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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화 (7/850)

7화

정성국은 연구소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다가 조그만 공터가 보이자 잠시 멈추고 숨을 돌렸다.

이에 그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오던 경비대원들도 함께 멈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정성국은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멀리 보이는 개척촌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개척촌의 풍경은 그에겐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중앙에 행정청을 중심으로 수많은 2층짜리 벽돌 건물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고 그 외곽에는 벽돌 건물로 세워진 넓은 면적의 공장으로 사용하는 1층 건물들이, 해안가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현대식 느낌이 나는 부두와 그 외곽으로 텅 빈 커다란 규모의 건선거까지.

살짝 높은 곳에서 개척촌을 바라보니 정성국의 눈에는 조선의 마을이라기보다는 옛 유럽의 소규모 도시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건물은 원상에서 고용한 대목장들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나 단기간에 많은 사람의 머물 집을 만들어야 했기에 기존 조선의 건축방식보다는 벽돌을 구워내 2층 건물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숙소를 만든 결과 이런 이국적인 풍경이 탄생했다.

정성국은 잠시 개척촌을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오는 다른 건물들보다 커다란 행정청을 바라보고 그곳에 있을 윤휴를 떠올리며 안색을 굳혔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골수 유학자였다면 아마 크게 화를 내고 절교를 선언하며 개척촌을 떠났으리라.

하지만 10년 넘게 윤휴와 교류하면서 그의 사상도 조금은 변했다.

무턱대고 북벌을 꿈꾸던 윤휴는 어느덧 바깥세상을 잘 알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만이 조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던 윤휴는 어느덧 백성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짐작했기에 그의 아들인 윤의제를 개척촌에 끌어들였던 것이고.

정성국의 짐작대로 윤휴는 별다른 말 없이 윤의제가 개척촌의 일을 돕는 것을 허락했고 윤의제의 서찰을 통해 호기심이 생겼는지 개척촌이 생긴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개척촌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이국적인 풍경에 신기해하고 건선거에서 커다란 함선이 건조되는 것을 보며 감탄하던 윤휴였지만 곧 유민들이 몰려들고 윤의제 혼자서 일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혀를 차며 그의 아들을 도왔다.

그런 행동을 보면 확실히 윤휴가 그가 기억하던 윤휴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진심을 내보였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나중에 윤휴를 통해 옛 북인 계열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원상의 주축은 정성국이 어렸을 때부터 먹을 것으로 유인해 가르쳤던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몫을 해내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경륜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그가 가르쳤던 아이들 대부분은 그의 성향에 따라 연구나 공업, 상업에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자리를 잡았기에 아무래도 행정을 맡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은근슬쩍 행정청의 수장 자리를 객이었던 윤휴에게 날름 맡겨버리고 연구소에 틀어박혔던 것이고.

그런 만큼 북미로 이주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행정을 맡을 사람들이 필요한데 이 사람들을 어디서 찾겠는가.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정성국은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윤휴는 오랫동안 교류했고 덕분에 그가 어느 정도 변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의 성향과 맞았기에 끌어들였지만, 윤휴가 끌어들일 다른 유학자들은 믿기 어려웠다.

특히 그는 조선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게 아닌 새로운 지역에 정착해 독립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다른 유학자들을 끌어들이게 되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고.

'차라리 지금 교육시키는 아이들 중에 일부분을 행정쪽으로 돌리는 게 더 나으려나. 적당히 가르치고 행정청에 배속해 실무를 좀 익히게 한 뒤 바로 북미로 보내버리면?'

그가 한참을 개척촌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묵묵히 호위에 열중하던 경비대장 이경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방 어르신. 곧 해가 떨어질 겁니다. 바람도 차구요. 속히 이동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아. 벌써 이리 시간이 흘렀구나. 어서 가자꾸나."

그는 이경석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개척촌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산속의 해는 빨리 떨어지기 마련.

그것을 아는 정성국과 경비대원들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고 곧 그들의 눈에 연구소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소 건물들이 위치한 곳은 개척촌과 인접한 뒷산의 작은 분지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외딴곳에 연구소를 지은 까닭은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아무리 그가 만들어 둔 방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더라도 잘못하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었고 거기에 화기를 만들고 시험해보려면 최대한 개척촌과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었다.

그렇기에 산속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 건물을 늘려 나가다 보니 자그마한 연구 단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연구 단지 외곽 건물의 옥상에 마련된 조그만 초소에서 경비대원들이 자신을 보며 손을 들어 경례하는 것을 보고 미소지으며 그를 호위하던 이경석에게 물었다.

“연구소를 지키는 경비대원의 수가 좀 는 것 같군?”

“예. 이제 30명 정도 됩니다.”

“그렇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곧장 이동해 연구 단지 중앙에 있는 2층 건물로 걸어갔다.

이곳 연구 단지에서 가장 커다란 이 건물은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정성국 역시 한성으로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고.

그가 건물 근처에 도달했을 때 안쪽에서 여러 사람이 그를 마중하기 위해 달려 나왔다.

"""스승님!"""

"오랜만이구나. 잘들 있었느냐?"

"""예. 스승님."""

