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물론 그가 보기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형님이 나서니 가능했던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좀 다르지 않은가.
그는 지도로 보았던 광활한 태평양의 크기를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급 함선이 크긴 한데...고작 그 배로 태평양을 건너 북미 대륙에 정착하겠다고? 어느 세월에?'
"형님...무기도 있겠다 그냥 선원들 훈련시켜서 반정을 일으키는게 더 쉬울 것 같습니다만...?"
'이건 뭐 반정무새도 아니고. 얘 왜 이러지. 내가 교육을 잘못했나.'
동생의 말에 정성국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생에게 자신이 너무 조선 왕조를 부정적으로 가르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가르치면서,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알려주면서 무능한 조선 왕실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유학자들을 좀 과하게 까대긴 했다.
그리고 동생도 자신과 같이 어렸을 때부터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같이 봐왔었고 왜 저들이 저리 살아가냐는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안 좋은 이야기를 하기는 했고.
거기에 동생의 머릿속엔 이미 후장식 소총도 들어가 있으니 오히려 반정을 일으키는 게 더 쉽고 효율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 싶었다.
평생을 원상에 속하기로 마음먹은 대장장이들과 함께 시제품을 만들고 시범 삼아 사용했을 때 동생도 그 자리에 있었고 후장식 소총을 보고 무척이나 감탄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때 이후로 후장식 소총을 양산하자고 조르는 걸 말리느라 혼쭐이 났었다는 것을 기억한 정성국이었다.
'시범적으로 제작한 물건이고 어차피 당장 쓸 것도 아닌데 양산해서 어디에다 써먹겠느냐는 말에도 좀 만들어 두자고 우기더니만 그때부터 반정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던가?'
물론 정성국도 만약을 생각해서 조금씩 만들어 두기는 했지만.
괜히 동생의 반응이 걸려 몰래 만들어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해 만든 녀석들이었다.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느냐. 반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후를 봐야 한다고."
'솔직히 명분이야 만들면 되긴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지금도 일반 백성들이 살기엔 꽤 가혹한 상황이다.
거기에 10년 후면 경신 대기근이 온다.
정성국은 그때 적당히 선동한다면 반정이 아니라 역성혁명도 가능할 거라고 보았다.
뭐 어렵겠는가.
굶어 죽을 바엔 뒤엎자고, 저 양반들의 광주리엔 쌀이 가득하다고 적당히 선동만 한다면 민란 일으키기도 쉬울 테고.
거기에 혼란을 틈타 한성을 장악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거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이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조선인들의 피가 한반도에 뿌려질 것 같았다.
아마도 전국팔도에 양반이나 지주들의 몰살은 확정이고.
덤으로 수많은 백성도 피해를 볼 테니 말이다.
그 혼란을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봤다.
국가를 재정비하는데도 어마어마한 시일이 걸릴 테고.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부터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그나마 피를 덜 흘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무의식적으로 정성국의 생각이 변한 까닭도 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에 한반도만을 중점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조금 전 이주를 떠올리면서 한반도보다 수십 배는 넓은 광활한 대륙을 생각해보니 왜 굳이 조선에, 조그마한 한반도에 집착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땅도 넓고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호주든 북미든 그곳에 있는 자원을 사용하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거야. 그리고 나중에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입할 때 적당히 자립할 수 있게 조선을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곳에서 수많은 반대세력을 숙청하면서 개혁할 바엔...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라 하나 만드는 게 속 편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그의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어서 빨리 북미 대륙으로 가서 깃발을 꽂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이주할 생각이라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낫다.
호주든 북미든 점유하려면 결국엔 타임어택이라고 생각했다.
호주라면 영국이 영토를 선언하는 1770년까지, 북미라면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영토를 영국에게 넘기는 1763년까지.
특히 북미는 빠를수록 좋았다.
그나마 영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막혀있는 동안 프랑스가 미시시피강을 따라 미친 듯이 남하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정성국의 머릿속에 예전 홈쇼핑 광고가 떠올랐다.
< 북미 대륙 품절 임박! >
< 지금 바로 이주하세요! >
그러자 정성국은 어떻게 해서든 빨리 북미로 가고 싶었다.
"압니다. 형님. 형님이 왜 반정을 꺼리시는지는. 하지만 그게 더 가능성 있어 보이니 하는 말 아닙니까. 그 먼 대륙으로 떠나려는 이주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글쎄다.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북미 대륙은 정말 넓고 빈 땅이 널려있다. 농사지을 땅을 주겠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의 땅을 갖는 것이 농민들의 숙원 아니더냐. 거기에 유랑민이 어디 한둘이더냐?"
