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베링해.
서쪽의 시베리아와 동쪽의 알래스카, 그리고 남쪽의 알류샨 열도로 둘러싸여 있는 바다.
전생에 극한직업으로 유명했던 대개잡이 어선이 겨울에 그물을 던지는 곳이 바로 베링해였고 그 바다의 악명을 알았기에 정성국은 내심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여름의 베링해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이건 정말 예상외네. 같은 베링해인데 계절에 따라 이렇게 다를 줄은.'
정성국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기에 쭉쭉 동쪽으로 나아갔다.
평온한 바다와는 달리 기온은 북쪽이라 그런지 확실히 8월인데도 불구하고 꽤 쌀쌀했다.
여기서 더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 악명높은 겨울의 베링해를 직접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류샨 열도의 여러 섬의 탐사를 최소화하며 무조건 동쪽으로 쭉쭉 나아갔다.
이곳 알류샨 열도의 원주민은 알류트족으로 이들은 에스키모 계 민족이었기에 열심히 통역하며 밥값을 하던 투로시노와 일행들도 다시 실업자가 되어버렸기에 교류보단 빠른 이동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게 카무이 반도(캄차카반도)를 떠난 지 20일 만에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땅과 만년설이 가득한 커다란 산을 보면서 정성국은 감격했다.
'드디어...도착이구나. 이곳부터가 바로 그 아메리카란 말이지?'
정성국의 눈앞에 보이는 이 땅은 알류샨 열도의 끝부분에 위치한 알래스카반도 끝자락이었다.
"대방 어르신. 저곳이..."
"그래. 바로 북미 대륙의 끝자락이지."
알래스카 지역은 1741년에 베링이 발견해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받고 1784년에야 비로소 코디액섬에 러시아의 정착지가 세워진다.
그리고 무제한으로 알류트 인을 비롯한 여러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바다사자, 해달, 밍크 등을 사냥해 모피를 획득했고.
과도한 밀렵으로 동물들의 개체 수가 감소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점점 남하해 캘리포니아까지 남하하게 된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에 로스 요새까지 건설하기도 했고.
하지만 본토와의 거리가 너무 멀고 미국, 영국의 견제로 인해 수익이 떨어져 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1867년에 미국에 720만 달러를 받고 팔아버리는 알래스카.
그 땅이 바로 정성국의 눈앞에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아직 항해는 끝이 아닐세."
"아. 그렇지요. 허면 앞으로의 항로는 어떻게 할까요?"
"으음...식량 상황은 어떤가?"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잠시 선원들의 보고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이전 섬에서 식량과 식수를 충분히 보충했으니까요."
"그래? 그럼 굳이 식량이나 식수 때문에 상륙할 필요는 없다는 거군?"
"그렇기는 합니다만...?"
김봉길 선장의 대답에 잠시 갑판 위를 살피던 정성국은 이내 김봉길 선장에게 눈짓하며 뒤편의 선장실을 가리켰다.
김봉길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이내 정성국을 따라 선미에 있는 선장실로 정성국을 따라 들어갔다.
"이곳엔 왜?"
"새로운 항로를 일러주기 위해서네."
정성국은 그리 말하면서 선장실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탁자로 이동해 북미 서해안의 커다란 지도를 살펴보았다.
김봉길은 정성국의 맞은편으로 이동해 정성국의 손가락을 보며 항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애초의 계획은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항로였네."
정성국은 지도에서 현재 위치인 알래스카반도 끝부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뒤 알래스카의 해안선을 따라 커다란 반원을 그었다.
"그랬죠. 해안선을 따라 이 거대한 만에 가까운 지형을 탐사하면서 남하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이동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러면서 정성국은 다시 현재 위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그대로 동쪽으로 그었다.
현재 위치에서 알래스카 만을 가로질러 캐나다 지역의 퀸 샬럿 제도로 이동하는 항로였다.
김봉길은 정성국이 보여준 항로를 보면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 거대한 만을 가로지르는 항로군요. 헌데 왜 굳이 항로를 바꾸시려는 겁니까? 저곳엔 원주민들이 없나 보죠?"
"있긴 할걸세. 다만 음..."
김봉길이 알래스카 지역을 손으로 짚으면서 말하자 정성국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성국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할 거라는 이야기는 원상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인물들에게만 해줬다.
즉,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 지금의 항해가 새로운 개척지를 탐사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은 정성국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이들을 못 믿어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음주가무를 사랑하던 조선 사람들의 성정을 생각해보고 말을 아꼈을 뿐.
물론 이 항해도 어떻게 보면 밀무역에 가까운지라 굳게 입을 다물기야 할 테지만 밀무역과 바다 건너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은 무게감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이 친구에게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곧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에겐 솔직히 말하지. 이곳의 원주민들과 교류를 하면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을까?"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다가 이내 소신껏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기껏해야 모피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그건 아이누 섬이나 카무이 반도에 배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해 보이거든요. 다만 대방 어르신은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면서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보는 김봉길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정성국은 속 시원히 이야기했다.
