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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5화 (15/850)

15화

다음날 정성국이 머물던 야영지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경비대원들의 사냥 방식을 보았던 아이누가 돌아가서 마을에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건지 다시 수많은 아이누가 야영지로 몰려왔다.

아이누들은 경비대원들이 들고 있는 소총을 가리키며 뭐라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말이 안 통하니 뭐라고 하는지 알 방도는 없었다.

다만 대충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저들이 들고 있는 기다란 막대기가 굉장한 무기다.

정말인가.

맞다. 내가 봤다.

이런 느낌으로 경비대원들의 사냥을 따라다녔던 아이누가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에 정성국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들에게 무기를 팔 것도 아닌데 무기의 위력을 보여줘야 하는가.

다만 고심 끝에 일단은 저들이 궁금해 하는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기로 했다.

무력을 과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화약 무기가 단지 무기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당장 남쪽에 있는 왜국도 조총을 사용했고 서쪽의 러시아도 전장식 머스킷은 사용하는 만큼 이들도 화약 무기에 조금은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시베리아 동쪽과 사할린 사이에 있는 타타르 해협은 겨울엔 얼어붙어 서로 연결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예전에 몽골이 배 없이 쉽게 사할린섬을 정복하기도 했었고.

그런 만큼 나중에라도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는 머스킷의 위력에 놀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계속 고립되어 살다가는 뒤처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경비대원들의 조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저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아무래도 소총이겠지?"

"예. 아마도 어제 저 투로시노가 마을로 돌아가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투로시노? 우리를 따라왔던 원주민의 이름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허면 저들의 소원대로 사격 시범을 좀 보여주게."

"사격 시범을 말입니까?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일단은 물통에 물을 채워놓고 그곳에 사격하게. 그 정도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조장이 정성국의 명령대로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바위 위에 올려놓고 아이누들에게 다가갔다.

"자! 조용! 이거 잘 보라고!"

"그리 말해봐야 알아듣겠습니까? 조장?"

"눈치껏 알아듣겠지. 뭘 그리 따지냐!"

"으하하하!"

경비대원들이 말이 안 통하는 원주민을 향해 이야기하는 조장을 트집 잡으면서 웃자 이를 따라 몰려왔던 아이누들도 따라 웃었다.

조장은 어깨를 으쓱한 후 소총을 들어 물통을 정조준했다.

탕!

"으아악!"

"히잌!"

갑작스러운 굉음에 기겁하는 아이누들은 곧 투로시노가 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들고 물통을 바라보았다.

바위 위에 올려두었던 커다란 물통에는 구멍이 뚫려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놀라는 아이누들에게 투로시노가 자꾸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누들을 보면서 경비대원들이 쑥덕거렸다.

"대체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헌데 어째 우리를 보면서 말하는 게 느낌이 좀 싸한데요?"

"너도 그러냐? 나도 좀 그런데."

"설마 우리를 공격해서 이 무기를 뺏겠다는 건 아니겠죠?"

한 경비대원이 흠칫하며 소총을 꽉 부여잡자 옆에 있던 경비대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것보단...왠지 유민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 아니냐? 조금은 다른 것 같기는 한데..."

"아. 그러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경비대원 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정성국도 아이누들을 바라보았다.

투로시노가 열성적인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간간이 우리 쪽을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거 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홋카이도에서 왜어를 할 줄 아는 아이누를 꼭 데리고 와야겠네. 쩝.'

오히려 이곳에 오래 머무르거나 항구라도 만들 요량이라면 요 밑에 홋카이도에 사는 왜어를 할 줄 아는 아이누를 찾아 데리고 올 텐데 내일이면 떠날 예정이라 훗날을 기약하는 정성국이었다.

* * *

"쯧쯧."

정성국은 천막에서 나와 꽤 엉망진창인 야영지를 바라보고 혀를 찼다.

어젯밤, 꽤 많은 아이누가 야영지로 이런저런 고기와 채소를 들고 그들을 찾아왔다.

정성국은 기꺼이 그들에게 밥과 술을 건넸고.

덕분에 축제가 벌어졌고 선원들과 아이누들은 함께 어울렸다.

정성국 역시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투로시노가 꽤 화려한 복장을 한 사내를 데리고 왔다.

아마도 아이누의 추장이나 저 마을의 지도자 정도 되는 인물이리라.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흔들며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던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며 축제를 즐겼고.

정성국은 적당한 때에 빠져나와 천막에서 쉬었지만, 선원들은 당분간은 술 냄새도 맡기 힘들다는 것을 짐작했는지 술이 동날 때까지 죽어라 마셨고 그 결과가 바로 이 꼴이다.

"기침하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야영지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던 경비대원 중 한 명이 정성국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아아. 여긴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의외로 그 자리에서 쓰러진 선원은 없었나 보군?"

"설마 없었겠습니까. 저희가 다 천막에 대충 던져뒀습니다."

"그런가? 잘했네. 원주민들은?"

"대부분은 마을로 돌아가긴 했습니다만...이곳에 남아있던 자들은 저쪽에 남는 천막에 대충 던져뒀습니다."

"그런가. 슬슬 아침인데 조용한 것을 보니...이거 오늘 출발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군."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대방 어르신."

뒤쪽에서 김봉길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와 정성국이 몸을 돌렸다.

김봉길 선장은 해안가 쪽에서 몇몇 선원들을 거느리고 걸어왔다.

"배에 다녀온 건가?"

"예. 별일 없나 확인차 한번 다녀왔습니다."

