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정성국이 괜히 라페루즈 해협 북쪽의 사할린에 상륙한 것이 아니었다.
남쪽의 홋카이도에 상륙해 그곳에 있는 아이누와 교류한다면 당장 아이누들과의 교역을 독점하고 있는 마츠마에 번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같다.
마츠마에 번은 홋카이도 북쪽의 아이누들에게 폭리를 취하며 교역을 하고 있었다.
아이누들의 모피와 사금, 생선 등을 쌀과 철기 등 아이누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면서 엄청난 폭리를 취했고 그 덕분에 번이 유지 될 수 있었다.
훗날 그러한 무역 불균등과 차별로 인해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가 나타나 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면?
아이누들은 마츠마에 번과의 교역을 축소할 테고 이들과의 교역으로 먹고사는 마츠마에 번은 살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아이누들의 대우를 올려주는 방향이라면 참 좋겠지만...일본애들이 그럴 리는 없다고 판단한 정성국이었다.
물론 이곳과 꾸준히 교류해 나간다면 아무래도 홋카이도에 있는 아이누들도 영향을 받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은 늦어질 테고 그만큼 왜놈들이 북쪽에 관심을 두는 시기도 늦어질 거라는 생각에 사할린을 첫 상륙지로 잡았던 정성국은 고민했다.
'확실히 이들과 제대로 교류하고 이곳이든 사할린 중부 지역이든 항구를 만들려면 말이 통해야 하니 최소한 한 번쯤은 들르긴 해야겠군.'
그러면서 정성국은 경비대원들과 물물교환을 하면서 교환에 만족해하며 환하게 웃는 아이누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이들의 앞날을 떠올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들은 훗날 러시아에 의해 학살될 테고 홋카이도의 아이누들은 일본인에 핍박받고 동화되니 힘이 없는 민족은 참으로 서럽구나.'
정성국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서 왠지 모르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홋카이도의 아이누들은 일본인들에게 정복당해 대부분이 죽고 사할린, 쿠릴, 캄차카 지역의 아이누들은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에 의해 노예로 살아가다 거의 몰살당한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특히나 유럽의 여러 나라는 선주민들을 피정복대상으로 보고 가차 없이 노예로 부려먹었기에 곧 이들에게 닥칠 비극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증기선을 생각한다면 중간 기착지가 필요한데...이들을 좀 도와줄까?'
정성국은 아이누 사람들의 비극이 떠오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당장은 서쪽의 러시아의 세력이야 미약하니 신경 쓸 것 없다고 한들 남쪽의 왜국을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일단은 꾸준히 교류해 나가면서 우리를 통해 이들도 자립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일단은 지켜봐야겠다.'
정성국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들을 보고 있었지만 아이누들은 거래가 만족스러운지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또한, 손짓 발짓을 통해 거래했던 경비대원들도 거래가 만족스럽긴 마찬가지였기에 빙그레 웃음 짓고 있었고.
대충 거래가 끝나자 조장은 정성국에게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보고했다.
"대방 어르신.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챙겼습니다."
"그런가?"
"예. 저기 쌓아 둔 모피 좀 보십시오. 꽤 품질이 좋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의 모피는 확실히 품질이 좋지."
'그 때문에 러시아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동진을 한 거고. 미친놈들. 좀 적당히 조절해서 잡을 것이지. 아예 씨를 말려버리니.'
러시아가 계속해서 동진해 시베리아를 정복한 것은 모피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모피는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기에 모피의 값어치는 생각외로 높았다.
아직 석탄이 유통되어 난방이 보급되기 이전이라 특히나.
그리고 모피의 품질은 기온에 따라 결정되었고.
극지나 극도로 추운 지역에 사는 동물의 가죽의 품질이 제일 높았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모피를 얻기 위해 동진을, 다른 유럽 국가들은 북부 아메리카로 향한 것이고 말이다.
