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선원들이 열심히 함선에서 원주민과 교역할 물건을 내려놓았다.
일단 맛보기로 여러 물품을 적당히 가져오자 원주민들은 처음 보는 물건들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얼핏 보기에도 원주민들의 눈이 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나마 남쪽의 왜인들과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했던 아이누들과는 달리 이들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기술 수준이 무척이나 낮았다.
흑요석으로 만든 도끼나 창 촉을 쓰고 있었으니.
그런 그들에게 날카로운 철제 무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허...이들이 원주민 중에서도 꽤 고립됐었단 소리는 들었는데...그래도 석기 수준일 줄은 몰랐네. 100년 전쯤에 스페인 탐사대가 캘리포니아에 들어왔을 때는 별 교류가 없었나 보네?'
정성국이 그런 원주민들의 반응에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뒤에서 김봉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륙의 원주민들은 다 저렇게 돌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이곳은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거기에 풍요로운 지역이라 굳이 외부와 교류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기술 수준이 낮은 것 같네."
"어? 그렇습니까? 허면 다른 곳의 원주민들은 어느 정도입니까?"
정성국의 답변에 호기심이 든 김봉길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답해줬다.
"내가 듣기론 저 동부의 원주민들은 대장간에서 화승총도 뚝딱 만들어낸다더군."
눈앞에서 돌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의 기술 수준을 경시했던 김봉길 선장은 정성국의 답변에 무척이나 놀라 했다.
"으잉? 화승총을...요?"
"그렇다네. 뭐 자체적으로 그 정도까지 발전했다기보다는...그들이 남만인들과 교류한지도 시일이 꽤 흘렀으니까 말일세. 다만 화약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들었고."
북미 동부 해안에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십 년이 흘렀는데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영향을 받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처음 유럽인들에게 화승총을 구매해 사용하던 원주민들이 이제는 그들의 대장간에서 화승총을 복제해 사용한다고 정성국은 알고 있었다.
문제라면 화약은 복제하지 못해 결국 유럽인들에게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군요. 흠."
"저들은 농경 생활이 아닌 수렵, 채집 생활을 했기에 기술 발달이 조금 낙후됐을 뿐이네. 결코 멍청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아."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그럼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저들도 결국 내어줄 것은 가죽밖에 없겠군요."
"뭐...그건 어쩔 수 없지."
정성국은 쓴웃음을 짓다 주제를 돌렸다.
"일단 탐사대는 조직했나?"
"예. 헌데 어느 방향을 탐사해야 할지?"
"배를 타고 만 안쪽을 탐사하게나. 입구를 기준으로 북쪽을 말일세."
처음 정성국이 정착지의 위치로 생각했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였지만 스페인과 마찰을 미루기 위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정착지를 새우기로 결정을 내렸다.
처음엔 아예 샌프란시스코만 남쪽에 산호세 지역을 고려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전염병에 취약한 원주민과 이주민을 바로 붙여놓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해서 첫 정착지는 샌프란시스코 북동쪽에 위치한 리치먼드 지역 근처에 세울 생각이었다.
훗날 이주민을 생각하면 이곳에 선착장을 건설하고 조선에서 온 이주민들이 오랜 항해로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그곳에서 지친 몸을 회복한 후에 물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새크라멘토강을 따라 중앙평원까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으니.
후에 이 새크라멘토강 유역을 따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기에 첫 정착지와 선착장을 만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만 안쪽에 위치한 리치먼드 지역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위치가 베스트긴 하지만...후에 개발하면 되겠지.'
정성국의 말에 잠시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린 김봉길은 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 * *
"허어...이곳은...대체..."
작은 배 위에 올라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말을 더듬는 김봉길이었다.
정성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허어.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이렇게 농사짓기 좋은 지역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단 소리지? 역시 이곳을 선택한 게 정답이었어.'
요 며칠 동안 새로 탐사한 지역에 지급 함선을 끌고 정박해 근처에 커다란 야영지도 만들고 선착장도 만든 후 살짝 한가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정성국이 김봉길을 불러 갈 곳이 있다며 작은 배를 준비하라고 했다.
김봉길은 갑작스러운 정성국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쉬고 있던 선원들 몇몇을 불러 작은 배에 올라타 정성국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숲과 산맥이 우거진 만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강이 보였고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한참.
마침내 산맥 너머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넓은 평야가 펼쳐지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김봉길과 선원들이었다.
"정말 광활하군요. 처음엔 이렇게 먼 곳에 정착하겠다는 대방 어르신의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이런 곳이 있는데 가깝다고 한들 추운 북쪽으로 갈 이유가 없죠. 이런 곳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다면..."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에 농사를 짓는 것을 상상하자 말문이 막히는지 말을 흐리는 김봉길이었다.
"뭐 쉽지는 않을걸세. 기후가 조선과는 조금 다르거든."
"그렇습니까? 하지만 땅도 비옥해 보이고 끝이 안 보일 정도의 평야이니 무엇을 심든 간에 굶어 죽을 일은 없어 보입니다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이었다.
