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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2화 (22/850)

22화

정성국이 선실에서 여러 책을 집필하고 있을 때 선실 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선원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집중이 깨진 정성국은 연필을 내려놓으면서 선실 밖에 있는 선원에게 말했다.

"들어오게."

정성국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실 문을 열고 들어온 젊은 선원은 그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대방 어르신!"

"무슨 일인가."

"선장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장님께서 선장실로 대방 어르신을 모시라고..."

"그래? 알았네. 바로 가지."

"예.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푼 뒤 천천히 선실 밖으로 나가 선장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정성국은 날짜를 계산해가면서 대략적인 배의 위치를 파악했다.

처음엔 그저 서쪽으로 꾸준히 이동하려 했지만 바람과 해류를 타기 위해 방향을 조금 틀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만에서 출발한 지 2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정박한 곳은 바로 호놀룰루였는데 아직 이 시기의 호놀룰루는 아주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의 하와이의 원주민들은 폴리네시아인들로 이들은 통합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제각각 소규모 군장 집단으로 난립해 각 섬의 추장들이 각각 섬을 다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다른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처럼 우호적으로 교류하려고 했었지만, 생각외로 저들의 경계심이 강했다.

또한, 원주민들과 교역할만한 물건은 이미 북미에서 다 풀었기에 저들과 교역할만한 것도 딱히 없었고.

해서 원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수와 식량을 보충해 바로 하와이를 떠났다.

분명 중간기착지로 하와이는 나쁠 것이 없었지만 괜히 이곳에서 오래 머물다가 저들의 다툼에 휩쓸리게 될까 봐 정성국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상황이라 저들에게 함부로 철제 무기를 풀 수도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훗날을 기약했다.

그렇게 하와이에서 출발한 지도 벌써 한 달.

이제 슬슬 필리핀해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

정성국이 어느덧 생각을 마치고 선장실에 들어갔다.

선장실에 한가운데에 있던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김봉길은 정성국을 보고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그래. 나를 찾았다면서? 무슨 일인가?"

"바람과 해류가 바뀌었습니다."

"그래? 허면?"

"예. 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게 가능해 보입니다만...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대방 어르신을 청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이곳으로 이동해 잠시 정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김봉길이 가리킨 곳은 바로 오키나와섬이었다.

"흐음...현재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가?"

"제 계산이 맞는다면 바로 이곳일 겁니다."

김봉길은 오키나와섬을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손가락은 필리핀해의 서쪽, 필리핀 루손섬 북쪽의 한 해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쯧. 결국 여기까지 온 게로군."

정성국은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듯 표정을 살짝 구겼다.

애초에 계획은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적당한 위치에서 진로를 틀어 바로 북서쪽으로 올라가 규슈 방향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쭉 올라가 대한해협을 통과해 개척촌으로 바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하지만 해류도, 바람도 도와주지 않아 배의 속력이 급감했고 결국 김봉길은 정성국과의 상의 끝에 계속 바람과 해류를 타고 서진했다.

다행히 바람과 해류가 바뀌었다고 하니 이제 북쪽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았는데 김봉길 선장이 먼저 오키나와섬에 정박하자고 하자 정성국은 바로 물었다.

"식량과 식수 문제인가?"

"식량은 좀 남았는데 식수가 살짝 아슬해서 말입니다. 물론 계속 바람과 해류가 도와준다면 제주도까지 단숨에 이동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지금 시기에 이곳은 이미 사쓰마에 점령당한 후 일텐데. 쯧. 괜히 일본 애들과 얽히기는 싫었는데...그래도 별수 없지. 바로 식수만 보충하면 되겠지.'

"아니. 그럼 이 섬에 들러서 잠시 정비하고 바로 개척촌까지 가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 * *

갑판 위에서 선원들이 모여 뒤편에서 보이는 조그맣게 보이는 배를 보고 떠들기 시작했다.

"저건 무슨 배지? 저거 범선 같은데?"

"그러네? 인급 함선하고 꽤 비슷하게 생겼네."

"그러게. 헌데 저거 왜 계속 따라오는 것 같지?"

"에이. 항로가 비슷한가 보지 뭐."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선원들은 곧 정성국과 김봉길의 눈치를 보며 수다를 멈추고 흩어졌다.

정성국은 망원경으로 뒤편에서 따라오는 배의 깃발을 확인하고 묘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네덜란드의 배로군."

"네덜란드요?"

"왜국이 화란이라고 부르는 남만인들의 나라일세."

정성국의 말에 살짝 긴장했던 김봉길은 표정을 풀며 묻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저들은 왜국과 교류를 하나 보군요?"

"그렇다네."

"그러면 저들도 왜국으로 이동하는 중일까요?"

"그랬으면 좋겠네만...혹시 모르니 일단 경계는 하게나."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다시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뒤편의 네덜란드의 배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이 시대의 상선들은 틈이 보이면 해적질을 하곤 했으니 믿을 수가 있나. 차라리 스페인의 함선이라면 모를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배는 일단 경계하는 게 맞겠지.'

그가 알기로 동남아 해역에서 스페인의 함선들은 군함에 가까운지라 해적을 소탕하면 소탕했지 해적질은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 막대한 은을 싣고 오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해적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보물선을 약탈하려 덤벼드는 해적선을 잡기에 바빴지.

반면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이곳까지 무역하러 왔다가 물건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간혹 해적질해서 돈을 벌어 교역품을 사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고 알고 있었고 말이다.

