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흠...괜찮으려나? 그래도 저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고립되어 살지는 않았고 지금 나가는 선원들과 경비대원들을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입혔으니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정성국은 사할린섬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작은 배를 보면서 혹시나 그들이 옮길 수도 있는 전염병을 고민했다.
그가 조선에서 개척촌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몰려 살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바로 위생이었다.
전염병이 도는 순간 줄초상 날 수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백두대간의 유민들이 소문을 듣고 개척촌으로 이주하려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커다란 목욕탕이다.
개척촌 외곽의 대장간 옆에 지어진 목욕탕은 뜨거운 물과 그나마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값싼 비누 조각을 제공했고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깨끗이 씻어야만 개척촌에 건설된 건물의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처음엔 남사스러워하던 이주민들은 한번 뜨끈한 물에 씻고 비누를 사용해 몸을 닦아 개운해지자 그 이후론 자주 씻곤 했다.
또한, 방을 배정받고 나면 쉬는 동안 바로 우두 시술을 강제로 받았고.
물론 유민들은 그것이 우두법이라는 것은 몰랐다.
다만 반발하지 않았던 것은 씻겨 주고 옷을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주는 만큼 새로운 의술의 시험이라면서 고작 바늘로 몇 번 찌르는 해괴한 짓거리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가 우두 접종을 숨긴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상에서 바늘을 들이밀며 이것을 맞아야 마마를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과연 조선인들이 믿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천연두, 즉 마마는 조선인들에게 무서운 역신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를 피할 방법은 오직 굿과 부적뿐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오히려 저런 말을 해준다면 확신이 들기 전에는 접종을 피할 것으로 생각했다.
애당초 조선 후기에도 우두법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로 여겨 실제 인명 구제에는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 인식을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척촌은 인구밀도가 꽤 높았고 잘못해서 천연두가 도는 순간 수많은 사람이 병에 걸릴 테니 차라리 강제로라도 접종을 해야겠다는 것이 정성국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유민들이 이주하면 피로를 풀 겸 최소 1주일이 지나야 일을 배정했기에 그 시간을 회복 기간으로 이용한 셈이다.
"오. 상륙했습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김봉길의 목소리에 정성국은 상념을 접고 망원경으로 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데로 상륙한 선원들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아이누 들은 수염이 풍성했다.
동양인들의 가느다란 수염과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마치 서양인의 풍성한 수염의 느낌이랄까.
거기에 외모도 조선인이나 왜인과는 달리 백인과 비슷한 외모였기에 확실히 이국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음. 접근하는군."
선원들이 배를 상륙지점에 대자 경비대원들이 먼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누 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누 들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중에 한 명이 조심스럽게 경비대원들에게 다가왔다.
경비대원들은 정성국이 단단히 이야기한 대로 얼굴 전체에 미소를 띠면서 공격 의사가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런 병사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이누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경비대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자꾸 샤모라는데 샤모가 무슨 뜻이야? 왠지 묻는 거 같은데?"
"그걸 저희가 어찌 압니까?"
"어쩌죠?"
"뭘 어째. 대방 어르신이 이야기한 대로 일단 이거 건네주고 뒤로 빠져야지."
"아."
병사 중 한 명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발씩 나아갔다.
그러자 뒤편에 있었던 아이누 들이 흠칫했고 맨 앞에 나와 있던 아이누도 움찔했지만 괜찮다고 판단한 것인지 가만히 있었다.
소쿠리를 들고 천천히 다가간 병사는 그것을 아이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경비대원은 소쿠리 안에 있던 떡을 하나 들어 사기그릇 안에 있던 조청을 푹 찍은 후 자신의 입에 가져가 한입 베어 물면서 그가 준 음식이 무해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러자 소쿠리를 받아든 아이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떡을 집어 그가 한 대로 조청이 담긴 사기그릇에 떡을 찍은 후 입에 가져다 댔다.
조청의 단맛에 놀랐는지 탄성을 지른 아이누가 재빠르게 떡을 삼켰다.
그런 아이누를 보고 뒤편에 있던 아이누 들도 한 명씩 다가왔다.
맨 앞에 있던 경비대원은 살짝 뒤로 물러나 뒤편에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합류해 그들이 건넨 떡을 맛있게 먹는 아이누 들을 바라보았다.
"아...겁나 맛있게 먹네."
"맛있겠지. 조청까지 있잖아."
"그러게. 아. 저리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배고픈데."
"야. 됐고 계속 환하게 웃어."
"하도 웃어서 얼굴이 다 아픈디."
"대방 어르신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 일인지 몰라서 그래?"
"압니다. 안다고요."
입으로는 구시렁거리면서도 표정은 밝게 웃는 경비대원들이었다.
한참을 맛있게 떡을 먹던 아이누 들은 떡을 배불리 먹고 나서 이를 건네준 경비대원에게 다가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다만 경비대원은 적당히 몸짓을 통해 저 큰 배에서 사람들이 더 내릴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비대원들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배를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누였다.
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경비대원은 고개를 돌려 아직 작은 배에 남아 있던 선원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상륙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 배로 돌아가요."
"알겠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작은 배에 남아 있던 선원들은 다시 노를 저어 지급 함선으로 돌아갔다.
작은 배가 해안가에서 범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정성국은 김봉길에게 이야기했다.
"남은 배들도 다 내리고 상륙하도록 하지. 그리고 철제 농기구와 단검, 음...쌀도 적당히 싣고."