이곳 중앙평원은 비옥한 땅이었고 이 땅을 관통하는 수량이 풍부한 새크라멘토강을 비롯한 여러 지류가 널리 퍼져 있었기에 농사짓기에는 충분히 좋은 땅이었다.
거기에 조선 사람들의 쌀농사에 대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으니 이곳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농사를 성공시킬 거라고 기대하고 있기도 했고.
"그렇기야 하지. 그리고 뭐...이 땅 전체도 아니고 강을 따라 적당히 개간해 농사만 지어도 배불리 먹고 살 걸세."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참...제 친구들에게 미리 말해둬야겠군요."
"무엇을 말인가?"
"이곳에서 농사짓는다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이곳으로 오라고 설득을 해야겠습니다."
"흐음..."
김봉길은 농사짓던 자신의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이주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정성국의 신음이 들려와 평야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렸다.
"어...안됩니까?"
김봉길뿐만 아니라 작은 배에서 노를 젓고 있던 선원들의 관심이 쏠린 것을 확인한 정성국은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안 될 거야 없지. 이주민을 모집할 생각이니 말일세. 하지만 잘못해서 말이 퍼지기라도 하면..."
"아.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친구들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이미 개척촌에 들어온 녀석들입니다. 다만 농사짓다가 벌목하는 일에 조금은 힘겨워했었던지라..."
"아. 그런가? 개척촌의 사람이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지."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쪽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선원들이 묻기 시작했다.
"저...대방 어르신."
"왜 그러는가?"
"혹시 이곳의 이주민을 어떻게 선발하실 겁니까?"
그 질문에 정성국은 선원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왜? 이 땅이 탐나나 보군?"
"이 비옥한 땅을 보고 탐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는 선원과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선원들을 보면서 정성국은 아직 결정한 것이 없었기에 솔직히 이야기했다.
"솔직히 조금 고민이네. 이미 농사일에 손 뗀 개척촌의 사람들을 이주시켜야 하는 건가. 아니면 농사를 짓다 살기 위해 도망친 유민들을 먼저 이곳에 정착시켜야 하나."
그 말에 선원들이 비옥한 평야를 보고 아쉽다는 듯 말했다.
"물론 대방 어르신이 유민들을 가엽게 여기시는 것은 잘 알겠지만...일단 저희 가족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런 선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정성국은 내심 이주민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소문이 함부로 퍼지는 것을 더 경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네. 무슨 뜻인지는.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 땅의 주인은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일세. 일단 이들과 제대로 협상을 한 후에 결정해야겠지."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이 조금은 회의적이라는 듯 말했다.
"원주민과의 협상이라...가능하시겠습니까? 말이 안 통하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지. 쩝..."
정성국으로서는 확실히 그게 문제긴 했다.
아니. 원주민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히려 둘째 문제였다.
원주민과의 협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토지에 관한 개념의 문제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있어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후에 동부에서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마찰이 생긴 것이고 말이다.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토지거래로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맨해튼의 이야기이다.
맨해튼에 도착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원주민들이 고작 24달러어치 상당의 장신구에 맨해튼을 팔아넘겼다는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원주민들은 선물을 받고 그 땅에서 살아도 된다고 허락했을 뿐이지 그 땅의 소유를 넘긴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농경 생활보다는 수렵 생활을 주로 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이란 개념은 희박하기도 했고.
덕분에 토지거래 계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이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들에게 토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공통의 자산이었지 개인이 사고판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어떻게 당신들은 하늘과 땅을 사고 팔수 있는 것인가. 그 생각이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이 땅이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 쓴 스쿼미시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확실히 이들을 포용하려면 이 부분을 잘 해결해야 하는데...잘못했다간 미국 꼴이 날 테니 이거야 원.'
훗날 미국과 인디언들의 다툼은 이 토지 때문에 발생했다.
미국인들은 추장과 토지거래 계약을 체결했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정당한 계약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애초에 추장은 그런 계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었다.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사인했을 뿐.
덕분에 인디언들은 반발했고 미국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사기를 친 거냐며 화를 내고 이런저런 법을 만들어 원주민들을 황무지로 내쫓고 결국 몰살시켰고.
그런 흐름을 대충 기억하고 있던 정성국으로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 고민이 컸다.
그렇게 정성국은 뱃머리에서 눈앞에 비옥한 평야를 보면서도 인상을 피지 못했다.
그러기를 한참.
정성국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김봉길은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대방 어르신."
"음? 왜 그러나?"
"계속 강을 거슬러 올라갈까요? 워낙 넓어서 계속 올라가실 생각이라면 도중에 쉴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아닐세. 이 정도면 충분하지 싶네. 이곳을 제대로 탐사하고 싶어도 말이 없으니 걸어서는 한세월이 걸릴 듯싶고. 이만 돌아가세나."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의 말에 곧장 선원들이 노를 저어 강에서 방향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정성국은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나올 장소를 생각했다.
'뭐 금광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굳이 지금 그곳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겠지. 괜히 소문이 퍼지는 게 더 골치 아파. 금광 개발은 나중에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