정성국은 자신을 마중 나온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길러낸 인재들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먹을 것으로 양민이나 노비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쳤고 개중에 가장 똑똑하고 과학에 흥미를 보이는 아이들을 뽑아 그가 준비해두었던 교과서로 미래의 지식을 그대로 가르쳤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지금 저들은 충분히 과학자, 혹은 공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정성국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몹시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정성국을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이자 새로운 학문의 시조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성국이 그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교과서를 직접 집필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 지식의 출처를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답할 수 없었던 정성국이 서양의 여러 책을 보고 그 정수를 뽑아 발전시켰다고 둘러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정성국을 마치 유학자들이 공자나 주자를 대하듯 몹시도 공손한 자세를 보였다.

처음에 정성국은 점점 커가면서 그러한 이들의 태도를 깨닫고 잠시 고민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같이 지내다 보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내버려 뒀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러한 태도는 점점 더 고착화되었다.

정성국의 입장에서는 연구가 어떻게 진행될지, 어떤 문제가 생길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모두 기억났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 처지에서는 한눈에 모든 연구 결과를 파악하고 그 문제점까지 해결하는 모습으로 보였으니 점점 더 경외심만 생길 뿐이었다.

나중에 이를 파악한 정성국이 아차 하며 뒤늦게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해서 정성국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들 중에 가장 가운데에 서 있던 더벅머리의 청년이 한 발짝 다가와 정성국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청했다.

"스승님. 일단 들어가시지요. 스승님이 쓰시던 방을 정리해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꾸나."

"예."

정성국은 익숙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바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 그가 예전에 머물던 2층의 꽤 커다란 방으로 이동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에는 그가 이곳에서 머물며 회의실로 사용했던 응접실과 그 안쪽에 있는 침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그는 익숙하게 응접실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고 그를 따라온 사람 중에 5명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남은 자리에 앉았다.

정성국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화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강평화, 증기기관을 개량하는 일에 전념하는 박기동, 양질의 강철을 대량 양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김신철, 원상의 돈줄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물품을 개발하는 일을 맡은 이상돈, 선박을 연구하는 일을 하는 최주명.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화약 생산을 총괄하며 최고의 보안속에 화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는 전아라까지.

이들이 이 연구소의 핵심인력이자 정성국이 가르친 아이들 중에 가장 특출난 아이들이었다.

이젠 다들 장성한 어른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이 맡은 분야에서는 정성국과 비교해도 지식수준은 비슷할 정도였고.

그렇기에 정성국도 이제는 대부분의 일은 이들에게 맡기고 한 발짝 떨어져 조언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잘들 지냈느냐?"

""예.""

"연구에 진전은 좀 있었고?"

정성국의 말에 다들 쓴웃음을 짓거나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유독 이상돈만 표정이 밝았다.

이를 알아챈 정성국은 기대 섞인 목소리로 이상돈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돈아. 성공한 게냐?"

"예. 스승님. 판유리의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오! 그래?"

정성국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유리 제조에 성공한 것을 알고 판유리의 제조를 연구하라고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었다.

"헌데 이거 돈이 되긴 하겠습니까? 깨지기 쉬워서 함부로 운송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어차피 배로 운송하는 만큼 포장만 잘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만...정 안되면 한성에 따로 공방을 차려야겠지."

"한성에 말입니까?"

"그래. 판유리도 사치품으로 만들어 양반들에게 팔아넘겨야지.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쓰게 만들면 되겠지. 어차피 한성 지부는 돈있는 양반네들과 연줄이 다 있지 않느냐. 한성 지부에서 판유리를 받아 창을 만들어 비싸게 팔면 그것도 꽤 남을게다. 다만 기술이 세어나갈 수 있으니 일단은 이곳에서 만들어 배로 운송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유리를 다루는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갔으니 이젠 거울과 렌즈를 만들어 보거라."

"거울과 렌즈?"

"그래. 거울이야 동경을 대체할 테니 꽤 돈이 될테고...렌즈는 수정을 깎는 대신 유리를 오목하게 만들면 된단다. 언제까지 수정을 깎아서 망원경을 만들 수는 없지 않으냐."

그 후 정성국이 대충 어찌 만들어야 할지를 설명하자 이상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바로 장인들을 불러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정성국은 이내 고개를 돌려 대포 제작을 맡고 있는 강평화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래. 평화야. 후장식 대포의 개발에 진전은 있느냐?"

"송구합니다. 스승님."

"밀폐 문제와 철의 강도 문제겠지?"

"예."

그러자 김신철이 나서서 고충을 토로했다.

"스승님. 아무래도 전에 저에게 건네주셨던 책에 써있던 그 코크스라는 것을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이 이상 제철 기술을 발달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문제는 역청탄은 조선 내에는 없다는거지...만주에는 있을테지만...그림의 떡이고.'

정성국은 고개를 흔들며 김신철을 보고 입을 열었다.

"쩝...당장 구할 방도가 없으니...일단 지금의 철 생산량만 유지하렴."

정성국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김신철을 보면서 정성국은 당장 후장식 대포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

미세 금속 가공 기술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고 역청탄 역시 북미에는 널려있을테니.

거기에 이곳에 오면서 다른 괜찮은 방법을 구상해두지 않았던가.

"흐음...일단 후장식 대포의 개발은 잠시 미뤄야겠구나. 혹시 연구소의 장인 중에 천자총통을 만들어 본 장인이 있느냐?"

"예. 예전 군기시 소속의 장인이 몇 있습니다만 갑자기 천자총통은 왜?"

강평화는 갑자기 천자총통을 거론하는 정성국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당장 지급 함선에 함포를 달긴 해야 하니 천자총통을 몇 문 만들어 달 생각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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