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정성국은 문득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 감겨있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한쪽에 놓여있는 수통에 손을 뻗었다.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정성국은 들고 있던 수통을 입에 가져다 대고 안에 들어있는 물을 순식간에 다 마셨다.
"푸아. 살겠군."
물을 마시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숙취로 인한 두통에 잠시 얼굴을 찡그리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로 나갔다.
천막 밖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정신을 가다듬은 정성국은 조용한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쯧쯧. 완전 개판이구만."
거의 삼 주 가까이 리치먼드 지역에서 머물렀기에 샌프란시스코만에 인접한 원주민들은 모두 큰 배를 타고 방문한 이방인의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원주민들에게 큰 배를 타고 방문한 이방인은 복식이 다를 뿐 피부나 머리카락 색도 비슷했고, 생소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주는 인심 좋은 이방인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매일같이 여러 원주민이 리치먼드 지역의 야영지로 몰려왔고 어느새 이곳은 이 지역의 만남의 광장 비슷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다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그리고 가지고 온 물품들 대부분을 원주민들과의 교역에 사용했기에 귀환할 준비를 했다.
비록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곧 친절한 이방인들이 떠나리라는 것을 분위기로 알아챈 것인지 저들은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보기 위해 꽤 많은 원주민이 이곳 야영지로 몰려들었다.
정성국과 조선인들은 몰려든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향신료로 잡내를 잡은 맛있는 고기와 이런 분위기에선 빠질 수 없는 술을 대접하며 마지막 축제를 벌였다.
덕분에 향신료도, 선원들이 최후까지 아껴두었던 술 대부분을 모두 풀었고 그렇게 북미에서의 마지막 밤을 술과 함께 보냈다.
그러한 축제의 다음 날이었으니 야영지 전체가 꽤 너저분했다.
다만 정성국은 야영지 주변 곳곳에 보이는 티피를 보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신뢰...를 쌓았다고 봐도 되려나? 예상외로 샌프란시스코만 근처에 사는 원주민이 좀 있긴 하지만 어차피 수렵과 채집이 주라 우리가 이주해서 사는 것을 반대하진 않을 것 같고...'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정성국이 고개를 돌리자 김봉길이 다가와 인사했다.
"기침하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아아. 죽겠구먼. 어제 술을 너무 마신 듯하네."
김봉길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그의 얼굴을 훑어본 정성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봉길의 표정이 조금 난감해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무슨 일 있는가?"
"그게..."
말을 흐리는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도 순간 안색을 굳히면서 김봉길을 다그쳤다.
"말해보게."
계속되는 재촉에 김봉길은 목소리를 낮춰 보고했다.
"선원 몇이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몇몇 선원이 사고 쳤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허어. 이것 참..."
애당초 정성국은 선원들이 원주민과 잠자리를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배에 탄 선원 대부분은 개척촌에서 지냈었기에 위생과 청결을 꽤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거기에 이 배를 타고 북미대륙으로 이동하는 동안 정성국이 그들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여러 번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강조를 했고.
그래서인지 그동안 이곳까지 이동하면서 원주민들과 간혹 교류는 했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성국도 선원들이 욕구불만이라지만 과연 생김새도 살짝 다르고 지저분한 원주민과 잠자리를 가질까 싶었고.
의외로 그동안 만났던 다른 원주민들과는 다르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청결을 꽤 신경 쓰는 편이긴 했지만,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기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정성국이었다.
'추운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과는 달리 이곳 원주민들은 그나마 깨끗한 편이기는 한데...그래도 그렇지. 이거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원주민들의 반응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저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게 좀 희한한 게...별 반응이 없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래? 아직 모르는 게 아니고?"
"아닙니다. 선원과 원주민 여성이 천막에서 나올 때 주위에 있던 원주민들이 히죽거리면서 웃는 것을 봤습니다. 오히려 축하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원주민도 있었고 말입니다."
김봉길의 상세한 설명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일단 사고를 친 선원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일단 그 친구들은 어디 있나."
"저쪽에 있습니다."
"가세."
김봉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야영지 외곽의 한 천막이었다.
천막 앞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원 6명이 있었다.
그런 선원들을 보면서 정성국은 혀를 찼다.
"쯧쯧쯧."
정성국의 반응에 선원들은 모두 움츠러들었을 때 정성국이 선원들에게 말했다.
"고개 들게."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든 선원들이었고 정성국은 그제야 선원들의 신상을 파악했다.
'그나마 다들 총각이네. 뭐 가족이 있는 선원들을 최대한 배제하긴 했지만...그나마 다행인가?'
정성국이 선원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고개를 들었던 선원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정성국에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대방 어르신.""
"죄송할 걸 알면서 대체 왜 그런건가?"
"..."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선원들을 보고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긴 정성국이었다.
'어찌 보면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원주민을 포용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들이 물꼬를 터 원주민과 결합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웃이 될 수 있겠지. 거기에 훗날을 생각하면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 이들을 이곳에 남겨두고 말을 배우게 하면 되겠지.'
생각을 끝낸 정성국이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쯧. 자네들의 짝은 어디 있는가? 돌아간 건가?"
"아닙니다. 저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선원들이 천막 뒤편에 있는 티피들을 가리켰다.
그런 선원들의 대답에 정성국은 선원들에게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고개 들게. 하나 묻지. 저들을 어찌할 셈인가? 저들을 책임질 마음은 있는가?"
정성국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선원들이었다.
