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정평국은 자신에게 모든 일거리를 맡기고 속 편하게 떠나겠다는 형을 보면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허면 바로 출발할게요?"
"그러고는 싶다만...아마도 길면 1년은 자리를 비워야 할 텐데 바로 떠날 수야 있겠느냐? 일단 개척촌으로 돌아가 미리 계획을 세워둬야겠지."
"1년?! 태평양이 넓은 건 지도를 보고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고 가는 데 1년이나 걸린다는 이야기요?"
"넉넉잡아 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슨 1년 내내 바다에서 머무르겠느냐."
"허면?"
"글쎄다..."
말꼬리를 흐리면서 정성국은 자신의 기억을 뒤지고 있었다.
'아마 필리핀에서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까지 1년에 한두 번 무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그건 그렇게 오래 걸린다기 보단 무역선을 채울 은을 모아야 하는 문제라던가 바람을 기다려 배를 띄우기 위해서 그랬을 테고...'
일단 그가 생각하기에 편서풍과 북태평양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아무리 느린 범선이라 하더라도 3개월이면 충분히 북미 대륙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정성국이 계산해보고 있을 때 대답을 제대로 못 하는 형이 의외던지 크게 웃는 정평국이었다.
"으하하하. 형님도 모르는 것이 다 있소?"
"나라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겠느냐."
"글쎄올시다. 형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니 오히려 신기하오."
"흠...아마 가는데 석 달이면 충분하지 싶다만...실제로 탐험을 해봐야 알겠지."
"허어. 석 달이라니. 망망대해를 그리 오랫동안 항해해야 한다는 말이오? 헌데 그럼 방금은 왜 1년을 이야기 한 거요?"
"범선이라 바람을 기다려야 하니 그렇지."
정평국은 그 말을 듣고 문득 형이 예전에 증기기관을 개발하면서 이야기해줬던 것이 생각났다.
'배에 기관을 장착한 기선이었던가?'
몇 해 전 증기기관을 마침내 완성했다면서 흥분하던 형을 기억하고 있던 정평국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신기하기는 했다.
물을 끓여서 증기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
하지만 신기한 것과는 별개로 이것의 용도에 관해 묻자 흥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정성국이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이 바로 운송수단인 열차와 기선이었다.
철길을 깔아 거대한 쇳덩이가 움직이고 돛도, 노도 없이 오로지 증기의 힘만으로 커다란 배를 움직일 수 있다니.
감탄해서 당장 만들 수 있냐고 묻자 멋쩍게 웃으면서 지금은 어렵고 나중에 만들어보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야 제대로 된 배도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정평국은 형에게 물었다.
"형님이 말한 기선은 어떻소?"
"이놈아. 이제 겨우 지급 함선을 건조했다. 기선을 어느 세월에 만들겠느냐."
"지급 함선 정도면 충분히 큰 배 아니오. 거기에 증기기관을 달면 그게 기선이 되는 것 아니었소?"
"연구소에 있는 증기기관을 이야기하나 본데...그걸론 턱도 없다. 출력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사용을 하지. 그리고 실제로 증기기관의 출력이 올라와도 문제다. 증기기관은 석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몇몇 기항지가 필요하단다."
"음...기항지를 곳곳에 두고 그곳에 석탄을 미리 적재해둬야 한다는 거구려?"
"그렇지."
"허면 형님이 말한 기선은 우리에겐 무용지물 아니오? 태평양은 망망대해더구먼."
"뭐 방법이야 많지. 알류샨 열도의 몇몇 섬에 보급 항을 만들어도 될 테고...그게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하와이라는 섬도 있고. 기항지야 어디든 만들면 그만이다. 정말 골치 아픈 쪽은 증기기관을 개선하는 문제고."
모든 일이든지 뚝딱 해치우던 형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정평국은 실소했다.
"하하. 그것도 형님이 뚝딱 해결할 거라 믿겠소."
"끄응..."
"허면 언제 출발할 예정이시오?"
"흠...일단 이런저런 준비를 하려면 서너 달은 걸리지 않겠느냐."
"알겠소. 형님."
어차피 막지 못한다면 최선을 다해 도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정평국은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성국은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선원의 말에 인급 함선의 갑판으로 나섰다.
갑판으로 나오자 그를 반겨주는 것은 바닷바람과 이 배의 선장 김봉길이었다.
"선장이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정성국이 자신을 마중 나온 선장을 향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러자 김봉길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헤헤. 대방 어르신을 모시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쯧쯧. 이런다고 내가 자네를 지급 함선의 선장으로 임명해줄 것 같나?"
"에이. 선장 중에서 지급 함선을 맡을 사람이 있긴 합니까?"
"정일신 선장도, 박헌수 선장도 있잖나."
정성국이 다른 인급 함선 선장들의 이름을 거론하자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 김봉길이었다.
"에이. 헌수야 범선을 운용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걔는 아직 인급 함선을 더 몰면서 경험을 쌓아야죠. 어디 언감생심 지급 함선의 선장이 된답니까."
"그럼 정일신 선장은?"
"끙...그 녀석보다는 제가 더 배를 다루는 실력도! 선원을 다루는 솜씨도 있다는 거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볼멘소리하면서 자신의 실력이 더 우위라고 주장하는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흐음..."
"어? 뭡니까? 그 반응은? 설마 이번에 건조된 함선의 선장이 정일신 그 녀석입니까?"
"글쎄...좀 고민 중이네만."
