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오. 이색적인데?“
”좀 색다르긴 하네.“
”그것보단 오랜만의 항구인데?“
"그런데 생각보단 평화로워 보이는데?"
"그러게 말여."
오랜만에 보는 시골 어촌 풍경의 항구를 보고 선원들은 괜히 들떠있었다.
그러나 젊은 선원 한 명이 나서서 그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럼 뭐해요. 하선도 못하고 배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주위의 선원은 오히려 젊은 선원을 타박했다.
"뭘 아쉬워하고 그래. 어차피 말도 안 통하는 곳에 내려서 할 게 뭐 있다고."
"그건 그려."
"그래도 배에서 있다 보니 영 지겨워서 그렇죠. 내려서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주위 선원들의 반응에 멋모르고 아쉬움을 토해냈던 선원이 당황해서 허둥지둥 변명했다.
그러나 그 변명은 근처에서 항구를 바라보던 노선원의 잔소리만 불러왔다.
"어허. 선장님의 엄명을 잊은 거야? 이곳에선 식수와 야채만 조금 보충하고 바로 개척촌으로 간다잖냐. 좀 참어."
"그려. 그려. 얼마 안 남았잖아."
쏟아지는 주변의 잔소리에 두 손을 들고 항복해버린 젊은 선원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조금만 참으면 되겠죠."
그때 한 나이든 선원이 갑판 위에서 떠들고 있던 선원들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쓰읍! 다들 슬슬 입 다물어! 선장님께서 저곳에선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그만 구경하고 빨리 일이나 해!"
그제야 갑판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선원들이 흩어지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끙...빨리 식수하고 야채만 적당히 보충해서 빨리 개척촌으로 갔으면 좋겠네."
"그러게. 이곳에 머물러봐야 속 편하게 쉬지도 못할 거 같아."
"이곳도 왜구의 소굴이라며. 볼일만 보고 후딱 내빼는 게 낫지."
"하긴. 그것도 그려."
* * *
정성국은 갑판 위에서 이색적인 풍경의 항구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드디어 나하로군. 선장. 선원들에겐 잘 설명해두었지?"
"예. 대방 어르신. 저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한번 당부했다.
"물론 오랜만에 발견한 땅에 내리지 못하는 게 아쉽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이야기하세. 특히나 3일 전의 일도 있는 만큼 최대한 우리의 정체를 숨겨야 하네."
"알겠습니다. 선장님. 다시 한번 확실히 이야기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헌데 대방 어르신. 저곳도 왜구의 땅입니까? 전엔 유구국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봉길의 질문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성국이 선원들의 사기를 위해 이곳이 왜구들의 소굴이라 하선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류큐가 왜구의 소굴은 아니었다.
현재 류큐에는 왜인이 별로 없기도 했고.
대략 50년 전,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크게 손해를 본 사쓰마 번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류큐를 침공했고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그 이후로 류큐는 사쓰마 번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고 사쓰마 번은 나하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 이라는 관리를 두어 류큐를 감시하고 있긴 했으나 그들이 다였으니.
"명목상으론 아직 유구국일세. 다만 실제로는 사쓰마 번에 의해 점령당한 이후 그들에게 속해있다고 봐도 되네. 현재는 조공을 바치고 있는 형편이지."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명색이 왕국인데 고작 왜구에게 패해 조공을 바치고 있다니..."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임진왜란을 잊은 건가? 고작 왜구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자 김봉길은 탄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긴 그때 수만이 넘는 왜구들이 쳐들어왔다고 들었으니...그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갑니다."
김봉길은 이곳 류큐도 조선처럼 어마어마한 왜구가 쳐들어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김봉길의 착각을 슬며시 바로잡아줬다.
"...뭐 이곳은 3천 명의 왜구들을 막지 못하긴 했네만..."
"예에? 그래도 왕국인데 고작 3천 명의 왜구를 못 막았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하네. 그래서 고작 일개 번에 조공을 바치는 게지."
"쩝...안타깝군요."
유구국의 처지가 옛 왜란을 겪었던 조선과 비슷하다고 여겼는지 김봉길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성국 역시 유구국의 현 상황이 안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사정에 관여할 마음은 없었다.
개입하기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을뿐더러 당장 제 코가 석 자였다.
계속해서 지금의 항로를 유지한다면 안정적인 항로를 위해 개입해볼 만도 하지만 범선을 타고 이동하면서 정성국이 다짐한 것은 최대한 빨리 증기선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증기선을 만들어 낸다면 대권항로로 항해하면 그만이라 굳이 이쪽으로 올 이유가 없었으니.
그런 만큼 이곳 사정에 깊이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훗날이라면 또 모를까.
다만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과연 자신이 살아생전 이곳에 과연 개입할 수 있을까 싶긴 했다.
"흠...저들의 사정은 딱하지만 어쩌겠나. 우리에게 필요한 식수와 야채만 적당히 보급받고 바로 떠날걸세. 그러니 다시 한번 선원들의 입을 단속시키게."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마지막 당부 후 정성국은 하선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비대원들이 바로 정성국에게 따라붙었고 경비대원들의 조장이 정성국에게 말을 걸었다.
"저...대방 어르신. 꼭 대방 어르신이 하선하셔야겠습니까?"
"별수 있는가? 이 배에서 한어와 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별일 없을걸세. 아무리 왜인들이 사납다 한들 보자마자 칼부림이라도 하겠는가. 또한, 나 혼자 하선하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자네들이 있으니 저 왜인들도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걸세."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단호한 정성국의 어조에 하선을 막긴 어렵다고 판단한 듯 조장은 주변의 경비대원들에게 당부했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라. 저들은 왜구들이다. 알았나?"
