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선수에 서서 망원경으로 앞에 있던 갤리온을 관찰하던 선장이었다.
처음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살짝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돛을 잘못 운용한 것인지 배의 속도가 순간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선장이었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갤리온의 모습을 다시 한번 관찰한 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 뒤쪽의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좋았어! 슬슬 거리가 좁혀진다! 잘 하고 있어! 곧 따라잡을 거다!"
"예! 선장님!"
선장의 말에 복창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약탈에 미소를 지으며 각자 무기를 챙기는 선원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갑판장이 슬쩍 선수에 있던 선장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들이 혹시 무언가 눈치챈 것은 아닐까요?"
갑판장의 말에 인상을 찡그린 선장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눈치챘다고? 뭐 그럴 수는 있겠지. 깃발도 없는 배가 근접하면 아무래도 불안하기는 할 거야."
"그러면..."
"그래서 뭐 달라지는 것 있나? 저들은 상선이니 붙어서 약탈하면 그만이지."
퉁명스럽게 말하는 선장을 향해 갑판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 그래서 오히려 꺼림칙합니다. 상선이면 오히려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들이 속도를 늦춰서 이상하다?"
"예."
"뭐 계속해서 도망칠 자신이 없나 보지. 아니면 속도를 더 내려다 실수 했을 수도 있고."
"으음..."
그저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선장의 답변에 갑판장의 안색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갑판장의 얼굴을 살펴본 선장은 퉁명스럽게 충고했다.
"어이. 갑판장. 조심스러운 것은 좋지만 그게 과하면 소심한 게 되는 거야. 알겠나?"
"...예. 선장님."
단지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갑판장은 곧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앞쪽의 갤리온이 배의 방향을 틀어 선회하기 시작했다.
"응?"
"선장님. 저 배가 방향을 트는데요? 설마..."
갑작스럽게 배의 속력이 감소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 속도를 내려다 돛을 잘못 조작하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뒤따라오는 배를 향해 현 측을 내보인다는 의미는 하나였다.
현 측에 있는 대포로 공격하겠다는 뜻.
그것을 깨달은 선장은 입술을 깨물면서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저 배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다.
포문이 별로 없는 것을 볼 때 상선이 분명했다.
거기에 배가 크다는 뜻은 그만큼 저 배를 약탈하면 남는 것도 많을 것이다.
설사 저 배에 실린 물건이 적다 할지라도 배 자체로도 매우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선장이 계속해서 나아갈 것을 명령했다.
"...젠장. 무시하고 그냥 계속 나아가!"
그때였다.
펑! 펑!
갑자기 전방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면서 무언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물체를 보고 옆에 있던 갑판장이 기겁했다.
"헉!"
"응? 저건 또 뭐야!"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하나는 빗겨나갔지만, 또 하나의 물체는 선장이 서 있던 곳까지 날아왔다.
"우왁!"
갑자기 날아온 물체에 기겁하며 급히 허리를 숙였던 선장과 갑판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갤리온에서 날아온 물체는 높이 떠서 돛을 관통하고 수면으로 꽂혔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갑판장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방금 보셨습니까? 선장님? 저거 포탄이 아닌 거 같은데요? 말뚝입니까?"
그런 갑판장의 호들갑에 살짝 인상을 쓰면서도 선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갑판장의 말에 동의했다.
"허. 저놈들은 포탄 대신 말뚝을 날리는 건가? 어느 나라 놈들이야? 대체?"
"선장님. 어떻게 합니까?"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갑판장의 말에 순간 열이 확 오른 선장은 갑판장에게 다가가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차면서 쏘아붙였다.
"뭘 어째! 고작 2발 날라왔어! 고작 대포 2문이 무서워서 도망치자는 소린가! 무시해! 어차피 저들은 이미 배를 틀었어. 금방 가까워진다고! 정신 안 차릴래!"
"윽. 알겠습니다. 선장님."
순간적으로 고통에 눈물이 찔끔한 갑판장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달려나갔다.
동시에 선장에게 맞았던 고통을 분노로 승화시켜 선원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해! 고작 대포 2문이 무서운 거냐! 정신 차려!"
그러자 갑작스러운 공격에 우왕좌왕하던 선원들이 곧 진정하고 갑판장을 바라보았다.
"슬슬 가까워지는데 대포 준비합니까?"
"선수포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무기를 챙겨라! 근접해서 저들을 죽이고 배를 탈취한다!"
"오오!"
* * *
갑판에 서서 망원경으로 점점 접근하는 네덜란드의 배를 보면서 정성국은 중얼거렸다.
"흠...점점 가까워지는군. 이번엔 맞출 수 있겠지?"
