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어우. 이게 대체 며칠째야?"
"거의 한 달 가까이 된 것 같은데?"
"간간이 섬을 봤을 때는 몰랐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오로지 바다만 보이니 지겹다. 지겨워."
"지겹기는. 뱃사람이 바다를 지겨워 하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바람이 도와줘서 쭉쭉 나아가니 오히려 속 시원하지 않나?"
"뭐 그렇기야 한데...그럼에도 끝이 안 보이니 정말 이곳 바다는 넓구만."
"대방 어르신이 그러지 않았는가. 이 바다 이름이 태평양이라고. 괜히 그런 이름을 붙였겠는가."
"그러게 말일세. 헌데 슬슬 육지가 보일 거라고 하지 않았나? 언제쯤 보이려나."
"그러게. 어이! 혹시 뭐 보이는 것 없어?"
갑판 위에서 떠들던 선원들이 마스트 위에 올라가 있는 견시수에게 소리쳤다.
"아직 안 보여요!"
"쳇. 아직 덜 왔나 본데? 뭐 오늘이나 내일 중에 육지가 보일 거라고 했으니 일단 일이나 하세,"
"그럴까?"
견시수의 대답에 기대가 꺾인 선원들은 시무룩해져서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때 견시수가 망원경으로 뚫어지게 한 곳을 쳐다보면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어?!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견시수의 외침에 자리를 뜨던 선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진짜?"
"정말?"
"참말이고?"
그런 선원들의 반응에 견시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갑판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럼요! 저 앞에 육지가 보여요!"
견시수의 확인에 갑판 위에 올라와 있던 선원들의 얼굴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어휴. 드디어 육지를 밟아보겠네."
"으. 배에만 있으려니 영 근질거려서. 빨리 상륙했으면 좋겠다."
"그러게 말이여. 거기에 씻은 지도 오래돼서 영 찝찝해."
"나도 그래. 예전엔 어찌 그리 안 씻고 살았는지 모르겄어."
"킬킬킬. 그러게 말여."
선원들은 곧 상륙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동시에 몇몇 선원들은 곧장 선실로 뛰어 내려가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곧 선실 안에 있던 정성국도 소식을 듣고 급히 선실을 나와 선장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그래. 육지를 발견했다고?"
"예. 정확히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만 제 계산으로 지금 발견한 육지는 바로 이곳으로 파악됩니다."
김봉길 선장이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서쪽으로 50k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김봉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감회가 새로운 정성국이었다.
"후우. 드디어...참 긴 항해였어."
"그러게 말입니다. 대방 어르신."
"정말 고생했네. 선장."
그러자 김봉길은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전에 정성국이 말해준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용기에 감탄을 표했다.
"아닙니다. 지도가 있는데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오히려 대방 어르신이 말해주셨던 그 남만인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지도도 없이 저 광활한 태평양을 건넜다는 그 남만인들 말입니다."
"그렇기야 하지."
그저 지구가 둥근 만큼 서쪽으로 이동하면 인도에 도착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태평양을 횡단했던 마젤란을 떠올리며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혹시 이곳에 바로 상륙할 예정인가?"
"흠...목적지가 가까운 만큼 아예 바로 목적지까지 이동할 생각입니다만...어떠십니까?"
"나야 그러면 오히려 좋지. 그럼 그러도록 하게. 나는 이만 갑판으로 나가서 곧 정착할 땅을 살펴봐야겠네."
"하하하. 그러시지요."
* * *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의 이름은 1510년 스페인의 기사 문학 장르에서 나온 허구의 칼라피아 여왕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칼라피아 여왕의 왕국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금과 진주가 넘쳐나는 환상의 섬으로 묘사되는데 스페인인들은 이 지역을 바로 소설에서 나오는 환상의 섬이라고 생각해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캘리포니아 지역을 소설에서 나오는 환상의 섬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페인인들은 꽤 오랫동안 캘리포니아 지역을 섬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지역 바로 밑에 길쭉하게 아래로 뻗은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가 존재한다.
이 반도와 멕시코 지역 사이에 바다가 존재하는데 이 바다가 바로 코르테스해였고.
스페인인들은 이 코르테스해가 북미와 캘리포니아를 갈라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캘리포니아는 북미 서해안을 감싸고 있는 가장 가깝고도 기다란 섬이었다.
또한, 다른 스페인 탐사대가 캘리포니아 서해안을 탐사하며 북진했고 끝내 밴쿠버 지역까지 탐사하게 된다.
그들은 시애틀 지역의 퓨젓 사운드(Puget Sound)만을 보고 그 물길이 코르테스해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탐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돌아가 캘리포니아 지역은 섬이라고 다시 한번 보고했고 결국 캘리포니아는 섬으로 알려졌다.
무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페인인들이 이곳을 캘리포니아라고 부른 것은 이곳에 그들이 생각하는 엘도라도가 있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탐사 결과 그들이 그토록 찾던 엘도라도는 없었고 이 섬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판단해 본국에 보고서를 올리고 그 후 캘리포니아 지역은 234년간 방치된다.
'지금쯤은 아마 명목상으로는 스페인의 땅이라고 알려져 있긴 할 텐데. 그 해적 양반 때문에...쩝.'
1579년 잉글랜드의 그 유명한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대서양에서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에 진출한다.
남미 서해안을 타고 북진하면서 스페인의 식민지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런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활동에 스페인은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나중에 캘리포니아를 탐사해서 영국의 땅으로 선언한다면?
그래서 저들이 태평양에서 활동할 거점이 생겨난다면?
그러한 공포심에 1602년 스페인은 다시 탐사대를 보내 캘리포니아의 해안선을 따라가며 열심히 이름만 짓고 캘리포니아를 식민화시켰다고 보고했다.
