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스승의 말에 잠시 지급 함선을 떠올린 강평화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아예 아무런 화포도 달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애초에 스승님이 건조한 함선들은 후장식 대포를 장착할 것을 상정해서 극단적으로 포 갑판의 면적을 줄이지 않았던가.
지급 함선의 포문은 고작 4개.
선수 부근에 2개, 선미 부근에 2개뿐이다.
그리 설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선원의 문제도 있었고 적재량의 문제도 있었다.
물론 후장식 대포, 속사포를 장비할 거라 가정하고 만들었기에 그런 설계가 나왔고.
이 시대의 함선에 장착된 대포는 전후로만 움직였다.
대포를 쏘면 그 충격에 대포가 뒤로 밀리고 다시 선원들이 장전한 후 대포를 포구까지 밀고 불을 붙여 다시 쏘고.
이에 반해 정성국은 겨우 포 하나가 들어갈 포문을 좌우로 길게 늘였고 포가 놓일 자리에 철제 회전판을 달아 회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정성국이 만들려는 후장식 대포는 속사가 가능했고 덕분에 적은 대포의 수로도 충분한 화력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거기에 쇠구슬도 아니고 작렬탄을 사용할 생각이었으니.
처음에는 아예 선수와 선미 갑판 위에 함포를 한 문씩만 장착할 생각이었지만 기선이 아닌 범선이다 보니 생각외로 갑판 위가 복잡할것 같아 자연스럽게 포 갑판으로 내려왔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최대한 많은 범위를 커버하기 위해 기존 2문에서 4문으로 바뀌긴 했고 덕분에 잘하면 동시에 2문이 같은 표적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다.
헌데 그런 설계 사상으로 건조한 함선에 쇳덩이를 날리는 천자총통이라니.
강평화는 생각을 마치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의구심을 표했다.
"으음...지급 함선은 포문이 4개뿐이지 않습니까. 연사속도가 빠른 후장식 대포라면 몰라도 전장식 대포인 천자총통은 효용성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포탄을 좀 바꿔볼 생각이다."
"포탄을...말입니까?"
"그래. 대장군전을 아느냐?"
단순 쇳덩이를 날리는 것이 아닌 스승님이 만들었다던 작렬탄이라도 날릴 생각인가 싶었던 강평화는 정성국이 대장군전을 입에 올리자 순간 머릿속이 번쩍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설마 대장군전 앞부분에 화약을 넣으실 생각이십니까? 비격진천뢰처럼?"
"정확하다. 그리하면 비록 연사속도는 느리다 할지라도 한방에 배 한 척을 격침하는 것도 가능할듯싶구나."
강평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대장군전이 배에 꽂히고 잠시 후 대장군전이 폭발하면서 커다란 배를 산산조각내는 것을.
대장군전에 많은 화약을 넣는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오오. 과연. 한방에 배를 격침할 무기라...허면 그 작렬탄이라는 것을 대장군전 위에 그대로 달면 되겠습니까?"
"원리야 같겠지만 아마 새로 만들어야 할 거다. 일단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지금 후장식 소총이 얼마나 있더냐?"
"갑오(甲午) 소총 말씀이십니까? 아마 100자루가량 만들어 두었습니다."
정성국은 후장식 소총에 따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그는 예전 기억이 있으니 작동방식에 따라 롤링블럭 라이플이라고 부르고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를 사용할 조선인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해서 그냥 이름을 붙이지 않고 후장식 소총이라 부르곤 했지만 다른 이들은 갑오년(1654년)에 만든 소총이라 하여 갑오 소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탄환은?"
"아마도 5천 발 정도 만들어 둔 것으로 기억합니다.
"흠...1인당 50발인가? 전장식 소총이라면 충분하겠지만 후장식 소총이라면 전투 한번 치루면 순식간에 소모될 테지. 당장 5만 발 정도를 만들어야겠구나. 그리고 후에 최소한 후장식 소총은 1천 정, 탄환은 50만 발 이상을 만들어 둬야겠구나."
정성국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응접실에 있던 5명이 모두 급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허억! 그렇게 많은 양을...설마?"
