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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화 (6/850)

6화

윤휴(尹鑴).

정성국이 어렸을 때 연이 닿아 교분을 맺게 된 유학자다.

기본적으로 정성국은 유학자들과 교분을 맺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생각했던 조선의 개혁을 생각한다면 아예 그들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그나마 자신과 성향이 맞는 인물이 바로 윤휴였다.

윤휴는 실학자였던 이수광의 아들인 이민구와 이원익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기에 그나마 실학에 관대한 편이었다.

거기에 훗날 호포법(戶布法), 상평제(常平制)의 실시와 전정(田政)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양반조차 병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지패법(紙牌法)까지 건의할 정도로 개혁적인 성향이 강한 인사였으니 정성국의 입장에서는 교류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인사였다.

해서 정성국은 어렸을 때부터 그와 편지를 통해 교류하기 시작했고 교류하다 보니 확실히 성향이 어느 정도는 맞았기에 꽤 친분이 생겼다.

물론 후에 윤휴가 직접 정성국을 찾아와 아직 10살짜리 꼬맹이라는 사실에 몹시 놀라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정성국은 그와 교분을 나누며 그에게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리는데 여러 노력을 다했다.

정성국이 아는 상인을 통해 청국에서 들여온 책이라며 자신이 만든 이런저런 책을 넘겨주기도 했고.

그러다 개척촌을 만들고 이를 관리할 만한 사람이 필요해 윤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다고 조선 내에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윤휴에게 고작 개척촌을 맡아달라고 한 것은 아니고 그와 친한 윤휴의 장남인 윤의제(尹義濟)에게 도와달라 부탁했었다.

윤의제는 정성국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기에 꽤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부친인 윤휴가 정성국이 건네준 여러 서책에 흥미를 느끼고 관직에 나서지 않고 있었으므로 본인 역시 그저 공부만 하던 와중이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지금 개척촌을 맡아 실무를 경험한다면 훗날 좋은 목민관이 되지 않겠느냐는 정성국의 꼬드김에 넘어가 윤휴 역시 마지못해 승낙했고.

하지만 개척촌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사람이 늘어나고 개척촌의 사람들이 배 곯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보면서 정성국이 평소에 윤휴에게 주장하던 상업과 광업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면서 윤휴 역시 꽤 관심을 보였다.

거기에 개척촌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어 윤의제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하자 잠시 윤휴가 일을 도와주고 있었고.

윤휴도 학문적인 명성이 있을 뿐이지 정성국과 교류하면서 원 역사와는 달리 관직에 나가지 않아 실무는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똑똑한 양반인지라 용케 별 잡음 없이 개척촌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라면 원 역사에서 윤선도가 송시열을 저격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할 때 예송논쟁에 참여한다는 점이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윤선도, 허목과 함께 논쟁에 참여해 송시열을 공격하다 서인에게 찍히는 만큼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어찌해야 할지 고민 중인 정성국이었다.

거기에 1차 예송논쟁 이후로 그 송시열과 서인들과 아예 원수지간이 되어 훗날 경신환국 때 사형에 처해지는 만큼 아예 이쪽으로 끌어들일까 고민했다.

처음엔 그를 통해 조선의 변화를 이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2차 예송논쟁 이후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그가 개혁하려 했어도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주하는데 끌어들이는 게 나아 보였다.

물론 그는 유학자인 만큼 과연 조선을 버리고 떠날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렇다고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에 경청하며 친우처럼 대해주었던 윤휴의 비극을 그냥 두고 보기에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 * *

"호오. 대방 아니신가. 나 행수의 연통에 부리나케 달려왔나 보군? 하하하."

행정청 2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한지에 파묻혀 있다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정성국을 보고 들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윤휴였다.

정성국은 그런 윤휴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백호(白湖-윤휴의 호)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어째 좀 야윈 것 같네만. 뱃길이 험했던 겐가?"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성에서 마음고생이 좀 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음? 무슨 일이라도 있었든 겐가?"

"글쎄요..."

말을 흐리는 정성국을 보고 무언가 일이 있긴 한 모양이구나 싶었던 윤휴는 굳이 정성국이 말을 흐렸기에 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래. 자네 이번에 한성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지? 그곳 돌아가는 사정은 좀 어떻던가."

윤휴의 말에 정성국은 안색이 떨떠름해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별개 있겠습니까?"

그런 정성국을 보면서 윤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수(眉叟-허목의 호)가 상소를 올렸다지?"

윤휴의 말에 이곳에 오면서 우려하던 상황인지라 정성국의 표정이 구겨졌다.

'알고 있었나? 설마 허목에게 이미 서찰이라도 받은 건가?'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정성국이었으나 애써 표정을 바로 하며 별 것 아닌 양 이야기했다.

"예. 뭐 그 일로 꽤나 시끄럽더군요."

"허허.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 대방의 심경이 대충은 짐작이 가는구만. 왜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렸느냐고 생각하는 게지?"

"뭐 명분이란 걸 모르진 않습니다만...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하지. 특히 이번 일은 예법에 관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어찌 보면 금상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로 연결될 수가 있으니 말일세."

정성국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예송논쟁이 고작 예법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실제 효종의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의 문제는 결국 전 왕이었던 효종이 적통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효종이 적통이 아니라면 효종의 자식인 현 임금인 이연(李淵), 훗날 현종으로 불리는 지금의 금상 역시 적통이 아니게 되니.