* * *

이 배의 선장은 망원경을 눈에 때지 못하고 앞쪽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갑판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선장에게 말을 걸었다.

"선장님. 정말 공격할 생각입니까?"

그런 갑판장의 반응이 맘에 들지 않던 선장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거 상선이야. 포문이 별로 없다고."

"으음...하지만..."

그러나 계속 머뭇거리는 갑판장의 반응에 한숨을 내쉰 선장은 망원경을 갑판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보라고. 멀리서 봤을 땐 갤리온과 비슷해 보여서 스페인의 군함인 줄 알았는데 모습도 좀 다르고 깃발도 없지. 거기에 포문도 없고. 그런데 저걸 그냥 보내라고?"

갑판장은 선장이 건네준 망원경을 통해 앞쪽에서 이동하는 배를 살펴보았다.

약간의 대각선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배의 양 현이 보였지만 확실히 선장의 말대로 포문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갑판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끙...알겠습니다. 애들한테도 이야기해 두죠."

"그래. 바로 그 자세야. 갑판장. 그럼 준비하게."

"예. 선장님."

"아. 그리고 깃발을 내리게."

"알겠습니다. 선장님."

*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선미에서 뒤따라 오는 함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쪽에 있던 네덜란드의 함선 위에서 펄럭이던 깃발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정성국은 혀를 차기 시작했다.

"쯧쯧쯧. 깃발이 내려갔군."

"무슨 의미일까요?"

"무슨 의미긴. 해적질하겠다는 뜻이지."

"예에?"

자신들도 해적질이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고있기에, 그리고 해적질하는 도중 혹시 모를 목격자를 대비해서 깃발을 내리고 공격하던 서양인들의 방식을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선장. 따돌릴 수 있겠나?"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섬에 정박할 예정이었는데..."

"아. 식수를 보충해야 한다 이거지?"

"예."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저들이 원한다면 한판 붙어주기로.

"그래? 흐음. 허면 속도를 줄이게."

"...저들을 공격하실 생각이십니까?"

"깃발을 내린 것을 보면 이제부터 해적질하겠다는 뜻일세. 다만 혹시 모르니 일단 속도를 늦추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지. 저들이 그냥 지나친다면 모를까 접근한다면 대장군전을 하나 먹여주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김봉길이 굳은 표정으로 밑에 선원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뒤로하고 정성국은 다시 망원경으로 뒤편에서 따라오던 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밑에 쟁여두었던 대장군전을 괜히 가지고 왔다 싶었더니...드디어 쓸 일이 생기는구만. 헌데 저것도 일본을 향해 이동하는 배인 것을 보면 교역할 무언가가 있기는 할텐데...근접해서 소총으로 제압할까?'

정성국은 승리를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전리품을 생각하다 곧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몇 년 전 나선 정벌에서 러시아 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의 명령 때문에 다 이긴 전투에서 조선 병사들이 황급히 배에 올라 불을 진화하다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은 고개를 흔들어 욕심을 떨쳐버렸다.

'아니다. 괜히 전리품에 욕심내다 소중한 선원이 다칠 바엔 그냥 포격 훈련이나 한다고 생각하고 격침하는 게 맞겠구나. 내가 그 멍청한 청나라 놈들과 똑같은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 * *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지급 함선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쾌재를 부르면서 뒤편의 네덜란드 배가 계속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선미에서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고 있던 정성국은 저들의 갑판이 분주하고 선원들이 화승총을 들고 갑판 위로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를 보고 결정을 내린 정성국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저 배에 탄 이들은 해적이 맞는것 같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세."

"예. 대방 어르신."

정성국의 명령과 함께 김봉길은 선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배를 틀어 포격할 각도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곧 선원들이 대장군전을 장전하고 발사 준비를 대충 마치고 한 명의 선원이 갑판 위로 올라가 보고하기 시작했다.

"대장군전 방포 준비를 끝냈습니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봉길은 포 갑판에서 올라온 선원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방포 하라!"

"방포 하랍신다!"

펑! 펑!

잠시 후 굉음과 함께 기다란 대장군전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파도 때문일까. 아니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일까.

한 발은 근처에, 한 발은 돛을 살짝 찢는 데 그쳤다.

그러자 김봉길은 얼굴을 과하게 찡그리며 소리쳤다.

"제대로 조준 안 하냐! 빨리 재장전해!"

""예! 선장님!""

선원 한 명이 김봉길의 얼굴에 눈썹이 휘날리듯 포 갑판으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정성국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망원경으로 상대편의 배를 관찰했다.

'허둥지둥 하기는. 쉽게 봤다가 갑자기 포에서 웬 말뚝이 발사되니 무척 놀란 모양인데? 허. 그래도 선원들을 잘 통제하는군.'

잠시 후 선원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보고했다.

"재장전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럼 당장..."

그때 정성국이 끼어들었다.

정성국이 갑판을 살펴보며 저들의 대포를 확인했지만, 저들은 공격당했으면서도 당장 포를 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잠시. 선장. 저들은 우리의 배를 탈취할 목적이라 더 가까이 접근할걸세. 그러니 좀 기다렸다가 더 가까워지면 방포 하는 게 어떻겠나."

"흐음...확실히 명중시키려면 50보 가까이 접근할때까지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러다 만약 빗나가기라도 하면 그때는 재장전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실전이라고 하지만 50보에 근접한 저만한 배를 못 맞춘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끙...알겠습니다."

김봉길은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직접 포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런 김봉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씨익 하고 웃었다.

'역시 갈구려면 제일 윗사람을 갈궈야 하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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