"물론입니다. 대방 어르신."
"그럼요. 기꺼이 책임지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그런 선원들의 마음에 내심 흡족해진 정성국은 표정을 풀고 선원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자네들은 이곳에 남게."
"예?"
정성국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선원들의 반응을 보고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정성국.
"왜? 책임진다면서?"
그러자 한 선원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저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의미였습니다만..."
그 말을 중간에 끊은 정성국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들을 조선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저들이 조선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정성국의 말에 선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록 원주민들의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는 하나 차이가 없지는 않다.
그런 그들을 조선으로 데리고 간다 한들 저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그들은 선원들이었기에 계속 그들의 곁에 있어 줄 수도 없었고.
그렇게 말문이 막힌 선원들을 바라보며 정성국은 다시 다그쳤다.
"말해보게. 저들을 조선으로 데리고 갈 생각인가? 정말로?"
""아닙니다.""
선원들이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흔들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러니 저들을 책임지려면 자네들이 이곳에 남아야겠지. 잘 되었네. 이곳에 남아서 저들과 가정을 이루게."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쫙 벌리고 있는 선원들 가운데 한 명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예에? 허면...? 이곳에서 저희끼리 살아가란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그런 선원들의 반응에 피식 웃은 정성국은 바로 대답했다.
"누가 자네들을 이곳에 버리겠다던가? 지금은 돌아가겠지만, 다시 이곳에 올걸세. 꾸준히 배를 보낼 거라고. 알겠는가? 그동안 저들과 부대껴 살면서 일단 말이라도 확실히 배워두게. 알았나?"
정성국의 확언에 안심이 된 선원들은 표정이 밝아지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대방 어르신.""
그때 뒤쪽의 티피에서 원주민 여성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원주민 여성들을 보고 선원들이 정성국의 눈치를 보면서 부리나케 다가가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나왔소? 임자."
"거 바람이 쌀쌀한데 계속 안에 있지."
그런 선원들의 행동에 원주민 여성들은 분위기가 괜찮다고 여겼는지 미소를 지었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정이 통해서인지 왠지 모를 핑크빛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아 정성국은 질색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정성국은 원주민 여성들을 살펴보고 깨달았다.
"어라? 설마...?"
뒤쪽에서 서 있던 김봉길이 정성국의 추측을 확인해줬다.
"예. 원주민들과 교역한 물건 중에 비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놈들은 고급 비누를 챙겨서 저들에게 선물로 준 모양이더군요."
"아...그래서...끙."
이상하다 싶었던 정성국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술 김에 사고쳤다기 보단 그냥 술김에 고백한 느낌인데? 이거 너무 오래 머물렀나. 쩝.'
* * *
대부분 선원들이 모두 배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정성국이 이곳에 남게 되는 선원들을 바라보고 당부했다.
"이들과 잘 지내게. 그리고 열심히 저들의 말을 배우도록 하고. 알겠나?"
""예. 대방 어르신.""
"그리고 내려 둔 종자들은 모두 심도록 하게. 설마 농사일에 젬병은 아니겠지?"
정성국의 말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선원들이었다.
비록 이들이 개척촌에 와서 뱃사람이 되었다고 한들 태생은 농사꾼 출신들이었으니 당연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방 어르신. 비록 뱃사람이 되었다 한들 어렸을 때 농사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선원들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교를 계속했다.
"그래. 적당히 야영지 주변을 개간하게. 남는 시간에 자네들이 머물 제대로 된 집도 짓고. 아. 위생은 철저하게 신경 쓰고. 알겠지?"
""예. 대방 어르신.""
"그리고 자네. 가까이 오게."
정성국은 왼쪽에 서 있던 한 젊은 선원을 손짓해 불렀다.
선원이 가까이 오자 정성국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종삼아. 우두 접종할 줄 알지?"
"예. 대방 어르신."
김종삼은 그가 어렸을 때 먹을 것으로 꾀어서 글을 가리켰던 인물이었다.
해서 옛 생각에 말을 편하게 하는 정성국이었다.
"일단 너네들 짝부터 우두 접종을 하고 그 후에 말이 좀 통하면 이곳에 방문하는 원주민들에게 접종해라."
"알겠습니다. 헌데 선장님께 받은 우두로는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모두 접종하기엔 불가능한데 혹시 이곳엔 소가 없습니까?"
김종삼의 질문에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아메리카 대륙에는 인력을 대신할 만한 동물이 없었고 그게 가장 문제였다.
덕분에 사람을 옮기기도 벅찬데 말과 소까지 옮겨야 하는 만큼 답답하기도 했고.
'버팔로가 좀 순하면 좋을 것을...쯧.'
"없어. 우두는 개척촌에서 가져와야겠지. 아무튼 일단 할 수 있는데 까지만 해둬."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그래. 믿는다."
"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 김종삼이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타박하는 정성국이었다.
"쯧. 웃기는...짝이 생기니 좋디?"
"헤헤헤."
"에잉."
행복한 미소를 짓는 김종삼을 보면서 괜히 짜증을 내는 정성국이었다.
* * *
"출항 준비는 다 끝난 건가?"
"예. 대방 어르신."
"그런가."
갑판에서 선착장 주변에 마중 나온 이곳에 남게 될 선원 6명과 원주민을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은 뒤편에 시립 해있던 김봉길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럼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
"예. 대방 어르신."
고개를 끄덕인 김봉길은 뒤로 돌아 선원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자! 출항이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자!"
""와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