그동안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강씨가 인조의 손에 억울하게 죽었다며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틈틈이 상소를 올리던 서인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년복(1년)을 주장한 송시열의 주장은 적통인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걸 깨닫고 서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이를 정치 공세로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고.

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고 그러니 난리 치는거지.

하지만 민생이 파탄 난 상황에서 어떻게든 정권을 잡아보겠다고 아웅다웅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성국은 코웃음을 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정통성이 생기면 어디서 쌀이라도 나온답디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윤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윤휴가 정성국과 교류한 지도 거의 1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만큼 그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윤휴가 알고 있던 정성국은 정쟁에 대해 그냥 냉소하며 무시할 사람이지 저리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기에 의문이 들어 이를 물었다.

"허허. 자네답다면 자네답긴 한데 왜 이리 툴툴거리나. 자네는 아예 이런 일은 냉소하며 넘어가지 않던가?"

"그놈의 상복 때문에 조당의 분위기가 안 좋다면서 해금령 논의를 못 하겠답니다."

그제야 정성국의 반응을 이해한 윤휴는 약한 탄식을 내뱉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허어. 그래서 그리 툴툴거렸던 겐가? 길게 보라 하지 않았는가."

"대체 얼마나 길게 봐야 하는 겝니까. 애초에 이미 명나라가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대명률에 집착하는 건지...후우. 이젠 지칩니다."

"음? 자네...?"

정성국을 달래주려던 윤휴는 그의 말이 묘한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런 윤휴의 반응을 보며 정성국은 자세를 바로 하고 윤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호 어르신. 어르신도 공감하실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수많은 유랑민을 고작 땅만 파서 먹여 살릴 수는 없어요. 상업과 공업의 육성이 필요합니다."

"...유학자로서는 좀 껄끄럽긴 하지만 그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다른 유학자들도 그리 생각할 것 같습니까? 특히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

윤휴는 정성국의 물음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윤휴를 보면서 정성국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요. 서인 천하인 지금은 무립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설마 반정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순간 윤휴는 눈매를 좁히고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허면?"

"해서 전 조선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세상은 넓고 빈 땅은 많습니다. 허니 갈 곳 하나 없겠습니까."

"허허. 설마 이곳에 몰려온 유민들을 데리고 저 북쪽 빈 땅으로 가기라도 할 셈인가?"

"그래도 되겠지요."

자신만만한 정성국을 물끄러미 보면서 윤휴는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성국은 대단한 인재였다.

비록 가문은 한미하고 그래서인지 유학자를 냉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의 식견이 대단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통달했으며 신기한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지라 조선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헌데 조선을 떠나겠다니.

조정이 마음에 차지 않으니 나라를 떠난다는 발상 자체가 유학자인 윤휴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정성국이라면 충분히 저런 말을 할 수도 있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한 윤휴였다.

그와 10년 가까이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그의 사상을 짐작했기에.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더 정성국과 교류하며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었고.

그런데 결국은 조선을 떠나겠다니.

윤휴는 어떻게 해서든 정성국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아는가? 개척이라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세. 그동안 사민 정책이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

"흥. 별다른 지원 없이 그냥 사람을 잡아다 던졌는데 잘 돌아가면 그게 더 웃긴 일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성공적으로 개척을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개척촌을 보십시오. 허허벌판에 만든 마을이지만 지금도 잘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조정에 내는 세금과 유력자들에게 들어가는 뇌물만 아니라면 더 커질수도 있습니다."

정성국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기에 윤휴는 내심 동의하며 가능성을 따져봤다.

윤휴가 생각하기에 정성국이 원상의 능력을 총동원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음...북쪽이라..."

정성국은 곧바로 윤휴의 착각을 정정해줬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갈 겁니다."

"허어. 지금 대놓고 해금령을 어기겠다는 겐가?"

"예."

"자네!"

대명률에 명시된 해금령을 어기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목소리를 높이는 윤휴였지만 정성국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해금령은 이미 유명무실 합니다. 밀무역 안하는 상단도 있답니까? 그동안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졌으니..."

허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정성국을 보며 윤휴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해금령 철폐를 원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개척촌에 모인 사람 중 절반 이상이 배를 건조하는 일에 투입될 정도로 막대한 재물을 쏟아붓는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애써 입을 여는 윤휴였지만.

"...언제까지 서인 천하일 수는 없을걸세. 그때가 되면..."

"아니요. 설사 남인 천하가 된다 한들 백호 어르신이 뜻하는 바는 이루지 못할 겁니다."

"어째선가?"

"그들은 결코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요."

훗날 2차 예송논쟁으로 인해 남인들이 승리해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윤휴는 여러 개혁을 주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었다.

그리고 후에 경신환국에 휘말려 사형에 처해졌고.

그것을 기억하는 정성국은 확신에 차 대답했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백호 어르신. 저와 함께 떠나시겠습니까?"

"...자네. 새로운 나라라도 세울 참인가?"

"필요하다면요."

"..."

"백호 어르신. 아직도 북벌을 꿈꾸십니까?“

”...“

”헛된 꿈에 집착하지 마시고 고통받는 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 생각해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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