게 물었다.
"그렇습니까? 증기라...그러면 그 기선은 훨씬 빠른 겁니까?"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 계속 발전되면 모를까 초기에는 범선과 엇비슷하거나 느릴 수도 있네."
"예? 허면 왜 기선을...?"
"대신 기선은 최단거리의 항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다네. 덕분에 속도는 비슷해도 실제로는 좀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걸세. 잘만 한다면 겨울이 되기 전에 2번 오가는 것도 가능할 테고."
정성국의 대답에 잠시 머릿속으로 기선을 상상하던 김봉길은 문득 정성국에게 히죽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허. 그렇습니까? 그거참 기대되는군요. 저기 대방 어르신."
"왜 그러나."
"혹시 그 기선이라는 배가 만들어지면 그 배의 선장은..."
"예끼. 이 사람아. 배에 애정을 좀 갖게나. 이 배의 선장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배를 탐내는가."
"끙..."
정성국의 타박에 시무룩해진 김봉길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항구 주변에서 움직이는 배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망원경을 들어 배를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엔 얼핏 인급 함선처럼 보였던 배였지만 배 중앙에 이상한 굴뚝이 보였기에 저 배는 대체 뭔가 싶었던 김봉길은 문득 방금 들었던 기선이 아닐까 싶어 질문했다.
"어? 저 대방 어르신. 저게 혹시 기선입니까? 중간에 이상한 굴뚝이 달려있네요?"
오랜만에 보는 개척촌의 풍경을 물끄러며 바라보던 정성국은 김봉길의 물음에 시선을 돌렸다가 의외의 함선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음? 아!"
"맞습니까? 대방 어르신?"
"맞네. 저건...기범선일세."
"기범선요?"
"기선과 범선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되네.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다 바람이 없으면 증기의 힘으로 움직여도 되고...아니면 두 힘을 모두 사용해서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고."
"오. 그건 괜찮게 들리는군요."
"허...기동이에게 한번 만들어 보라고는 했는데 성공한 건가..."
정성국이 개척촌을 출발하기 전에 증기기관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박기동에게 건네주고 떠나긴 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그가 없는 사이 박기동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자료를 건네주고 시범적으로 배를 만들어 보라고 했었을 뿐인데 용케 기범선을 만들어 운항하고 있었다.
정성국은 망원경을 통해 항구 주변을 유유히 움직이는 기범선을 보면서 생각했다.
'외륜이 없는 것을 보면 바로 스크루 추진 방식을 채용했나 보군. 저건 몇 마력이나 되려나? 간린마루 처럼 100마력만 되어도 태평양 횡단이 가능은 할 텐데...'
간린마루는 에도 막부 말기에 막부가 네덜란드에 주문했던 배로 스크루 추진 방식의 300톤급 100마력의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범선이자 막부의 선박으로서 최초로 태평양을 왕복한 것으로 알려진 배다.
1860년 미국 파견 사절단 일행이 미국 군함 포우하탄 호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할 때 간린마루는 명목 상 사절단 인행의 호위함으로 태평양을 횡단했고 약 2달간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했었다.
'잘됐네. 확실히 범선으로는 한계가 느껴져서 증기선 개발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는데. 기동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어. 일단은 저 배의 자세한 제원부터 알아보는 게 먼저겠군.'
그렇게 정성국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기범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김봉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면 이젠 저런 기범선을 건조하게 되는 겁니까? 그럼 저도 한 번쯤 경험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글쎄..."
다시 한번 기범선의 선장자리를 노리는 김봉길의 말을 흘려들으며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래도 범선과 비교하면 수송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같은 크기의 배라 가정하면 범선과 비교하면 기선의 경우는 증기기관과 연료를 적재해야 하는 만큼 수송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초기에 선주들은 범선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었고.
다만 기선의 경우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그리고 운하의 존재 덕분에 범선의 자리를 기선이 대체하게 되었지만.
'결국, 나중을 생각하면 기선으로 가야 하긴 하지만 당장 올인할 수야 있나. 결국, 지급 함선을 꾸준히 건조하면서 기범선을 발전시키고 보급항도 만들어야 하고...어휴. 쉽지 않네.'
증기선을 제대로 만든다 할지라도 보급항의 문제가 걸리자 정성국은 그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수송량을 올리려면 곳곳에 보급항을 두어 연료 적재를 최소화시켜야 하는데 당장 그럴 여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곳곳에 보급항을 만들기는 어려울테고...그래도 항로를 생각해보면 최소한 아이누 섬에는 항구를 무조건 만들어야겠네. 특히 아이누 섬엔 석탄도 매장되어 있으니. 결국, 저 친구들의 역할이 중요하겠군.'
정성국은 갑판 한쪽에서 개척촌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투로시노와 아이누 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곁에서 개척촌을 손짓하며 뭐라고 떠들어대던 경비대 조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아이누 인들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지급 함선이 항구에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이 선착장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항해가 가능한 지급 함선은 정성국이 타고 나갔던 배 한 척뿐이었으니 지금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 정성국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자 정성국은 내리기 직전에 다시 한번 김봉길에게 당부했다.
"선장. 선원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해 두게. 최대한 입조심을 하라고. 그리고 입 다물 자신 없으면 함부로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말일세."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선원들이 하선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당부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래. 부탁하네. 아. 이번 항해에 대한 보상은 바로 행정청을 통해 건네줄 테니 새해 잘 보내고 당분간은 푹 쉬라고 전하게."
"예. 대방 어르신."
당부를 마친 정성국이 선착장으로 내려서자 그를 반겨주는 박기동이 보였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