"헌데 대방 어르신. 저들이 사금을 내미는 것을 보면 이 섬에 금광이 있다는 소리인데 한번 찾아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조장이 사금과 은을 모두 담은 주머니를 정성국에게 건네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성국은 조금은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글쎄? 금광이 탐이라도 나나?"
"금이잖습니까. 있어서 나쁠 것은 없죠."
"뭐 그렇기야 하지. 그러나 이곳에 정기적으로 배를 보내 무역을 하면 그만이네. 어차피 저들이 캐는 금과 모피가 우리에게 들어올 텐데 굳이 남의 것을 탐내 저들과 척질 이유가 없지."
"알겠습니다."
워낙 물물거래를 통해 짭짤하게 남겨서인지 정성국의 말에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조장이었다.
'괜히 이들과 싸우기보다는 이들을 키워 러시아의 동진을 막게 하는 것이 나아.'
정성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해가 지기 전에 선원 대부분이 상륙했다.
오래간만에 밟은 땅에 기뻐하던 선원들은 곧 저녁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대부분의 아이누들은 물물교환이 끝나고 물건들을 들고 돌아갔지만 몇몇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남아있는 아이누들도 먹을 수 있게 푸짐하게 저녁을 차렸다.
가마솥에 불을 때 밥을 짓고 한쪽에선 커다란 순록을 해체해 굽기 시작했다.
저 순록은 우리가 잡은 것이 아닌 아이누 사람들이 가져다준 식량이었다.
물물교환과는 별개로 마치 이곳까지 와서 거래해줘서 고맙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곳까지 온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가져왔을 수도 있을 테고.
어느 쪽이든 참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져온 순록 고기를 달궈진 가마솥 뚜껑 위에 얹고 소금을 살살 치기 시작하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오랜만에 고기에 다들 군침을 삼키고 있었을 때였다.
"선장. 술 가져온 거 있지?"
"예. 풀까요?"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 한 잔씩 돌리게. 아이누들에게도 주고."
"들었지? 얘들아! 저기서 술 가져와라!"
"와!"
"키야!"
김봉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몇 선원들이 달려가서 술이 들어있는 병들을 들고 왔다.
아이누들은 환호하는 선원들을 보고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들에게도 술이 담긴 잔을 건네받고 한 번에 들이켰다.
"으하하하!"
"잘 마시네. 더 마셔! 쭉!"
아이누들은 술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빈 잔을 선원에게 보였고 선원들은 웃으면서 그들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어울렸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밥과 고기, 그리고 술이 곁들여지자 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최소한 첫 교류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정성국이었다.
"남자들이 친해지는 데는 확실히 술 만한 게 없긴 하네. 술을 좀 많이 가져올 걸 그랬나."
* * *
술과 함께한 즐거웠던 야영지의 밤이 지나고 어느덧 밝은 햇살이 아침을 알려왔다.
"대방 어르신. 기침하셨습니까?"
"허어. 자네도 술 좀 마시지 않았던가?"
"에이. 대방 어르신도. 그 정도야 그냥 목만 축이는 정도죠."
"누가 뱃사람 아니랄까 봐."
"하하하. 허면 오늘은 예정대로 사냥을 좀 할까요?"
"그러게. 일단 경비대원들은 사냥으로 적당히 식량을 비축하고,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채집도 좀 하고. 아. 선원들은 일단 물부터 채우라고 하고."
"예. 그러도록 하지요."
"어제 함께한 아이누들은?"
"그들도 이미 일어나 대부분은 마을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대부분?"
"두어 명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궁금한지 남아있더군요."
"그래? 그럼 경비대원들에게 이야기해서 같이 사냥하라고 해. 이곳은 저들의 땅이니 지리도 잘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은 적당히 교대해서 땅에서 좀 쉬게 해주고."
"예. 알겠습니다."
천막에서 나가는 김봉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천막 안을 대충 정리하고 천막을 나섰다.