'꿀꺽'
제자들의 긴장 어린 얼굴 뒤로 묘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확인한 정성국은 속으로 혀를 차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진짜...내가 교육을 잘못하긴 했나 보네. 어찌된게 죄다 반정무새인건지. 쯧.'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게다."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 낙담해 시무룩한 얼굴을 했고 강평화만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허면 저 많은 양을 왜?"
"조선을 떠나 다른 곳을 개척할 생각이다. 그때 필요할 테고."
정성국의 선언에 시무룩해져 있던 제자들이 기겁했다.
"허억!"
"으음..."
다들 머릿속에 세계 지도를 떠올리며 고민하는 중에 새로운 배를 연구 중인 최주명이 정성국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어느 곳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북미 대륙을 생각하고 있다."
"허면 이번에 건조된 지급 함선으로 태평양을 건너실 계획이십니까?"
"그래. 내가 직접 북미 대륙을 둘러볼 생각이다."
그 말에 다른 제자들이 모두 나서서 정성국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건! 위험합니다! 스승님!"
"어찌 그런!"
"안됩니다! 스승님!"
그런 제자들의 만류를 정성국은 단호하게 끊어냈다.
동생도 말리지 못한 일을 제자들이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 이주할 곳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 계획을 정할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태평양은 무척이나 넓지 않습니까. 기다리셨다가 천급 함선이 건조되면 그때 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한시가 급하다. 천급 함선이 언제 완성될 줄 알고 기다리겠느냐. 그리고 지급이든 천급이든 태평양을 생각하면 조각배나 다름없는 것은 매한가지고."
또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고작 100톤급의 카락으로 제대로 된 항로도 모르는 채 태평양을 횡단했다.
헌데 세계 지도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고 거기에 1천 톤급의 지급 함선을 가지고 주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
"어쩔 수 없다. 이미 북미 대륙엔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단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더 힘들어질 게다."
정성국이 이리 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프랑스 때문이다.
1680년대에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이 멕시코 만에서 미시시피 강의 입구를 탐험하고 2년 뒤 다시 나타나 미시시피강을 둘러싼 모든 영토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며 루이지안(Louisiane)이라고 이름 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정착하는 것은 아니고 선언만 하고 탐사하다 물러나긴 하지만 이때 이후로 프랑스인들은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령으로 주장하기 시작하는 만큼 그 전에 그곳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다.
20년 안에 캘리포니아에서 루이지애나까지 동진해야 하니 말이다.
다만 만약 이때를 놓친다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리니 최대한 노력해 볼 생각을 하는 정성국이었다.
'유럽 놈들처럼 개척촌이나 요새 하나 짓고 근방의 땅은 모두 우리 땅이라고 우기는 수밖에. 안 그러면 프랑스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그건 곤란해. 그렇다고 캘리포니아 왕국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캘리포니아주만 해도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다.
거기에 곳곳에 수많은 산이 존재하는 한반도와는 달리 캘리포니아주의 중앙은 그저 광활한 지평선만 보이는 엄청나게 넓은 평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좀 들어가면 남북으로 기다란 분지에 가까운 평원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농사짓기에 굉장히 적합할뿐더러 이 기다란 평원의 면적이 한반도의 전체 면적과 비슷할 정도니 솔직히 캘리포니아 지역만 잘 건사해 발전시켜도 강국이 될 수 있기는 했다.
문제라면 이 경우 대서양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훗날 북미 동해안과 대평원을 장악한 미국이 이웃 국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고로 인접 국가가 강해 봐야 좋을 것은 없다.
그렇기에 조금은 무리하더라도 최대한 빠른 확장을 생각하고 있던 정성국이었다.
거의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그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아메리칸 원주민.
이들을 끌어들인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프랑스 역시 오대호 인근부터 미시시피강 하류까지 북미 대륙의 중앙을 장악했을 때도 실질적으로 프랑스 인구는 고작 1만 5천 명이 다였다.
프랑스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동맹을 맺고 그 지역을 자신의 땅이라고 우겼으니 자신이 먼저 같은 방법을 사용해 볼 생각인 정성국이었다.
"음..."
"전에 듣기로 북미는 저 유럽의 제국인 스페인 제국의 땅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그들과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서 무기를?"
