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에 따사로운 햇볕까지.
마치 이번 항해를 하늘이 축복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출항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항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젊은 선원이 정성국을 향해 달려왔다.
"대방 어르신. 출항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곧 가지."
"예. 대방 어르신."
선원이 정성국에게 인사한 후 다시 지급 함선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몸을 돌려 그의 뒤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쯧.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따라 나오더니 언제까지 인상을 찌푸릴 셈이냐."
"형님. 꼭 가셔야겠습니까?"
"이놈이. 또 잔소리하러 나온 게냐?"
"불안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형님."
"어허. 부정 탄다. 이놈아. 그리고 별일 없을 게다. 혹시나 해서 식량이며 물이며 꽉꽉 채워뒀으니 말이다."
"..."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동생을 보면서 정성국은 피식 웃고 나서 동생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 말거라. 내가 없는 동안 네가 고생 좀 하고."
"형님. 동생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소원? 일단 들어보고. 뭔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평국은 바로 인상을 펴고 형을 간절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무사히 돌아오시면 제발 혼인 좀 하셔서 가정을 이루시지요."
혼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성국은 질색하며 말을 흐렸다.
그가 딱히 여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15살 아이와 결혼한다는 게 예전 기억이 있는 정성국으로는 꺼려졌기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을 뿐.
거기에 같은 15살이라 하더라도 현대인의 신장과 조선인의 신장이 다른지라 아무래도 더 어려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어렸을 때부터 균형 잡힌 식단을 통해 체격을 키워왔기에 조선인치고는 큰 편이라 더욱 그랬다.
이건 정평국을 비롯해 그가 어렸을 때부터 먹는 것으로 유인했던 아이들도 비슷했고.
"...끙. 그건 좀 생각해보자."
"아니. 형님. 대체 왜 그리 혼인을 하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북미에 다녀오는데 무려 1년이 걸린다고 했으니 내년이면 형님도 스무 살입니다."
"흠...벌써 그리되었나."
그러면서 정성국은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 항구를 바라보았다.
정평국은 그런 정성국의 행동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말 돌리지 마시구요. 15살이 되자마자 관례를 치르고 상투를 트시기에 혹시 결혼할 상대가 있나 했더니만..."
동생의 말에 입이 삐쭉 나온 정성국이었다.
'누군 상투를 틀고 싶어서 틀었냐. 마음 같아선 확 반삭을 하고 싶을 정돈데...대체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이러고 살았나 몰라. 나중에 북미로 이주하고 나면 가차 없이 잘라버려야지.‘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던 정성국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상투가 없으면 얕보이니 어쩔 수 없이 한 게지. 너도 그렇지 않으냐."
"뭐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조선에서는 상투를 틀어야 어른으로 취급한다.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고 반대로 나이를 먹고도 결혼을 못 해 상투가 없으면 어른 대접을 못 받았다.
애송이라고 취급하고 제대로 상대를 안 해준달까?
해서 정성국은 어쩔 수 없이 15살이 되자마자 바로 상투를 틀긴 했다.
상투를 틀었다고 한들 이곳 사람들은 미혼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이곳 사람들이 정성국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가끔 만나는 한성의 양반들이야 그의 사정을 알 리가 없고.
다만 상투가 덥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꼼수로 배코 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라 훗날 북미에 자리를 잡게 되면 가차 없이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할 생각을 하는 정성국이었다.
"아무튼 형님이 어서 혼인하셔야 저도 혼인을 할 거 아닙니까."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동생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오호. 맘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그래서 조르는 거냐? 누구냐? 언제 만난 게냐?"
그러자 정평국은 뚱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예전 말투를 썼다.
"만나기는 무슨. 가뜩이나 형님이 넘겨준 일거리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늘 그게 가당키나 하오? 형님이 혼인하시고 나면 아우를 위해 일거리 좀 줄여주시구려."
"에이...원래 연애라는 것은 바빠도 시간 내서 틈틈이 하는 게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무슨..."
툴툴거리던 정평국은 이내 좋은 생각이 난 건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허면 이 동생도 결혼할 처자를 구해볼 테니 형님도 다녀와서 참한 규수를 만나 혼인을 하시구려. 그럼 되겠구만."
그런 동생의 반응에 콧방귀를 끼는 정성국이었다.
"흥. 굳이 그럴 필요야 있느냐. 그냥 너부터 가면 되는 것을."
"아. 그게 말이 되우?"
"안될 건 또 뭐냐. 혹시 마음에 드는 규수가 있다면 이야기하거라. 내 다녀와서...아. 아니다. 어휴. 큰일 날뻔했네."
"예?"
'이거 완전 사망 플래그 였잖아. 어휴. 이놈은 나오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듣고 나와서 사망 플래그를 세울뻔하게 만들어.'
지금 배를 타고 있는 선원들도 대선의 시험운항으로 초장기 항해를 시험해본다고 알고 있었다.
해금령이 어느 정도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나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별일 아닌 것처럼 포장했고 이곳에 나와 그를 배웅하겠다는 사람들도 미리 정성국이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해두었었고.
정성국은 말 안 듣는 동생을 한번 째려본 후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 아무튼 난 북미에 개척한 이후에나 혼인할 생각이니 그리 알고 너나 짝을 찾아보거라."
"으으음...너무 늦지 않소?"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어서 그런다."
그 말에 정평국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정치적으로 말이요?"
"그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이었다.
정평국은 정말 개척이 성공한다면 훗날 정성국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서 왕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만큼 배필을 들이는 것도 매우 신중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내 수긍하고 다시 예를 차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동생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리면서 동생의 등을 팡팡 쳐줬다.