정성국이 보기에 정일신 선장이나 김봉길 선장이나 실력은 비슷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항해의 경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비록 지도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들 위험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원상 소속의 선장 중 가장 경험 많은 선장이 필요했고 결국 정일신과 김봉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항해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김봉길은 가족이 있고 정일신은 아직 홀몸이었다.
그렇기에 정일국으로서는 지급 함선의 선장은 정일신을 고려하고 있었고.
다만 저렇게 새로 건조한 배의 선장이 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김봉길을 보니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정성국이 머뭇거리자 김봉길은 자신을 몰라줘서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치면서 말했다.
"아니.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제일 실력이 뛰어나서 처음 건조된 이 녀석을 맡긴 것 아닙니까?"
"자네는 아들이 있지 않나."
정성국이 툭 하니 내뱉은 말을 듣고 김봉길은 순간 멈칫했다.
아들이 있어서 지급 함선의 선장으로 임명할 수 없다는 뜻인가?
아들이 있다고 차별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은 아들이 있기에 배려해주었다는 뜻이다.
김봉길은 그것을 깨닫고 주변을 한번 살펴본 후 조용한 목소리로 정성국에게 물어봤다.
"...무슨 의미입니까? 설마..."
"고작 연안 항해나 하려고 지급 함선을 건조한 것 같나?"
"먼 바다로 나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렇다네. 꽤 고달픈 항해가 될 테지. 항로를 개척해야 하니 위험하기도 할 테고."
정성국의 뜻을 알게 되자 김봉길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대방 어르신의 뜻대로 할까?
똘망똘망한 5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뱃사람으로서 거대한 배의 선장이 될 기회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에 정성국의 말을 듣자니 지금처럼 연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해가 될 것 같은데 위험할 수도 있으니 포기하라고?
애당초 배를 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그나마 예전과는 달리 원상에 들어온 이후 그가 맡은 선박의 크기가 커져서 오히려 안전해졌지.
거기에 만약 무슨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원상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보살펴 줄 것이다.
예전에 원상의 보부상 중의 한 명이 호환을 당했을 때도 그들의 가족을 잘 챙겨주던 정성국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김봉길은 자신이 원상에 소속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정성국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계속해서 성공해야 자신과 가족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고.
헌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 항해는 굉장히 중요해 보였다.
이번 항해를 위해 지급 함선을 건조한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항해를 성공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생각하기에 원양 항해라면 정일신 보다는 자신이 낫다고 판단했다.
다른 실력은 다 비슷할지언정 자신이 정일신보다 나이도 많고 그만큼 바닷바람을 맞은 시간도 더 길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김봉길이 단호한 어조로 정성국에게 이야기했다.
"...그런 뜻이라면 더욱 저를 선장으로 임명하셔야 합니다. 대방 어르신."
"어째서 말인가?"
"저야 만약에 물고기 밥이 된다 할지라도 제사 지내 줄 아들 녀석이라도 있지요. 정일신 그 녀석은 제삿밥 차려줄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자네 아들 아직 5살이네만..."
"제가 만약 잘못되더라도 원상에서 제 가족을 잘 챙겨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최소한 대를 이어줄 아들이 있는 제가 가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제가 정일신 그 녀석보다는 경험도, 실력도 더 좋다는 겁니다."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뜻을 잘 알 것 같았으니까.
김봉길의 가족을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김봉길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보이는 개척촌의 항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후회하지 않겠는가?"
정성국이 결정을 바꾼 것처럼 보이자 김봉길은 표정을 바꿔 활짝 웃으면서 평소처럼 넉살 좋게 이야기했다.
"에이. 대방 어르신. 어차피 바닷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거 모르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런 김봉길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티 나게 혀를 차면서 개척촌의 항구에 정박하여 있는 거대한 함선을 바라보았다.
"쯧. 알겠네."
이에 싱글벙글하면서 정성국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김봉길은 정박하여 있는 지급 함선을 발견했다.
그가 그동안 몰던 인급 함선도 기존의 조선에 배에 비하면 확실히 컸지만, 저 멀리 보이는 지급 함선은 차원이 달랐다.
김봉길은 자신이 곧 맡게 될 녀석을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전체적인 모양은 인급 함선과 비슷했다.
인급 함선과 비교하면 확실히 커진 만큼 마스트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 정도가 차이점일까.
"와~! 저 녀석이군요! 정말 큰데요? 근데 저게 지급 함선이라굽쇼? 허면 천급은 대체..."
"천급은 지급과 비교하면 배수량이 두 배 크다네."
"허어. 이 배를 몰고 제물포에 들어설 때도 난리였는데...저 녀석도 그렇지만 천급 함선이 다가오면 정말 난리 나겠습니다."
김봉길은 처음으로 인급 함선에 물건을 싣고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보는 커다란 배를 보고 혼비백산했었던 관리들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배를 댄 후 한참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군관들을 데리고 달려왔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나중에 원상에서 새로 건조한 수송용 함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고.
헌데 나중에 천급 함선을 몰고 제물포에 정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 인급 함선을 볼 때처럼 혼비백산할까? 아니면 비슷하게 생겼으니 놀라기보단 배의 크기에 감탄할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오는 김봉길이었다.
그런 김봉길의 옆에서 정성국은 김봉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세상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거대한 배를 보고서라도 깨달으면 좋으련만.
특히나 한참 서양 여러 나라들이 죽어라 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외부와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조선을 유지하는데 사력을 다할 뿐.
그런 보수적인 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자 더더욱 빨리 북미로 가고 싶었다.
"예?"
"아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