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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6화 (16/850)

16화

"저게 다 뭐야. 흐미. 징그럽구만."

"저거 족제비 아닌가?"

"수달이잖여!"

"수달? 저게?"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는 소식에 갑판에 나와 섬을 바라보던 정성국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섬 해안가를 빼곡히 메운 수많은 동물.

너무 많아 오히려 멀리서 보기엔 징그러울 정도였지만 망원경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입가가 늘어지며 미소가 절로 나오는 동물.

너무나도 귀여운 해달이었다.

"해달이 이렇게 많을 줄은..."

"해달? 저 동물이 해달입니까?"

"그렇네."

"허. 생긴 게 참 귀엽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정성국과 김봉길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해서 해달 무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렇게 많았는데 멸종 위기까지 몰리다니. 정말 러시아 놈들이 씨를 말렸구나.'

척박한 러시아의 동토에서 그나마 돈이 되는 것은 바로 모피였고 이 모피를 위해 유럽 비버를 비롯한 여러 동물을 멸종시키면서 동진하다 발견한 것이 바로 검은담비였다.

이 검은담비는 특유의 광택으로 인해 비싼 가격이 형성되었고 덕분에 이 검은담비를 모조리 사냥해 버린 러시아였다.

무자비한 사냥에 당연히 개체 수는 줄어들었고 모피를 위해 점점 동쪽으로 향하다 발견한 것이 바로 캄차카반도에 사는 해달.

이 해달의 가죽이 검은 모피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러시아인들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캄차카반도의 해달을 모조리 사냥해 모피로 만들었다.

당연히 수가 줄어들자 해달을 찾아 쿠릴 열도로, 그리고 알류샨 열도로, 그러다 알래스카로, 끝내는 캘리포니아로 향하게 되고.

그래서 저 해달들은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것을 기억한 정성국은 새삼 분노했다.

'저 귀여운 애들을 멸종시키다니! 어떻게 저걸 잡을 수가 있...긴 하지. 아니. 그래도 정도껏 잡아야지. 멸종될 정도로 잡는 건 아니야. 이건 인간적으로 막아야겠는데?'

순간 분노하던 정성국은 해달 모피의 가격을 생각하고 약간은 침착해졌다.

모피 중에 가장 비쌌던 것이 바로 해달 모피 아니겠는가.

'대충 훑어봐도 만 마리는 넘겠네. 고작 이 섬 하나에서만 이 정도로 서식할 정도면 그 전엔 꽤 많았다는 건데...이 정도면 매년 적당한 숫자만 잡아 개체 수를 유지한다면 꾸준하게 돈이 벌리긴 할 것 같은데. 어차피 오호츠크해의 유빙을 생각하면 꾸준히 교역하긴 힘들어도 1년에 한두 차례 배를 보내서 적당히 교역한다면...'

모피는 서양에서도, 그리고 북경에서도 꽤 고가에 팔리는지라 이곳을 관리하며 꾸준히 해달 모피를 판매한다면 꽤 큰돈이 될 것 같았다.

문제라면 원상이 직접 이 지역을 관리할 수는 없다는 것.

인력이 넘치는 편이 아닌 만큼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원주민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것이 만약 저 모피가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원주민들이 깨닫는다면 그들이 과도하게 사냥할 수도 있다.

마치 비버 모피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죽어라 사냥해서 유럽 모피상들에게 넘겼던 것처럼.

'결국, 아이누를 제대로 밀어주는 대신 그런 부분을 확실히 이야기해둬야겠네. 적당한 사냥으로 개체수를 유지해야 지속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만 자신들의 터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러려면 결국 저 친구들이 중요해졌는데?'

정성국은 갑판 위에서 수많은 해달을 보고 감탄하는 선원들 옆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아이누 들을 바라보았다.

배에 승선한 아이누 들은 처음엔 열심히 배를 돌아다녔지만, 곧 조장에게 붙들려 열심히 말을 배우고 있었다.

