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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9화 (19/850)

19화

정성국의 망원경을 통해 바라본 곳은 샌프란시스코만 남쪽이었는데 그곳에는 바다 위에 무언가가 떠 있었다.

'조각배? 아니지. 저건 카누...에 가깝네. 저쪽에 원주민의 마을이 있나 본데?'

기껏해야 통나무 안을 파 만든 배로 보였고 그 배에 원주민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배를 돌릴까? 아니다. 일단 자리를 잡고 먼저 씻는 게 우선이지. 위치는 알았으니 저들과의 접촉은 나중에 하자.'

다만 저 카누에 타고 있는 원주민들은 이방인의 출현을 파악했을텐데 어떤 반응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정성국이었다.

'부디 적대적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오! 저기 강이 보인다!"

"정말이네. 으아. 얼마 만에 제대로 씻는 거냐."

오랜만의 상륙에 활기가 도는 선원들이었고 정성국은 뒤에 있던 김봉길 선장에게 다시 한번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일단 내리자마자 모두 철저하게 씻기도록 하게. 그리고 새 옷을 입히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특히나 위생을 신경 쓰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알겠네."

정성국이 이렇게 위생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곳 캘리포니아에 사는 원주민들은 고립되어 있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지역에 사는 원주민은 10~30만 명 수준으로 짐작되는데 이들은 풍요로운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다른 지역과의 교류 없이 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지역은 커다란 분지와 같은 형태로 주변이 산맥, 사막, 바다 등으로 막혀 있었기에 이들은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아왔다.

덕분에 유전적 동일성이 높았고 거기에 이곳엔 말, 돼지 같은 동물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면역력이 잘 갖춰지지 못해 전염병에 무척이나 취약했고.

훗날 스페인이나 러시아와 접촉하면서 이러한 전염병으로 인해 원주민의 수가 급감한다는 것을 아는 정성국으로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원주민을 훗날 끌어들일 생각을 하기도 했고, 전생의 스페인 신부와 접촉하면서 원주민에게 전염병이 퍼져 원주민들은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을 저주한다고 믿고 공격했던 사례도 있었던 만큼 무엇보다 위생을 철저히 챙겼다.

* * *

"대방 어르신."

김봉길이 정성국이 머물던 천막에 깨끗한 모습으로 들어서자 정성국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왔는가. 호. 자네도 씻으니 훤칠 하구만? 수염도 짧게 깎으면 더 남자답겠어."

정성국이 깔끔해진 김봉길의 얼굴을 보고 전생에서 짧은 수염을 한 중년 배우가 생각나 무심코 이야기 했다.

"에이. 대방 어르신도. 어찌 수염을 짧게 깍을 수 있겠습니까."

"어울릴 것 같은데..."

김봉길은 정성국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해 크게 웃은 후 이곳에 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하하하. 참. 강 상류에서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마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가득하던 정성국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도 마을이 있다고? 이거 의외로 샌프란시스코만에 원주민들이 좀 있나 본데?'

"그래? 접촉한 건가?"

"아닙니다. 식수를 뜨기 위해 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던 선원들이 먼발치서 원주민과 마을을 봤다고 하더군요."

"그래? 거리는?"

"한 식경 정도 가면 나온다고 합니다."

정성국은 급히 천막의 입구를 걷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해가 어느덧 서쪽으로 내려앉았기에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흠...애매하긴 한데...일단 해가 지기 전에 바로 접촉해보도록 하지."

그런 정성국의 명령에 김봉길은 의외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오늘은 쉬실 줄 알았습니다만."

"나도 그러려고 했지만, 꽤 가까이 원주민의 마을이 있는데 그럴 수야 있나. 선원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저녁에 불을 피우면 멀리서도 보일 테고 그러다 저들이 알게 되면..."

정성국이 말을 흐렸지만, 김봉길은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더 곤란해질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경비대원들을 차출하지요."

"그래. 나는 그들과 원주민의 마을로 갈 테니 자네들은 일단 야영지를 구축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이곳은 믿고 다녀오십시오."

"그러지."

김봉길이 급히 천막에서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정성국은 원주민과 만날 때마다 항상 챙겼던 단총 두 자루가 들어있는 권총집을 챙겨 허리에 매면서 천막을 나왔다.

* * *

강가를 따라 올라가던 일행을 선두였던 경비대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빼서 앞을 바라보았고 정성국은 허리춤에서 바로 망원경을 꺼내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의외로 아메리카 원주민 하면 떠오르는 티피라던가, 롱하우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움막집에 가깝네.'

다만 망원경으로 원주민들을 살펴보자 그가 생각하던 인디언의 차림새를 하고 있는 원주민을 보면서 묘한 감흥이 일었다.

'진짜 인디언이네. 복식은 조금 달라도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네. 이러면 훗날 조선인들도 이들을 보며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할 거야.'

"호오. 그렇군. 원주민들의 마을이야."

곧 선두에 있던 경비대원들이 익숙하게 떡과 술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챙겼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그래. 조심하게. 뭐 자네들도 경험이 많으니 다른 말은 안 하겠네."

"그럼요. 이제 전문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그럼. 저 역관들보다 자네들이 더 믿음직해. 다만 너무 긴장을 풀지 말게."

경비대원의 너스레에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당부하는 정성국이었다.

"예."

대답과 함께 마을로 이동하는 경비대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부디 잘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첫 교류인 만큼 제발 잘 풀렸으면...'