"자. 그럼 슬슬 가봐야겠다."
"예. 형님."
"내가 없는 동안 잘 이끌어나갈 거라 믿는다."
"걱정 마십시오."
정성국은 정평국에게 가까이 가서 혹시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죽이면서 말했다.
"그리고...내가 전에 말했던 거 다 기억하고 있지?"
"예. 형님. 천금을 써서라도 꼭 구해올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는 동생을 보면서 그의 의욕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아니 뭐...굳이 천금까지 쓸 필요야 없고...아무튼 믿는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정성국은 정평국의 어깨를 두드린 후 몸을 돌려 지급 함선으로 올라갔다.
그런 정성국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정평국은 속으로 무사를 기원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형님.'
* * *
정성국이 드디어 배에 오르자 이 배의 선장인 김봉길이 살짝 긴장된 얼굴로 다가왔다.
"대방 어르신. 이제 출항하겠습니다."
"이 배의 선장은 김봉길 자넬세. 굳이 나한테 일일이 보고 하지 않아도 되네."
"에이. 그럴 수야 있나요."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린 듯해 보여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뭐...알아서 하게. 다만 이 배의 선장은 자네고 이 배와 선원을 책임지는 사람도 자네일세. 난 그저 손님일 뿐이고. 알겠나?"
김봉길은 정성국이 무슨 의미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 예정대로 북동쪽으로 진로를 잡겠습니다."
"그러게. 일단 저번에 일러준 대로 가세."
비록 목적지를 숨긴다고 한들 선장인 김봉길에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해서 그를 불러 그가 그린 지도 중에 가장 커다란 세계지도를 꺼내놓고 대략적인 항로를 일러주었다.
그가 이번에 항해하려는 항로는 이렇다.
개척촌에서 출발해서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라페루즈 해협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다 쿠릴 열도를 발견한 후 쿠릴 열도 따라 북동쪽으로 쭉 올라가 캄차카반도의 최남단을 발견하고.
그 후 동쪽으로 배를 틀어 알류샨 열도를 따라 북미의 알래스카 지역에 도착해 해안가를 따라 쭉 남하하는 항로였다.
물론 대략적인 항로일 뿐이고 그때그때 상황을 봐서 어느 정도 변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항로를 정한 이유는 중간중간 정박할 곳을 미리 탐사해볼 생각에 이런 항로를 택했다.
나중을 생각해서였다.
사할린의 남쪽이나 쿠릴 열도의 여러 섬, 그리고 캄차카반도와 알류샨 열도의 섬들까지.
탐사할만한 지역은 많았으니까.
그나마 정성국은 예전 기억이 있었기에 러시아나 미국이 거주했던 섬을 위주로 탐사해볼 계획이었다.
최소한 그들이 마을을 만들었다는 의미는 물은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문제라면 오히려 지명인데...이걸 내가 기억하는 데로 써야 하나?'
지금 시기의 북태평양은 유럽인들에게 말 그대로 미지의 장소였다.
그나마 러시아가 동진 정책으로 꾸준히 동쪽으로 나아가 대략 10년 전쯤에 오호츠크해를 발견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후에 북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탐사대를 조직했을 정도니 말이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명을 받아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동쪽으로 탐험했던 덴마크 태생의 탐험가이자 항해사였던 비투스 요나센 베링은 앞으로 20년은 지나야 태어날 테니 베링해, 베링 섬, 베링 해협 등은 아직 이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훗날 북미를 탐낼 러시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탐사했던 지역엔 비석이라도 세우고 동판을 박아서 흔적을 남겨야겠네. 특히나 알래스카는 절대 넘길 수는 없지. 암. 사람만 많으면 사할린이나 캄차카반도도 꿀꺽하면 좋겠지만...그거야 욕심일 테고.'
이시기엔 미지의 땅을 탐사하기 위해 왕이 탐험가에게 의뢰를 맡기고 탐험가는 미지의 땅을 탐사한 후 지도를 만들어 왕에게 보고하면 왕은 그 지도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는 시대였다.
그런 만큼 그가 먼저 흔적을 남긴다면 최소한 자신들의 땅이라고 선언하고 편입하지는 않겠지 싶은 정성국이었다.
물론 원주민들을 제대로 된 사람 취급하지 않는 유럽인들이라면 그냥 무시할 수도 있긴 했지만.
'정착하고 나서 꾸준히 북쪽으로 탐사선을 보내야겠네. 그리고 최소한 알류샨 열도의 섬 하나에는 조그마한 해군 기지라도 만들어서 러시아인들을 막아야겠어. 안 그러면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은 죄다 죽을 테니. 기억해두자.'
북미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싶었던 러시아의 동진으로 인해 사할린의 원주민부터 시작해서 알래스카의 원주민들까지 몰살했던 것을 기억하는 정성국은 최소한 훗날 러시아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은 막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의 예전 기억 때문에 원주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방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북미대륙은 광활하다.
조선에 사는 백성들을 열심히 빼 오려 해도 얼마나 데리고 올 수 있겠는가.
그런 만큼 북미대륙에 사는 여러 원주민은 무척이나 소중했다.
'최대한 피해 안 가게 잘 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잘 꼬셔봐야지. 쩝. 사람의 여유만 있다면 사할린이나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도 살리고 싶긴 한데...쯧.'
정성국이 선수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급 함선이 닻을 올리고 항구를 빠져나와 조선인들에게는 아직 미지인 먼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660년 7월 15일.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첫 북태평양 탐사대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