'아직은 단어를 말하는 수준이지만...어차피 이곳에 다시 오게 될 1년 후에는 어느 정도 통역으로 쓸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아이누 들을 바라보고 있던 정성국의 귀에 김봉길의 말이 들려왔다.

"어쩔까요? 저기에 상륙할까요?"

정성국은 바다 위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바다위를 둥둥 떠다니는 해달들을 바라보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렇게 많은데 몇 마리라도 잡을까? 으...'

너무나도 귀여운 해달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정성국은 이내 사냥을 포기하고 차선을 선택했다.

"크읔...아닐세. 일단 계속 이동하면서 혹시 원주민이나 마을이 보이면 배를 보내 적당히 교류하는 것으로 하세."

"알겠습니다."

* * *

그렇게 꾸준히 쿠릴 열도를 따라 북상하면서 중간중간 마을이 보일 때마다 배를 정박하고 작은 배로 그들과 접촉해 교역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에 올라타 밥만 축내던 아이누 들이 밥값을 톡톡히 해냈다.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과도 어느 정도는 말이 통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쿠릴 아이누, 캄차카 아이누라고 분류되는 같은 민족에 가까웠으니 방언은 심할지언정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덕분에 처음 사할린에서 교역할 때처럼 긴장할 필요가 없어 꽤 편했다.

그리고 이들이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한 것인지 우리를 보는 시선도 꽤 좋았고.

정성국의 입장에서는 이들과의 교역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중이라 왠지 마음이 찔렸다.

'아니야. 원래 물 건너온 물건은 비싼 법이지. 그래도 나름 최대한 후하게 쳐주고 있고 저들도 만족하고 있잖아.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일본인들이나 노예로 삼는 러시아인들에 비하면 천사지. 암.'

그렇게 배는 쿠릴 열도를 따라 이동하면서 마을이 보일 때마다 작은 배를 보내 교역을 하며 캄차카반도로 향했다.

* * *

세계에서 화산이 가장 밀접한 곳으로 알려진 캄차카반도답게 만년설로 뒤덮인 160개의 화산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기에 불의 땅이라고 불렀던 캄차카.

왜 옛날 사람들이 이 땅을 불의 땅이라고 부르며 경외했는지 정성국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와...저게 뭡니까?"

"화산일세. 연기가 나는 것을 보니 활화산인가 보군."

"화산이요? 불의 산이라...정말 그렇군요."

김봉길은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갑판을 나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정성국도 실제로 산 정상에서 연기가 나는 화산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기에 신기하기는 했다.

만약 화산재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면 무서웠을 텐데 그렇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정성국은 화산에서 시선을 내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멀리서 감상했다.

한여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생명력이 가득한 초록빛이 가득한 평원 곳곳에 야생화가 펼쳐져 있었다.

그 평원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산맥들.

산 중턱에는 화산의 열기로 인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오히려 산 정상에는 만년설이 보여 굉장히 이색적이었다.

'여기까지는 무난하게 왔네. 이곳에서 적당히 피로를 풀고 더 늦기 전에 동쪽으로 가면 되겠네.'

정성국은 화산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김봉길을 툭툭 건드렸다.

"이보게. 선장. 이만 정신 차리고 배를 지휘하게나."

그 말에 김봉길은 정신을 차리며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아. 그래야죠. 그럼 이곳에 상륙하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따라오게."

정성국은 김봉길을 데리고 선장실로 들어가 탁자에 놓인 거대한 지도를 보고 설명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일세."

정성국이 가리킨 곳은 전생에 캄차카반도의 주도가 위치했던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캄차츠키 였다.

그곳을 보면서 김봉길은 지형을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천혜의 만이로군요."

"그렇지. 이런 곳이라면 원주민들이 살지 않을까 싶네. 적당히 물고기만 낚아도 먹고 사는 데는 크게 지장 없어 보이지 않는가."

"하긴 그렇겠군요. 허면 이대로 이대로 쭉 올라가 이곳에서 잠시 상륙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한 후에는 이곳으로 가겠군요."