그런 만큼 정성국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면 스페인과 한번은 맞붙을 수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잘만 하면 당장 싸우지는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결국, 답은 샌프란시스코만 깊숙이 들어가 개척촌을 세우는 것인가.'
200년 넘게 방치되던 캘리포니아는 북미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여러 유럽 왕국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북미를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개척이 시작된다.
1697년 초에 캘리포니아 지역 밑에 있는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에 선교사와 개척자들이 정착지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1769년에 이르러서야 캘리포니아주의 맨 밑에 있는 샌디에이고에 도달한다.
또한, 이 1769년에야 비로소 샌프란시스코만을 발견하게 되고.
즉, 샌프란시스코만을 발견하고 스페인의 탐사대가 만 안으로 들어오려면 100년은 더 걸린다는 이야기다.
그 전까지는 샌프란시스코만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런 만큼 샌프란시스코만 깊숙이 항구를 세우고 개척을 시작한다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당분간 스페인에 발각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재수 없게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나오다 마닐라 갤리온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뭐 마주치면 따라가서 격침 시켜도 되고. 놓친다 해도 크게 상관없지.'
정성국은 스페인을 생각하면서 꽤 자신만만했다.
예전의 스페인 제국은 분명 강력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제국의 최전성기의 통치자였던 필리페 2세가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스페인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패배 끝에 스페인 제국의 힘은 빠지기 시작했고.
필리페 3세의 치세부터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현 국왕인 필리페 4세 역시 좋은 군주는 아니었고.
필리페 4세의 통치 기간에 네덜란드가 독립하고, 동군연합이었던 포르투갈이 브리간사 공작을 왕으로 추대해 독립하며,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현재 스페인 제국은 그렇게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이곳에 개척촌을 만들고 스페인이 발견한다 해도 과연 스페인 제국 본토에서 이곳 북미 서해안까지 군사를 보내는 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고.
기껏해야 부왕령에서 군사를 보내긴 할 텐데 그래 봐야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관리하기에도 벅찰 텐데.
'지금이 북미 서해안에 정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야. 거기에 스페인은 아직 북미를 방치하고 있고. 기껏해야 본국과의 무역을 위해 플로리다반도 정도만 개척하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물론 우리가 정착하게 된다면 역사는 바뀌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스페인이 북미 땅을 개척할 여력이 있을까 싶네.'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갑판 위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던 정성국이었다.
'저건?'
정성국은 허리춤에서 망원경을 꺼내 눈에 가져다 대고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진짜 여기까지 해달이 있었구나...하긴. 저 밑에 산타바바라 해안까지 서식했다고 하니...'
한참을 홀린 듯 망원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해달을 관찰하던 정성국은 배의 속도가 줄어들었음을 깨닫고 주변을 살펴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여기가 바로!"
왼쪽에 보이는 산맥과 오른쪽에 보이는 산과 그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숲 사이로 얼핏 보면 거대한 강의 입구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만의 입구의 풍경을 보면서 옛 기억이 떠올라 탄식을 내뱉는 정성국이었다.
마치 그의 두 눈에는 양편을 잇는 오랜지색의 금문교가 보이는 듯했다.
'여기가 바로 금문교가 위치했던 장소구나. 하긴 멀리서 보면 그냥 강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겠군. 이러니 스페인이 멀리서 해안가를 따라 탐사했을 때는 샌프란시스코만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거겠지. 이거 진짜 스페인 몰래 정착지를 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네.'
그러면서 정성국은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려 나무가 우거진 땅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산과 숲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빌딩이 넘쳐나던 옛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오버랩 되었다.
'와...저걸 다 밀어버리고 만든 거였구나. 근데 이러면 정착 위치를 좀 바꿔야겠는데?'
정성국이 바라본 옛 샌프란시스코가 존재했던 땅은 중간중간 작은 산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평지로 보였다.
그렇기에 샌프란시스코가 있던 자리에 항구를 만들고 배를 정박시킨다면 일 년에 한두 번 이곳을 지나치는 마닐라 갤리온에 들킬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뭐 솔직히 스페인이 무서울 것은 없는데...아무래도 귀찮기는 해. 그럼 일단 샌프란시스코의 위치에 개척촌을 만드는 것을 보류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북쪽? 남쪽?'
그때 뒤에서 김봉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방 어르신."
"음? 자넨가? 왜?"
"일단 천천히 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탐사할 생각입니다만...꽤 오랫동안 땅을 밟지 않았으니 일단 저곳에 상륙할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아...으음."
김봉길이 가리킨 곳이 바로 옛 샌프란시스코가 있던 지역이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사정을 이야기해줬다.
"아. 대방 어르신 말씀대로 굳이 이곳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겠지요. 허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야겠군요?"
"그러면 좋겠지.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산맥으로 둘러싸여 바깥쪽에선 보이지 않을걸세."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이곳 샌프란시스코만이 그려져 있던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대략적인 방향을 묻기 시작했다.
"흐음...허면 어디로 이동할까요? 이 만이 남북으로 꽤 기다란 모양 아닙니까."
김봉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한 달 가까이 배에서만 지내야 했던 선원들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왼편에 있던 산맥이라면 충분히 배를 가려줄 수 있다고 판단해 방향을 정했다.
"일단 당장 상륙할 곳이 필요한 만큼 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게. 이곳에도 조그마한 만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일단 샌프란시스코만 깊숙이 들어가는 것보다는 샌프란시스코 맞은편에 있는 리처드슨만으로 들어가 상륙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자리 좀 잡고 나서 천천히 이곳을 탐사하자.'
그때 정성국의 망원경에 무언가가 보였다.
'어라?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