"그래. 다른 뜻이 있기는 하네. 나는 새로운 개척촌을 바로 이 대륙에 건설해볼 참이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봉길은 입을 크게 벌리면서 놀라 했다.
"예에?! 이 먼 곳에 말입니까?"
그런 김봉길의 반응을 보면서 실소하던 정성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대충 알고 있지 않나. 지금도 개척촌은 한계에 가깝네. 지금이야 개척촌에서 나오는 세금이 고을 수령의 실적으로 잡히는 만큼, 그리고 거기서 꽤 많은 콩고물을 주워 먹을 수 있기에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고 있기는 하네만 더 규모를 키우면 분명 말이 나올걸세. 중앙에서도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뇌물을 먹여가며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고."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김봉길도 얼굴을 흐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허면 이 땅에 새로운 개척촌을 만들어 정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일단은 개척촌처럼 항구 도시를 만들고 조금씩 이주시켜가며 발전시키겠지만 후에는 원상 기반 대부분을 이 새로운 대륙으로 옮길걸세."
김봉길은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시선을 내려 지도를 바라보았다.
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광활한 대륙.
'이곳을 차지하겠다고? 허. 대방 어르신의 배포는 가히 천하제일이구나.'
북미 대륙의 지도를 보며 내심 흥분하던 김봉길의 시선에 조선이 들어오자 순간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꽤 자신만만해 보이는 정성국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그것을 조정 신료들이 두고 보겠습니까? 계속 이주하다 보면 분명 말이 나올 텐데요?"
김봉길의 걱정은 합당했지만, 정성국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아마도 그때쯤 되면 그럴 정신이 없을걸세."
"예?"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그에 대한 답은 듣기 어렵겠구나 싶어서 주제를 돌렸다.
자신은 이 배의 선장이니만큼 항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방 어르신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아무튼. 상황은 알겠습니다. 허면 새롭게 정착할 땅을 찾으시는 거군요? 이곳은 아무래도 북방이니 정착할 만한 곳은 아닌 만큼 그냥 건너뛰겠다는 뜻이구요?"
"그렇지."
"허면 대방 어르신이 정착지로 생각하시는 위치는 정확히 어디입니까? 이 대륙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괜찮은 곳을 발견하실 생각은 아니실 것 아닙니까?"
김봉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이내 손가락을 들어 북미 서해안에 위치한 캘리포니아주를 찍었다.
"일단은 이곳이네. 다만 이곳도 나쁘진 않아 보여서 도중에 들러볼 생각이었고."
그리고 손가락을 올려 캘리포니아주 위에 있던 시애틀과 밴쿠버를 찍었고.
정성국이 생각하는 정착지의 위치를 파악한 김봉길은 신음을 내면서 고개를 숙여 정성국이 찍어준 위치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으음..."
한참을 바라보던 김봉길은 곧 고개를 들어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대방 어르신. 차라리 그냥 이곳으로 바로 이동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김봉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바로 캘리포니아였다.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단번에 이곳으로 이동하자는 말인가?"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애틀과 밴쿠버 지역을 손으로 짚으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비록 이 지도가 정밀하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해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은 만이라고는 하나 이 안쪽까지 들어가기엔 좀 부담스러워 보이는 지형입니다. 물론 이곳에 정착하실 생각이시라면 기꺼이 시간을 들여 탐사하겠습니다만 아니라면 굳이 이곳에서 머물며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바람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바로 이동하는 것이 더 빠를 겁니다."
김봉길 선장의 의견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범선인 만큼, 그리고 해류와 바람을 생각하면 나중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이곳으로 올라오기는 절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바람과 해류를 따라 남하하기는 쉬워도 그 반대로 이동하기엔 어려웠기에 먼저 저 지역들을 탐사하려고 했었던 정성국이었다.
다만 언제나 앉아서 계획을 세웠을 때와 현장의 상황은 다른 법이다.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김봉길 선장의 의견대로 바로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그가 나름 기억나는 대로 정밀하게 지도를 그렸다고 한들 수많은 섬을 모두 표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만큼 저 지역을 탐사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봤다.
거기에 증기선이라면 모를까 바람과 해류의 영향을 받는 커다란 범선으로는 특히나.
결국, 탐사하려면 작은 배로 노를 저어가며 주변 지형을 탐사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굳이 정착할 지역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물론 밴쿠버 지역도, 시애틀 지역도 충분히 좋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고위도 지역이라는 것이 걸리는 정성국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비어있는 캘리포니아에 정착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고.
또한, 몇십 년 전에 이곳을 탐사했던 스페인의 탐사대를 떠올려보니 이곳을 패스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의 탐사대 역시 이곳까지는 올라왔지만 차마 이곳을 탐사할 엄두를 내지 못해 그냥 돌아가지 않았던가.
생각을 마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봉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흐음...알겠네. 자네의 생각이 옳군. 그럼 바로 이곳으로 항로를 잡고 이동하도록 하지."
"예. 대방 어르신."
* * *
그렇게 항로를 틀어 나아가기 시작한 배는 바람과 해류의 도움을 받아 미친 듯이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대양을 가로지른 지 25일.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