"그런가."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봉길 선장은 자신의 뒤에 있던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얘들아. 어서 선원들 다 깨우고 빨리 뒷정리시켜."

"예. 선장님."

곧 선원들이 하나둘 천막에서 기어 나오면서 적막이 가득했던 엉망진창의 야영지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는 소음에 곧 천막에 잠들었다던 아이누들도 깨어났고.

그들은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뒷정리를 시작하는 선원들을 보고 다가가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런 광경을 멀리서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 투로시노가 추장과 함께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정성국이 그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자 저들은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알아들을 방도가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주변을 살펴보다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고 나중에 오겠다는 의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배를, 그리고 커다란 원을 닮은 화살표를 그렸다.

화살표 곳곳에 봄을 상징하는 꽃, 여름을 상징하는 햇빛, 가을을 상징하는 낙엽, 겨울을 상징하는 눈을 그려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뜻을 알리자 투로시노와 추장은 서로 무어라 대화하기 시작했다.

투로시노의 열변에 추장은 잠시 생각하다 안타까운 얼굴로 투로시노를 부둥켜 안았다.

투로시노 역시 울적한 표정을 지었고.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김봉길과 정성국은 동시에 묘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어째 좀..."

"그러게. 왠지 좀..."

아무리 봐도 헤어지는 분위기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정성국이었다.

"설마 따라온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 * *

설마 했지만 투로시노는 그들을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3명의 젊은이와 함께.

그들이 타려는 작은 배에 그들이 먼저 올라타 함께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김봉길은 어찌할 것이냐는 시선을 보냈고 정성국은 골치가 아파졌다.

위험할 수도 있는 항해에 이들을 데려갔다 사고라도 난다면?

내년에 다시 이곳에 들렀을 때 곁에 이들이 없다면 아이누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해서 안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며 내리라고 맨 앞에 있던 투로시노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투로시노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곳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성국은 잠시 투로시노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선장. 이들을 태워도 별문제는 없겠지?"

"고작 4명이니 큰 상관은 없을 겁니다만...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데, 막을 수야 있나. 대신 저들을 강물로 데리고 가 씻기게. 깨끗한 옷도 주고."

"알겠습니다. 들었지? 저들 데리고 가서 씻겨."

"예. 선장님."

선원들이 작은 배에 올라탄 아이누들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고 투로시노는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원을 따라가라는 듯 손짓하자 아이누들은 곧 표정이 밝아지면서 선원들을 따라가 처음으로 비누를 사용해 몸을 씻기 시작했다.

"우두 남은 거 있지?"

"예. 저들도 접종할까요?"

"그래야지.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아. 조장."

"예. 대방 어르신."

"자네가 저들 좀 신경 써주게. 말을 가르쳐 보고."

"알겠습니다."

* * *

상륙했던 사람들이 다시 지급 함선에 모두 올라타자 출항하기 전에 정성국이 갑판의 선미에 서서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편히 쉬었나?"

""예. 대방 어르신.""

씩씩하게 대답하는 선원들과 경비대원들을 보며 정성국은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제 동쪽으로 간다."

"응?"

"동쪽?"

"뭐가 있나?"

웅성거리는 선원들을 향해 정성국이 피식 웃었다.

"설마 겨우 열흘 항해한 것을 초장기 항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정성국의 너스레에 선원들이 피식하면서 웃었다.

"그렇다. 고작 이 정도 항해를 하려고 초장기 항해를 운운한 것이 아니다."

선원들의 웃음이 멎고 그들의 시선이 정성국에 집중하자 그는 입을 열었다.

"저 남쪽에 남만인 들을 아는가."

선원들도, 경비대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서 입수한 정보가 있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저 중원보다 더 거대한 땅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땅을 찾기 위해 이번 항해를 시작했다."

정성국의 말에 조금은 웅성거리는 선원과는 달리 경비대원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서서 정성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저 소문이 아니다. 전설도 아니다. 정확한 정보이고 저 남만인 들은 지금도 그곳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던 선원들도 곧 정성국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개척촌을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개척촌은 더 성장하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번 항해에 나섰다."

개척촌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위기감을 자각했다.

그들에게 개척촌은 새로운 고향이자 희망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쉽지 않은 항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저 남만인 들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고작 판옥선보다도 작은 배를 가지고 그 항해를 성공시켰다고 한다. 허나 우리는 어떠한가. 저들보다 커다란 배를 가지고 있고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 그런데 거대한 땅을 발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정성국의 말에 오히려 선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지금 타고 있는 지급 함선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헌데 판옥선보다도 작은 배로 항해한 저 남만인도 있는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쏜가.

그렇게 끌어 오른 선원들의 분위기를 보고 정성국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를 믿고 이 항해를 시작한 너희들에게 하나는 약속하겠다."

보상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눈빛을 빛내며 뚫어지게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번 항해에 성공한다면 너희들에겐 커다란 보상을 할 것이라는 것."

""오오!""

선원들과 경비대원들은 정성국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커다란 보상이라니.

그런 반응을 보고 정성국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확인시켜줬다.

"원상은 언제나 상단원들의 노고에 확실하게 보답한다. 아닌가?"

""맞습니다!""

잔뜩 사기가 오른 선원들과 경비대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정성국은 그의 뒤편에 서 있던 김봉길 선장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항해를 시작하지. 선장?"

그러자 김봉길은 앞으로 나와 선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자! 얘들아! 잘 들었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정신 단단히 먹고!"

""예! 선장님!""

"그럼 출발한다! 닻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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