"쌀을 말입니까?"
"저기서 머무는 동안 밥도 먹고 저들에게도 좀 나눠줘야지."
"하지만..."
"이곳에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그럼."
김봉길은 이내 수긍하고 뒤편에 있는 선원들에게 눈짓했다.
"아. 그리고 저쪽 강 하류에서 상륙하는 모든 선원을 먼저 씻기게. 물은 상류로 가서 뜨고. 알지?"
"그럼요. 위생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대방 어르신."
고개를 끄덕이는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상륙할 준비를 했다.
선박의 밧줄 사다리를 타고 작은 배로 옮겨 타자 곧 선원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 * *
정성국이 먼저 상륙해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다가가자 아까 아이누 들과 의사소통을 했던 경비대원이 나섰다.
"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아. 수고했네."
"아닙니다. 헌데 이젠 어찌하실 것인지?"
정성국은 주위를 둘러보다 강 유역의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하루 이틀 정도 쉬도록 하지."
"허면 조금 안쪽에 야영지를 만들겠습니다."
"그래 주게. 헌데 말은 안 통하지?"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적당히 통하는 것 같던데?"
"뭐 적당히 눈치로 때려 맞추는 거죠."
"하하하. 허면 계속 자네가 저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어떤가."
"알겠습니다."
정성국의 말에 곧장 대답한 경비대원의 조장은 뒤쪽에 서서 웃는 낯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경비대원들을 보면서 명령했다.
"네가 책임지고 저쪽에 야영지 건설해라. 혹시 모르니 경계는 적당히 하고."
"알겠습니다. 조장."
경비대원들은 조장의 말에 따라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경비대원들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이누 사람들을 보면서 정성국은 남아 있던 조장에게 말했다.
"저들을 부르게."
"어쩌시고 하시는지?"
"거래해야지."
그러자 조금은 회의적인 표정을 하는 경비대원들의 조장이었다.
"이곳에서 거래할 품목이 있겠습니까?"
"찾아봐야지. 하지만 없지는 않을걸세. 이곳은 북쪽이지 않나. 정 뭐하면 모피와 교환해도 될 테고. 저들이 비록 섬에 산다지만 외지인과 교류가 아예 없었을 것 같지는 않네. 이 맞은편에도 섬이 있지 않던가."
"아.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내 뒤편에 선원들이 하나둘 짐을 내려놓는 것을 확인하고 조장은 아이누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그들을 불렀다.
아이누 사람들은 조금은 주춤했지만, 곧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정성국은 한쪽으로 물러나 그들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그런지 다들 나이가 꽤 있어 보였다.
'나이가 많은 것인지 아니면 털이 많아서 나이 들어 보이는 건지를 모르겠네.'
아이누 사람들은 털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더니 확실히 체모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수염이 꽤 중후해서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이거. 이거."
조장이 손짓 발짓을 해가며 철제 농기구를 보여주자 아이누 들은 그것을 보더니 감탄하고 곧 자신들끼리 이야기했다.
곧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뒤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자 조장은 꽤 당황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아이누를 보았다.
왠지 기다리라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 같다고 정성국이 느끼면서 당황하고 있는 조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다려 보세. 저들도 철제 농기구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닐걸세."
"예?"
"반응이 그렇지 않은가. 무언지 모른다기보다는 물건의 품질을 확인하고 감탄하는 느낌이었지."
"아!"
"저들도 최소한 물물 교환을 할 것 아닌가. 이것과 바꿀만한 물건을 마련하러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네만...혹시 모르니 경계를 좀 강화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점점 배 안에 머물던 선원들과 경비대원들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머물기 위해 야영지를 만들고 있을 때 남아 있던 아이누는 우리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야영지를 건설하던 경비대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총을 들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너무 티 나게 긴장하지는 말게. 웃어. 우리는 그저 상인이라고."
"대방 어르신의 말씀 들었지? 속으로만 경계하고 일단은 웃어! 환하게!"
조장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일단 경비대원들이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정성국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자 꽤 여러 사람이 이런저런 물품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들고 온 물품들은 모피나 말린 생선, 금과 은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품으로 야영지에 내려놓은 철제 농기구, 단검, 조리 도구 같은 것들과 교환하려 했고 경비대원들은 즉각 나서서 질서를 잡고 적당히 물물 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정성국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상륙했는지 김봉길 선장이 다가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의외로 거래를 자주 해봤나 봅니다."
"아무래도 남쪽에 왜국이 있지 않나."
"설마 왜국 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을걸세. 다만 저기 왜놈들이 에조치라고 부르는 섬 최남단에 일본의 번이 설치되어 있네."
"허면 이들이 그곳까지 가서 거래한다고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에조치 북쪽에 사는 아이누 들과 거래할 수도 있겠지."
"아. 저 에조치 섬에도 이들과 비슷한 민족이 사는 겁니까?"
"이곳뿐만 주변 섬에도 좀 있을걸세."
"흐음. 허면 왜어가 가능한 통역을 데리고 올 걸 그랬습니다."
"왜어야 나도 할 줄 아네. 허나 저들은 왜어도 모르는 듯하니 아무래도 남쪽에 있는 아이누 들과 거래하는 것 같군."
"그럼 나중에 남쪽에 들러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통역을 구하면 되겠군요. 우리와도 의사소통을 해야하니 왜어도 할 줄 아는."
"그렇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