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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2화 (12/850)

12화

처음 배의 진로를 북동쪽으로 잡고 출발해 이틀이 흘렀을 때 정성국은 김봉길이 머무는 선장실로 향했다.

선미 부분에 위치한 선장실의 문을 두드린 후 들어가자 김봉길은 정성국이 넘겨준 커다란 세계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대방 어르신. 오셨습니까?"

"나를 불렀다고 들었네만."

정성국이 선장실의 문을 닫고 들어와 선장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선실 중에서는 가장 넓었기에 한쪽엔 침대가, 한쪽엔 조그마한 탁자와 의자들이 고정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뒤편의 수많은 유리 창문에선 햇살을 통과시켜 선장실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고.

가운데엔 지도를 올려놓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정성국의 시선을 본 김봉길이 히죽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선실이 참 넓고 좋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바꾸시죠?"

"됐네. 이 사람아. 선장이 선장실에 머물러야지."

"그래도 대방 어르신이 이곳을 사용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게. 난 지금 머무는 곳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네. 내가 일반 선원들과 함께 부대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일은 더는 말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처음 정성국이 배에 탔을 때 김봉길은 정성국이 머물 선실로 자신의 선장실을 내어주려 했었다.

선장실이 이 배에서 가장 넓은 선실이었기에 그리 권했지만, 정성국은 단칼에 거절했다.

정성국은 특권 의식 같은 것이 거의 없기도 했고 굳이 선장실을 차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제대로 된 선실이 없는 경우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가 설계한 함선들은 대부분 포 갑판을 극단적으로 줄였기에 당연히 남는 공간이 꽤 많았다.

해서 그런 공간을 적당히 나누어 선실도 만들어 두었고.

이 선실 가운데 몇 개는 1인실로 만들어 두었으니 정성국으로는 큰 불편함은 없었다.

물론 1인실이라고 해봐야 기존 선원들이 쓰는 방과 크기는 똑같았다.

다만 4인 혹은 6인이 자는 선원실과는 다르게 혼자 지낼 수 있을 뿐.

처음 갤리온의 설계도를 기억나는 데로 옮기고 나서 보니 선원들이 잘 곳이 없어서 의아했었던 정성국이었다.

이 시대의 선원들은 선장이나 간부들을 제외하면 따로 선실이 없었기에 밤에는 적당히 빈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정성국이 포 갑판을 줄이고 남는 공간에 최소한의 선실을 만들어 둔 것이고.

그중에 몇 개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1인실로 만들어 두었기에.

"헌데 나를 부른 용건은 뭔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슬슬 선원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현재 이 배를 탄 사람들은 이 배의 최종 목적지가 북미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커다란 배가 완성되었으니 먼 바다로 나가는 시범 항해로만 알고 있었다.

또한, 먼 바라도 항해하는 김에 장기 항해를 계획하고 있다고만 일러뒀고.

물론 이 배에 태운 선원들이나 경비대원들은 고르고 고른 믿을만한 사람들이긴 했다.

다만 미리 이런저런 이야기가 개척촌에 떠돌아봐야 좋을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에 숨겼었다.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김봉길 앞에 놓여있는 지도의 한 섬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곳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어...앞으로 사흘은 더 항해해야겠지요."

"그럼 이곳을 발견한 후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래. 그편이 나을듯싶네."

"알겠습니다."

정성국이 가리킨 곳은 바로 사할린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사할린섬에서 내려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목적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원주민이 얼마나 있으려나. 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사할린에는 아이누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다고 기억하던 정성국이었다.

이 아이누는 일본 북부부터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까지 꽤 넓게 퍼져있는 선주민이다.

다만 지금 시대에선 일본 북부에 아이누 들은 일본인들에게 밀려나 북쪽의 홋카이도로 이주한 상황이었고 말이다.

'분명 사할린에 자원이 꽤 많았지. 석유야 어차피 현재는 의미 없고. 석탄이 있긴 할 텐데...근처에 원주민이 있긴 하려나. 있다면 항구를 만들어 교류해 볼 만도 한데.'

남북으로 길쭉한 사할린섬에는 여러 지하지원이 존재했다.

그중 석유나 천연가스야 당장 캘 능력도, 이용할 방법이 없으니 제쳐둔다 쳐도 석탄은 당장 필요한 물품이 아닌가.

특히나 이곳의 석탄은 유연탄이니만큼.

이곳에서 석탄을 캐서 개척촌으로 가져가든지 아니면 이곳에 중간 기착지를 만드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코크스를 만들어 철의 품질을 올리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 당장 증기기관의 출력을 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좀 돌아가더라도 저곳도 탐색해야 하나?'

사할린섬은 남북으로 기다란 섬이었기에 탄광을 탐색하기 위해 사할린섬의 중부를 탐색하려면 항해 거리가 꽤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말이네. 이곳을 들렀다가 바로 개척촌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정성국이 사할린섬 중부에 위치한 그가 기억하는 우글레고르스크를 가르치자 김봉길은 지도에 자를 대고 거리를 측정하며 머릿속으로 계산해보았다.

"넉넉잡고 가는 데는 6일, 이곳에서 개척촌으로 가는 데는 14일 정도가 걸리지 싶습니다만."

"쯧. 너무 늦는데. 역시나 바람 때문이겠지?"

"예."

'확실히 범선이 불편하긴 하구나. 너무 늦으면 날이 추워져서 힘들 거야. 일단은 예정대로 사할린 남쪽으로 가야겠군. 그곳에서 아이누들과 교류를 터야겠어. 생각해보면 저곳이 현대에는 부동항이긴 한데 지금은 소빙하기라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으니.'

정성국은 사할린섬의 자원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서든 사할린 아이누들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었고 그런 정성국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져 몸을 떠는 김봉길이었다.