""예. 조장.""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신경이 곤두선 경비대원들을 보고 정성국은 괜히 이곳을 왜구의 소굴이라고 둘러댔나 싶어 속으로 후회했다.
* * *
유구국의 관리는 오랜만에 항구로 가까이 접근하는 거대한 배를 보고 나직하게 감탄했다.
"허. 저 거대한 배는 어느 나라 배인가?"
그러자 관리 뒤편에 있던 젊은 사내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표식이 없군요. 헌데 배가 참으로 크군요."
"하지만 군선은 아닌 것 같지?"
"예. 보통 군선이라면 양 현에 수많은 포문이 보일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상선이 아닐까 합니다."
관리는 오랜만에 나하에 방문한 상선에 살짝 기대하며 항구로 나갈 채비를 했다.
"흠...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 상선이니 일단 나가보세."
그러자 뒤편에 있던 젊은 사내는 관리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예. 나으리. 헌데 류큐재번봉행에게는..."
괜히 꼬투리 잡히기 전에 이곳을 감시하는 사쓰마 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젊은 사내의 말에 콧방귀를 뀌는 관리였다.
"흥. 굳이 알리지 않아도 저리 큰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데 설마 모를까. 그냥 가세."
"예. 나으리."
* * *
정성국이 배에서 내리자 항구에서 관리로 보이는 복장을 한 중년 남성과 그 뒤를 따르는 젊은 사내가 보였다.
그들은 정성국이 내리자 천천히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관리의 질문에 정성국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광주(廣州)에서 왔습니다."
"아하! 대청제국 분들이시군요. 헌데 배가 특이합니다만..."
배의 모습을 보고 서양인이 아닐까 했던 관리는 배에 탄 선원들이 모두 동양인으로 보이자 이상하다고 여겨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에 정성국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대답했다.
"오문(마카오)에서 구한 배입니다. 저 서역귀 놈들의 배이지요. 꽤 비싸게 주고 구했지만 쓸만하더군요."
관리는 오문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렇군요. 혹시 이곳엔 상행을 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군도를 따라 이동하다 항구가 보여 그저 식수나 보충하고 혹여 살 만한 물건이 있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자 관리의 표정이 꽤 시무룩해졌다.
한때 중개무역으로 번성했던 나하 항이었지만 이미 쇠퇴한 지 오래였기에 오랜만에 방문한 상선을 보고 꽤 기대했던 관리였다.
하지만 상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지나가다 잠시 들렸다는 말에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류큐는 사쓰마에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하는지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정을 대충 짐작하는 정성국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바로 보급을 요청했다.
"예. 값을 치를 테니 식수와 야채 정도를 보급받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바로 처리해 드리지요."
관리는 자신을 따라서 온 젊은 사내에게 눈짓했고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으리."
젊은 사내는 대답을 한 후 재빠르게 항구 근처에 있는 한 건물로 달려갔다.
아마 저곳에 일꾼들이 있으리라 생각한 정성국은 눈앞의 관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식수와 야채를 보급하는 일은 저 친구에게 맡겼으니...이곳에 오셔서 혹여 다른 물건을 사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상대가 팔 물건이 없다면 다른 물건이라도 팔겠다는 관리의 모습에 정성국은 이곳에서 살만한 것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 지금쯤이면 이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서 먹고 살던가? 그러면...'
생각을 마친 정성국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작물의 종자들을 좀 보고 싶군요."
"종자 말입니까?"
"예. 그리고 혹시 사탕수수의 종자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어...음."
예상외의 물건을 찾는 정성국의 말에 당혹해하는 관리였다.
'이곳의 유일한 돈줄이니 종자의 유출을 꺼리는 건가? 뭐 어차피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 상관은 없다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정성국이었다.
"어렵습니까? 그럼 괜찮습니다. 딱히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관리는 정성국의 반응에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 * *
마지막으로 류큐인이 가져온 가마니를 선원이 옮기는 것을 보고 정성국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금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관리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조금 후하게 넣었습니다."
이곳에서 꽤 다양한 종자를 구할 수 있었기에 만족한 정성국은 값을 후하게 치렀다.
비록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정평국에게도 여러 작물의 종자를 구하라고 이야기해두었지만, 종자야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특히 사탕수수는 조선에선 심을만한 장소가 없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품목이라 이곳에 온 김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한 정성국이었다.
그러자 주머니를 받아들던 관리는 표정이 밝아졌다.
"오. 감사합니다. 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예. 어차피 지나가던 길이었고...저기 저렇게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굳이 이곳에서 머물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면서 정성국은 항구와 살짝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감시하는 사람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쓰마에서 이곳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둔 사람들로 보였는데 이곳에 정성국과 경비대원들이 항구에 내렸을 때 선착장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경비대원들이 들고 있던 소총을 보고 놀라며 우왕좌왕하던 사쓰마 인들이었으나 정성국이 선착장에서 머물 뿐, 항구로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곧 진정하고 멀리서 이쪽을 살피기 시작했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탄식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관리였다.
"아...죄송합니다. 저들은 이곳 사정을 잘 몰라서..."
"아닙니다. 아무튼,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럼 평온한 항해가 되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끝내고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사쓰마 인들을 슬쩍 바라본 정성국은 이내 시선을 돌려 바로 배에 승선했고 곧바로 배는 항구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정성국은 배에 올라 이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쓰마 인들을 보면서 살짝 짜증이 났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별다른 트러블 없이 식수를 보충한 지급 함선은 차가운 바람의 도움으로 빠르게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항해한 지 10일, 마침내 개척촌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