* * *

처음엔 마을까지 찾아온 낯선 이방인을 보고 살짝 경계하던 원주민들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몸짓으로 의사소통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경비대원들은 능숙하게 자신들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동시에 들고 왔던 떡과 술은 원주민들이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이었기에 곧 경계를 풀고 몰려와서 떡을 한 손에 들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이 캘리포니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농경보다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왔기에, 그리고 북미에는 쌀이 없었기에 떡을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거기에 술까지.

북미의 원주민들은 곡물을 재배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술도 없었다.

그런 만큼 처음 술을 맛보고 화끈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에 놀라던 원주민들도 곧 술에 취해 해롱대기 시작했다.

'허. 확실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술이 없어서 그런지 쉽게 취하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위해 술을 대량으로 풀어 알콜 중독자로 만들었다더니만...저 꼴을 보니 술은 좀 적당히 규제해야 겠구나.'

멀리서 망원경으로 원주민들을 살피던 정성국은 원주민들의 반응을 보고 술은 어느 정도 통제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적당히 술을 즐기면 상관없는데 잘못하다 소중한 일꾼이 알콜 중독자가 되는 꼴을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정성국이었기에.

그렇게 분위기가 좋아질 무렵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닫고 원주민들의 마을에 있던 경비대원들은 한숨 자고 다음 날 오겠다는 제스쳐를 취한 후 마을을 빠져나왔다.

원주민들도 그런 경비대원들을 딱히 막지 않고 오히려 마을 근처까지 배웅해주었다.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을 따라와 감시했던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원주민들의 반응을 배웅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가까이 다가온 경비대원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잘했네. 잘했어. 이제 능숙하게 저들을 상대하는군?"

"하하하. 꽤 많은 원주민을 상대했으니까요. 다만 좀 아쉽네요. 이 기회에 저들을 야영지까지 데리고 와서 이런저런 물품도 보여주고 하면 딱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뭐 내일 다시 떡과 술을 좀 먹이면 되겠지. 더 늦기 전에 야영지로 돌아가세."

"예. 대방 어르신."

* * *

오랜만에 상륙한 육지에서 늦게까지 잠을 잤던 정성국이 일어났을 때, 야영지가 은근히 소란스러웠다.

해서 정성국이 바로 천막 안에서 야영지로 나서자 야영지에 방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보였다.

"허. 아침부터 몰려온 건가?"

정성국의 혼잣말에 근처에 있던 경비대원이 다가가 대답했다.

"예. 대방 어르신. 어제 저들에게 준 떡 때문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거기에 저곳을 보십시오."

정성국은 경비대원이 가리키는 지급 함선이 있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급 함선뿐만 아니라 근처에 여러 조그마한 카누가 곳곳에 떠 있었다.

웬일로 야영지에 김봉길 선장이 없다 했더니 지급 함선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음? 허...저들은 또 언제 온 건가."

"저들도 새벽부터 열심히 노를 저어 이곳으로 오더군요. 아마 지급 함선이 워낙 크다 보니 저희가 온 것을 확인하고 구경하러 온 듯싶습니다."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어제 망원경으로 보았던 샌프란시스코만을 돌아다니던 카누를 떠올렸다.

'어제 샌프란시스코만 입구로 들어왔을 때 봤었던 원주민들인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살던 원주민?'

"그래? 딱히 적대적이진 않던가?"

"예. 어제 접촉했던 원주민들이 먼저 야영지에 와 있었던지라 해안가 가까이 와서 그들과 몇 마디 나눈 후에는 저렇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저들도 불러 아침부터 대접하게. 그리고 원주민들과 교역할 물건들을 꺼내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선장님께 전하겠습니다."

정성국의 말에 경비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급 함선이 정박되어 있는 해안가로 달려갔다.

해안가에는 지급 함선에서 물건을 싣고 해안가로 이동하는 작은 배들이 여럿 보였다.

'차라리 나무로 대충 선착장이라도 만드는 게 빠르려나. 아니야. 이왕 만드는 거 제대로 위치를 잡고 그곳에 선착장을 만들어야지. 아니면 일을 두 번 하는 셈이니. 일단 오늘은 쉬면서 저들과 교류를 하고 내일부터는 샌프란시스코만을 샅샅이 탐사해야겠어.'

그렇게 정성국이 해안가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정착지의 위치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며 몹시 허기지기 시작해 생각을 멈추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야영지 한가운데에서 선원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양을 보아하니 밥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아침이라 죽을 한 듯싶었다.

다만 참기름을 넣었는지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고 이런 냄새를 처음 맡아본 원주민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그런 원주민들에게도 아침 식사로 만든 고기 죽을 건네주었다.

처음 보는 음식에 고개를 갸웃하던 원주민들은 눈치껏 다른 선원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 먹기 시작했다.

대충 쌀을 볶고 거기에 약간의 우거지와 훈제했던 딱딱한 고기를 왕창 넣고 푹 끓인 고기 죽이었지만 간을 잘 맞춰서 그런지 선원들로서는 충분히 먹을 만했다.

다만 원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 살짝 긴장했던 선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원들의 긴장이 무색하게 의외로 원주민들의 입맛에도 잘 맞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순식간에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빈 그릇을 박박 긁어먹은 원주민들이 선원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선원들은 피식 웃으면서 다시 와서 받아가라고 손짓하자 원주민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배식하던 선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풍경을 보면서 정성국은 생각했다.

'역시...먹을거로 꼬드기는 게 최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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