* * *

"섬이다!"

한 선원의 외침에 배 안의 생활이 무료해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앞쪽으로 이동했다.

"어디?"

"어딘데?"

"안 보여."

"아. 저기. 희미하게 보인다."

"끙...나는 안 보이는데."

"기다려 봐. 곧 보일 테니."

"근데 그럼 저긴 어디지? 설마 왜놈들 땅인가?"

"왜놈들은 남쪽에 있는 거 아닌가? 우린 북쪽으로 왔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나야 모르지."

선원들은 심심하던 차에 섬을 발견했다는 소리에 이를 화제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을 때 선실에서 머물던 정성국이 이야기를 듣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를 발견한 김봉길이 급히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약간은 들뜬 얼굴로 김봉길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 땅을 발견했다고?"

그런 정성국의 표정을 보면서 김봉길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목적지인 그 기다란 섬은 아닙니다."

"그래? 허면 에조치(홋카이도)인가?"

"에조치 최북단 옆에 있는 조그만 섬 같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방금 발견했다는 섬은 홋카이도의 북서쪽에 있는 레분섬과 리시리섬 둘 중의 하나인 듯했다.

"아...그래? 허면?"

"음...한시간은 더 가야 그 기다란 섬의 최남단에 도착할 겁니다."

김봉길의 이야기를 듣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선선한 바닷바람이 그를 감쌌고 이내 그는 몸을 떨었다.

"아. 그런가. 알겠네."

"다시 들어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그러자 김봉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하루에 한 번 선실에서 나와 잠시 갑판을 돌아다닌다고는 하나 그 외에는 선실에 틀어박혀 있는 정성국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너무 선실에만 계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봉길의 말을 듣고 정성국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장기간 항해에서 규칙적인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뒤늦게 사할린섬에 대해 깨닫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실수에 속으로 혀를 찼던 정성국이었다.

그 이후로 정성국은 선실에 틀어박혔다.

지리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혹시 빠진 부분이 없는가 확인했다.

빠진 부분은 기록하고.

아직 다 끝내지는 않았지만, 김봉길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정성국은 조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앞으로의 항해는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뭐 섬에 상륙해서 적당히 몸이라도 풀겠네."

"예. 꼭 그러시지요."

* * *

"흐음."

정성국은 갑판 위에서 망원경으로 사할린 최남단을 살펴보았다.

풍경은 참 멋졌다.

적당한 푸른 언덕에 그 너머로 보이는 대수림과 어렴풋이 보이는 산맥까지.

다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원주민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홋카이도의 아이누 들이나 사할린의 아이누 들이 같은 인종이니 가장 가까운 이곳에 살지 않을까 했는데...하긴 이시대엔 강가 근처에 사는게 편하겠지. 결국 아니바 만 안쪽까지 올라가 봐야겠네.'

"어쩌시겠습니까? 상륙하시겠습니까?"

"음...저 해안선을 따라 쭉 북상하지."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이곳 섬의 지형을 떠올리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쪽은 만에 가까운 지형 아닙니까? 나중을 생각하면 살짝 돌아가게 될 텐데요."

"그렇지. 다만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과 교류를 트고 싶어서 그러네. 그리고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는 물이 있을 테니 물도 좀 보충하고."

김봉길은 이내 적재한 품목 중에 이상할 정도로 많았던 철제 농기구와 철제 단검, 주방용품 등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그렇게 많은 농기구와 단검, 솥 등을 적재하셨던 겁니까?"

"아아. 나중을 생각해서 미리 친교를 다져놓을 생각이었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진로를 잡겠습니다."

"아마 올라가도 보면 섬 내륙과 연결된 강이 보일걸세. 그곳에서 상륙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김봉길은 배의 진로를 잡기 위해 정성국의 곁을 떠났다.

정성국은 한참을 망원경으로 사할린섬을 샅샅이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그가 탄 지급 함선은 유유히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대방 어르신! 강입니다!"

"아아. 나도 보았네. 강이군. 그리고 저기 원주민이 있네."

정성국이 망원경으로 바다와 연결된 강과 근처에서 지급 함선을 보고 손짓하는 원주민들을 살펴보았다.

"작은 배를 내리게. 상륙하지."

그렇게 명령을 내리면서 정성국도 배를 타고 상륙하려고 준비하려는데 김봉길이 그를 막았다.

"저기 대방 어르신. 일단 선원과 경비대원들부터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성국은 김봉길의 말에 섬에 있는 원주민들을 한번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공격할까 봐 그러는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김봉길의 만류에 곁에 있던 경비대원들도 나서서 정성국의 상륙을 막기 시작했다.

"예. 대방 어르신. 일단 저희가 먼저 상륙한 이후에 상륙하시지요."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저들이 다 만류하는데 굳이 자신이 먼저 상륙하겠다고 고집 피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괜히 자신이 함께 상륙했다가 그를 호위하려고 과도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해서 정성국은 자신을 말렸던 경비대원들을 보면서 당부했다.

"으음. 알겠네. 다만 절대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저들도 똑같은 사람이네. 먼저 위협하지 않으면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게야. 말이 통하지는 않을 테니 저들이 다가오면 일단 웃으면서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리게나."

"예."

"그리고 선장. 떡 남은 것 좀 있나? 조청하고."

"그럼요. 가져올까요?"

"그래. 그거 좀 적당히 가져가서 저들도 적당히 진정하고 나면 내어주게."

"알겠습니다."

김봉길이 눈짓하자 한 선원이 잽싸게 주방으로 달려가서 소쿠리에 남은 떡과 조청이 담긴 사기그릇을 가져왔다.

작은 배로 내려간 선원 4명과 소총을 든 경비대원 6명이 이를 챙기고 노를 저어 천천히 사할린섬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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