"한소리 했으니 이번엔 명중시킬 겁니다."
김봉길이 살짝 이를 갈면서 단호하게 대답하자 피식 웃은 정성국은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도록 하지."
그때 이쪽으로 돌진하는 네덜란드의 배에서 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펑!
약간은 여유만만하던 선원들의 안색이 바뀌면서 다들 허리를 숙이면서 소리쳤다.
"적선에서 포를 쐈다!"
"포탄이 날아온다! 조심해!"
동시에 네덜란드 배와 싸우기로 하면서 소총을 들고 정성국의 주변에서 대기하던 경비대원들이 동시에 정성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위험합니다! 대방 어르신!"
"어어."
첨벙.
다행스럽게 저들이 쏜 포탄은 배와 꽤 멀리 떨어진 곳의 수면을 강타했다.
정성국은 자신의 주변을 몸으로 둘러싸고 있던 경비대원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끙...자네들이 나를 감싸 보호하려는 의도는 알겠네. 참으로 고맙긴 한데...어차피 저거 직격당하면 다 죽네. 다음엔 이러지 말게."
그러나 정성국 주변에서 몸으로 포탄을 막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경비대원들은 단호하게 답했다.
"대방 어르신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끙. 알았네. 알았어. 일단 내가 뒤쪽으로 이동할 테니 좀 떨어지게."
그렇게 정성국이 뒤쪽으로 물러나 갑판 뒤편에 있던 선미 근처로 이동하자 경비대원들은 정성국을 따라와 그 앞을 적당히 가로막았다.
그런 그들을 보고 정성국이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김봉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휴. 빗나가서 다행입니다."
"뭐 그냥 위협하려고 쏜 거겠지. 그건 그렇고 선수포는 한 문 뿐인가 보군."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 말에는 정성국도 동의했다.
아무리 지금 날리는 포탄이 그저 쇳덩이일지라도 재수 없게 직격당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수많은 포탄이 날아온다면 선원들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헌데 슬슬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그렇군요. 이제 100보 정도일까요?"
"이곳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슬슬 준비해야지?"
"알겠습니다."
김봉길은 곧 이동해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50보 근처로 다가오면 저들을 향해 총을 쏴버려! 알았나?"
"그렇게 가까이서 말입니까?"
"그렇게 가까우니 총알 낭비하는 놈들은 나중에 빡세게 훈련받을 줄 알고!"
""으하하하!""
동시에 견시수가 현 측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70보!"
"60보!"
순간 김봉길이 포 갑판과 연결된 계단에 머물러 있는 선원을 보고 소리쳤다.
"방포하라!"
"방포 하랍신다!"
펑! 펑!
순간 굉음과 함께 다시 대장군전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김봉길은 갑판 위의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돛을 최대로 펼쳐! 닻을 끌어 올리고!"
"돛을 모조리 펼치랍신다! 닻을 올려라!"
김봉길의 명령에 선원들이 재빨리 움직일 때 지급 함선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쏜살같이 날아가 두 발 다 적 함선에 제대로 꽂혔다.
콰직! 콰직!
그 광경을 보면서 정성국은 씩 웃었다.
"호오. 이번엔 제대로 명중이로군."
"휴우. 다행이군요."
점점 가까워지는 배를 보면서 안색이 딱딱해졌던 경비대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대장군전이 박혀있던 저들의 선수 부분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 * *
펑! 펑!
다시 한번 갤리온에서 폭음이 들리며 예의 말뚝이 다시 날아왔다.
선장은 이번만 넘기면 가까이 붙을 수 있기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신의 가호는 한 번뿐이었는지 말뚝은 순식간에 날아와 박히며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직! 콰직!
"크악!"
"젠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미 부근으로 이동했던 선장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뚝이 어디 박혔는지 확인했다.
한 발은 뱃머리 위쪽 부근에, 또 한발은 선수 갑판 위에 말뚝이 박혀있는 것을 확인한 선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쪽에 말뚝이 박혀 물이 새기라도 했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다행히 위쪽 갑판에 틀어박혔다.
운 없이 서너 명의 선원이 말뚝이 박히면서 비산한 파편으로 인해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았다.
이제 가까이서 말뚝을 날린 빌어먹을 녀석들을 죽이고 배를 빼앗으면 된다고 생각한 선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 더 이상 포격은 없다! 모두 화승총을 장전하고 가까워지면 쏴버려!"
""에! 선장님!""
선장의 말에 대답한 선원들은 선수 부근에 자리 잡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말뚝을 지나쳐 선수에 몰려들었을 때였다.
콰콰콰쾅!
그 광경을 뒤에서 목격한 선장을 얼빠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저...저게...무슨..."
* * *
"끄아아악!"