김봉길은 지도에 손가락을 얹고 캄차카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알류샨 열도의 베링 섬을 가리켰다.

"그렇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로를 정하지요. 헌데 대방 어르신."

"뭔가?"

"지형은 아는데 지명이 없어서 영 불편합니다. 우리끼리 부르는 지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의견을 긍정했다.

"으음...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원주민들의 땅이니만큼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짓고 싶었네만..."

"아. 그래서. 그럼 투로시노가 빨리 말을 알아들어야겠군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느 세월에?

거기에 말이 통하는 것은 잘해야 캄차카에 사는 원주민들까지가 아닐까 싶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임의로 이름을 붙이기로.

어차피 아이누 들을 제외하면 말도 안 통하는데 지명을 물어봐야 원주민들이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해 답변해준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캐나다였고.

프랑스의 탐험가가 이로쿼이 부족 정착지에 도착해 지명을 묻자 원주민들은 이곳은 마을(카나타)이라고 답했는데 그것을 이곳의 지명이라고 생각한 프랑스인들이 그 땅 전부를 카나다(Canada)로 명명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으니.

"뭐 그렇긴 하지. 다만...당장 불편하니 나중에 이름을 바꾸더라도 일단 우리끼리 대충 붙이도록 하세. 일단 이 두 곳의 이름은 내가 붙이도록 하지."

"이곳은 아이누 섬, 이곳은 카무이 반도라고 부르겠네."

"흐음.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기재하지요. 허면 나머지는?"

"자잘한 섬의 이름은 선장과 선원들이 적당히 붙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 * *

정성국의 예상대로 전생에 캄차카반도의 주도가 위치했던 곳에는 원주민들의 촌락이 보였다.

처음 원주민들은 커다란 배에서 나타난 이방인들을 경계했었지만, 그 이방인 가운데 자신의 동족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와 이야기를 하자 곧 경계를 풀었다.

거리가 거리였던 만큼 완벽하게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교역하고 잠시 쉴 곳을 빌리겠다는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원주민들과 교역할 물품들을 꺼내는 선원들을 보면서 김봉길이 망원경으로 원주민들의 촌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이 의외로 도움이 많이 되는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데려오길 잘 한 것 같네."

정성국은 김봉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망원경을 돌려 원주민과 대화하며 웃고 있는 투로시노와 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 배에 탄 것을 보면 용기도 있고 결단력도 있다. 의외로 눈치도 빠르고. 말도 열심히 배우는 중이라던데...말을 다 배우면 이런저런 것들을 좀 가르쳐야겠어. 훈련도 시키고.'

그렇게 정성국은 웃고 있는 아이누 들을 보며 생각했다.

투로시노와 그를 따라온 아이누들은 원주민들과 이야기 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이곳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다른 원주민들과 교역해 철기 물품을 모피와 교환했고.

적당한 공터에 야영지를 만들어 피로를 풀고 사냥을 통해 식량을 보충했다.

처음 사냥을 할 때는 총성 때문에 원주민들이 벌벌 떨기는 했지만 그나마 말이 통하는 투로시노가 어떻게 잘 이야기 한 듯했다.

그때 이후로 원주민들은 이방인들에게 더욱 친절해졌고.

처음엔 왠지 힘을 과시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던 정성국이었지만 이들의 환대엔 이유가 있었다.

투로시노가 사냥을 하면서 식량을 마련하는 경비대원들에게 부탁해 곰을 사냥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정성국이 꽤 놀라 원주민들의 반응을 살폈지만, 오히려 원주민들은 기뻐하는 눈치였다.

'뭐 식인 곰이라던가 이들에게 피해를 준 곰이었나 보구나. 그래서 사냥해달라고 친절을 베푼 건가? 뭐 다행이네.'

그 이후로 원주민들은 그들이 기르던 채소를 내어주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덕분에 빠르게 식량을 보충한 그들은 곧 배에 올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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