"명목상 선언을 했지만 아직 실질적으로 그들의 땅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만들어 두자는 거다."
"으음...알겠습니다. 장인들에게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강평화를 보고 양산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성국이었다.
지금까지는 소규모 장인들이 한두 정씩 만들어 비축해뒀기 때문이다.
"양산은 가능하겠느냐?"
그러자 증기기관을 담당하던 박기동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 이번에 개량한 증기기관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 개량을 하였느냐?"
"이제 20마력까지는 나옵니다. 후장식 소총에 들어가는 부품을 가공하는 건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처음 그가 대장장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증기기관의 시제품이 고작 5마력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물론 정성국은 후기의 더 발전된 증기기관의 설계도도 알고 있긴 하지만 당장 건네줘 봐야 의미도 없기에 그가 잘 알고 있는 화약과 화기류를 제외하면 최대한 이들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 초기의 설계도부터 건네주었었다.
"네가 정말 고생했겠구나."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지요. 정말 태평양을 건너 북미로 이주하려면 더욱 커다란 배가 필요할 테니 배에 장착할 정도로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흠...차라리 설계도를 확 풀어버릴까? 여기서 증기기관을 키우면 압력을 버틸 수 있으려나 모르겠는데...그래도 조금만 증기기관을 개량하면 증기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조그마한 기선이라도 만들어서 기술 축적부터 해볼까? 이왕 만드는 거 스크류 추진 방식으로 하면...'
정성국은 생각을 끝내고 선박을 연구하는 최주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명아. 새로운 배를 추가로 만들 여력이 있겠느냐?"
"음...솔직히 계획대로 천급을 건조하는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인급, 지급의 건조를 중단한다면 가능하겠습니다만...저 스승님."
"말해봐라."
"정 그러시면 천급은 일단 보류하고 남은 인력을 모두 지급 함선 제조에 투입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천급은 인력도 인력인데 쓸만한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북쪽에서 용골로 쓸만한 나무를 구해와서 간신히 지급을 만들었는데 천급은..."
정성국은 잠시 고민해보다가 쿨하게 포기하고 방향을 바꿨다.
'천급은 북미에 가서 만들던가 하지 뭐. 천급 까지는 가능할줄 알았더니.'
"그렇단 말이지...허면 천급을 보류하고 거기에 투입될 인원과 재물을 지급으로 돌린다면? 1년에 지급을 몇 척이나 건조할 수 있지? 4척 가능한가?"
정성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주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도 개척촌 대부분의 역량을 동원해 배를 건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립니다. 스승님. 잘해야 2척이 한계입니다."
"인력은 증원해줄 거다. 가뜩이나 개척촌의 소문이 백두대간을 따라 퍼져서 수많은 유랑민과 화전민들이 유입되고 있으니 말이다."
인력을 보충해준다는 정성국의 말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최주명이었다.
"끙...그들을 교육시키는 것만 해도 일입니다만...그러면..."
정성국은 조심스럽게 머릿속에서 계산중인 최주명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새로운 배를 건조할 것까지 계산해야겠지...?"
스승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최주명이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후 입을 열었다.
"...최소한 2배 이상 인력이 늘어난다면 가능은 하겠습니다만...어떠한 배를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기선을 한번 만들어볼 생각이다."
기선을 언급하는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이 반색했다.
그에 반면 최주명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기선을요? 아직 증기기관을 더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일단 조그맣게 만들어 기술을 축적해야겠지. 허니 약간의 인력만 있으면 될 게다."
"아. 시범적으로 제조한 후 개량해 나가실 생각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인력을 좀 빼보겠습니다."
새로운 증기기관의 크기를 생각해보고 어차피 기술 축적을 위해 만드는 만큼 굳이 큰 배에 장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판옥선이라도 하나 구해 개조할 생각으로 표정이 밝아지는 최주명이었다.
"그래. 일단 기동이와 함께 연구해보거라."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상황을 확인한 정성국은 제자들을 쭉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면서 나도 연구를 돕겠다."
"오오!"
"다만 그 이후 무기가 준비되면 바로 북미로 떠날 생각이니 내가 없더라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예!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