야영지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경비대원들은 적당히 조를 이뤄 주변을 탐색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선원들은 상류로 가서 식수를 보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성국은 혼자만 쉬고 있기 뭐해서 아이누들과 함께 사냥을 떠나려는 조에 합류했다.
"대방 어르신. 저기 보십시오."
조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커다란 곰이 보였다.
이곳에서 실제로 곰을 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정성국은 나직하게 감탄사를 토했다.
"허어. 저거 곰이잖아?"
"잡을까요?"
조장은 자신이 들고 있는 소총을 내보이며 정성국에게 허락을 구했다.
저 정도 덩치면 고기양도 많겠다고 생각하던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순간 멈칫했다.
그가 기억하기에 아이누들에게 곰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음...잠시만. 저거 잡아도 되는지 저들에게 물어보게. 내가 듣기로 이들은 곰을 신성시한다고 들었거든."
정성국의 말에 조장은 당혹해하며 뒤에 따라온 아이누를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그렇습니까? 일단 해보긴 하겠는데 말이 통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장의 말에 정성국은 하긴 그렇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식량이 필요해서 사냥하려 했던 것이지 곰고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 무리해서 사냥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이 먼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시빗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기도 했고.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그럼 일단 뒤로 빠지세. 저 곰이 달려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먼저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예. 알겠습니다. 허면 순록 등을 잡아야겠군요."
"그러는 편이 나을듯싶네."
곰이 있는 곳을 멀리 우회하는 정성국과 경비대원들을 보며 따라오던 아이누는 곰을 보고 뭐라고 중얼거린 후 그들을 따라왔다.
* * *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순록이 풀썩 쓰러졌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이누는 갑작스러운 총성에 화들짝 놀라 주저앉아 주변을 살펴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아이누에게 조장이 다가가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아이누는 그들을 보며 카무이 라고 불렀다.
"우리를 카무이라고 부르는데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카무이라..."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아이누는 사람을 의미했고 카무이는 신적 존재를 의미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흥분한 아이누에게 다가가 손으로 자신과 경비대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무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든 정성국은 다시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아이누."
자신들은 신적 존재가 아닌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는데 그 맥락을 알아들었는지 아이누는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정한 것 같네요."
"음."
"저쪽 남쪽 왜인과 교류가 거의 없나 봅니다. 화약 무기를 처음 본 것 같네요."
"그러게 말일세."
"대방 어르신. 일단 저 순록을 옮겨야 하니 복귀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러도록 하지. 다른 조도 있으니."
그들이 순록을 들고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야영지는 꽤 분주했다.
사냥에 성공한 경비대원들이 사냥감을 들고 와 손질하느라 말이다.
경비대원들은 가죽을 벗겨 무두질하고, 선원들은 고기를 손질해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훈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 순록이 꽤 많았는지 사냥감은 모두 순록이었다.
정성국이 돌아온 것을 본 김봉길은 그에게 다가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그랬지. 생각보다 순록이 많은가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한 조는 곰을 발견했다는데 일단 위험한 행동은 피하라는 말에 그냥 물러났다고 합니다. 위치는 파악했는데 사냥을 할까요?"
"아니. 다행이군. 아주 잘했네."
"예?"
"이들은 곰을 신성시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 말일세."
"아. 그것참 다행이군요."
"저 순록들 모두 훈제로 만들고 아이누들과 거래한 말린 생선까지 있으니 식량은 어느 정도 보충한 거겠지?"
"예. 거기에 이곳 강에도 물고기들이 꽤 있고 저 바다에도 물고기들이 꽤 많답니다. 배에 남아있는 선원들이 낚시로 물고기들을 많이 낚아 저기서도 훈제하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그럼 내일은 사냥보단 채집을 위주로 하고 모레쯤 떠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사냥 이후로 묘하게 그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반짝이는 눈으로 열심히 관찰 중인 아이누를 보면서 생각했다.
'괜히 총기를 보여준 건가? 뭐 나쁠 것은 없겠지. 별일이야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