"으아악!"
폭음과 함께 대장군전이 터져나가면서 대장군전 주위에 있던 선원들이 폭발에 휘말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성국은 저들의 참혹한 모습에 안색을 찌푸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시선을 고정했다.
동시에 망원경을 들고 해적질을 감행한 저 배의 갑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부분 선원이 몰려들었던 선수 부근에 꽂혀있던 대장군전이 터지면서 선원들이 폭발에 휘말렸다.
거기에 뱃머리 위쪽에 꽂혀있던 대장군전이 폭발하면서 배의 선수가 완전히 박살 나버렸고.
갑판위에 있던 대다수 선원은 폭발에 휘말렸고 뒤쪽에 있는 선원들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앞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덕분에 어느새 거리가 꽤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저쪽에선 총알 한 발 날아오지 않았다.
또한, 폭발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는 해적을 보고 놀랐는지 이쪽의 선원들도 사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끝났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어찌할까요?"
김봉길의 물음에 정성국은 안색을 굳히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적인데 자비를 베풀 이유가 있나? 격침하게."
"예? 아...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의 냉정한 모습에 살짝 놀랐던 김봉길이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혹시라도 해적을 만나 싸우게 된다면 절대 방심하지 말고 전리품도 생각하지 말고 격침해 버리라고 누누이 강조하던 정성국이었으니 말이다.
펑! 펑!
첫 대장군전의 폭발 이후 선수 부근이 박살 나버린 네덜란드의 배의 속력은 줄어들었고 이에 반해 지급 함선은 슬금슬금 이동해 거리를 다시 적당히 벌리면서 대장군전을 발사했다.
이번에 발사된 대장군전 중 한발이 정확히 해적질하려던 네덜란드 배의 흘수선 가까이에 틀어박혔고 그 모습을 보며 정성국은 이번 전투는 끝났다는 판단을 내렸다.
콰콰콰쾅! 콰쾅!
정성국의 예상대로 네덜란드 배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있던 대장군전이 터지면서 저들이 가지고 있던 화약에도 불똥의 튀었는지 유폭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폭발로 인해 갑판 위에 남아있던 저 배의 선원들도 날아가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몇몇은 살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후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정성국에게 김봉길이 다가갔다.
"격침 시켰습니다. 대방 어르신."
"첫 실전이었지? 고생했네. 선장."
"아닙니다. 무기가 좋았을 뿐이죠. 헌데 저 남은 해적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사살하게."
"예?"
정성국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의외의 명령이라 반문하던 김봉길이었다.
"..."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아무런 말도 없이 생존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그의 내심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러 움직였다.
왜구 때문에 해적이라면 치를 떠는 조선인이었으니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던 저 해적선에 타고 있던 생존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선원들이었다.
탕! 탕! 탕!
김봉길과 선원들이 갑판에서 생존자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것을 보면서 정성국은 생각했다.
'잔인하지만 이게 올바른 선택이다. 괜한 인정으로 저들을 살려 줘봐야 오히려 골치만 아파질 거야. 저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놓아주면 우리에 대해 알려질 테고 훗날 앙심을 품을 수도 있어. 거기에 지금 시기면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최전성기나 마찬가지니 목격자를 모조리 없애는 게 최선이겠지.'
정성국이 기억하기에 바로 지금 시기가 VOC의 최전성기였다.
수백 척의 상선과 수십 척의 군함, 거기에 국가도 아닌 회사 주제에 1만이 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특히나 이번 전투에서 첫 실전을 겪은 정성국은 괜히 목격자를 살려두어 VOC와 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투를 복기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피해 없이 이건 건 상황과 운이 좋았을 뿐이야. 분명 나쁘지는 않은데...상대가 1척이면 모를까 그 이상이면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은데...역시 실전을 겪어봐야 한다는 건가. 이를 어쩐담...'
그가 생각하기에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배를 개조해 포문을 늘리던가 후장식 화포 개발에 매달리던가.
그리고 정성국으로서는 전자는 고려할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다.
'가뜩이나 수송량을 늘려야 하는 판에 무거운 전장식 화포의 수를 늘리고 이를 운용할 선원까지 늘리는 건 힘들어. 결국, 후장식 화포에 매달려야겠네. 관건은 질 좋은 강철의 양산뿐이군. 개척촌에 돌아가면 신철이와 고민을 좀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총소리는 그쳤고 김봉길이 다가와 보고했다.
"대방 어르신. 해적들을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런가. 고생했네. 선장. 그럼 이제 바로 류큐로 가세."
"예. 대방 어르신."
그렇게 네덜란드인의 피로 붉게 물든 바다를 뒤로하고 정성국이 탄 배는 유유히 북쪽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