"으음..."
아직은 대동법 시행 전이라 삼정의 문란이 꽤 심할 때다.
백성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쥐어짜이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물론 대동법이 시행되더라도 그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백성들에게 고향을 떠나야 하지만 자신이 경작할 수 있는 넓은 땅을 준다고 한다면 눈이 뒤집혀 따라나서지 않을까 싶었다.
관건은 신뢰이지만 원상의 보증이라면 그들도 긴가민가 할 것이다.
어차피 당장 이주민을 왕창 모은다 할지라도 그들을 태울 배가 부족하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북미 대륙은 스페인 제국의 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흥. 말하지 않았느냐. 그저 선언했을 뿐이라고. 빈 땅을 발견하고 이거 내 땅이오 해봐야 누가 인정하겠느냐.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어야지."
정성국이 심드렁하게 이야기하자 정평국은 자신이 배웠던 것과는 조금 다르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스페인 제국이 꽤 강성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스페인 제국의 국운은 꺾였느니라. 그래서 이미 북미 동쪽 해안에 여러 나라가 들어와 개척을 진행 중이고."
"여러 나라 말입니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등 많지."
"허면 이미 늦은 게 아닙니까?"
이미 다른 나라가 개척하고 있는 땅에 같이 들어가겠다니 이해가 안 가는 정평국이었다.
그런 동생의 말에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는 정성국이었다.
"북미가 좀 넓은 땅이더냐? 저들이 북미 대륙의 서쪽까지 진출하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그 전에 최소한 북미의 서부는 장악해야 해.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진출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보겠다는 말이다.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결정할 생각으로 말이다."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형을 보면서 정평국은 직감했다.
이미 결정을 하였구나 하고.
정평국은 형이 조선을 차지하길 원했다.
단지 권력욕 때문이 아니다.
형이 조선 백성들을 안타까워하는 만큼 자신도 조선 백성들을 안타까워했다.
특히나 형이 어렸을 때부터 노비나 양민의 자식들을 불러들여 교육시킬 때 같이 교육을 받았기에 그들의 삶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탐욕스러운 지주들과 그들을 방관하는 어리석은 조선의 왕실이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차라리 현명한 형님이 왕이 된다면 조선 백성의 삶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형님이 비밀리에 발명했다던 후장식 소총이라는 녀석을 보고 생각했다.
형님이 그동안 만들었던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녀석을 보면서 정평국은 생각했다.
저것만 있다면 형님을 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뛰어난 형님이 진정한 왕재가 아닐까.
형님이 왕이 된다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정감록에서 말하는 왕이 형님이 아닐까.
등등.
마치 정성국이 흘러가는 배를 보며 이주를 떠올렸듯 정평국은 후장식 소총을 보며 반정을 생각했다.
그리고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듯 정성국처럼 정평국도 이에 꽂혀서 비밀리에 사람을 모았다.
그와 함께 공부했었던 양민이나 노비의 자식 중에서도 특히 형님을 지극히 생각하는 아이들을 하나둘 포섭해나갔다.
나중을 생각해서 말이다.
제대로 그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같이 형님에게 교육을 받았기에 어리석지 않았으니 분위기로 대충 눈치는 챘으리라.
그런데도 그들은 모르는 척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평국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성국이 예전에 곧 조선에 큰 기근이 닥쳐올 거라는 이야기를 술김에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들었을 때 마음먹었다.
그때를 기다리자고.
자신이 아는 형님이라면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꼴을 볼 리가 없으니까.
그때가 오면 형님을 왕으로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형님은 이제는 조선에 미련을 버린 듯했다.
'허면...나도 목표를 바꿔야겠지.'
정평국은 그렇게 마음을 정한 후 예전 말투로 형에게 말을 건넸다.
"...결정을 이미 내리셨구려?"
"그래. 난 조선을 떠나련다. 이 좁은 땅이 아닌 광활한 대륙에서 내 뜻을 펼치고 싶구나."
정평국은 형님의 반짝거리는 두 눈을 보면서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곳에서 수많은 피를 딛고 형님을 왕으로 세울 바에는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어차피 소작농을 쥐어짜는 것도 그들이 자신의 땅에 메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허니 사람이 줄어들면 그만큼 남은 사람들이 조금은 편해질 수도 있겠지.'
"...형님의 뜻은 잘 알겠소. 허나 정말 이주를 하려면 많은 배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지금도 버는 돈을 모두 연구소와 조선소에 때려 붓고 있는 실정인데..."
그에 이미 대책을 세워놨다는 듯 냉큼 말하는 정성국이었다.
"밀무역을 해야겠다."
"허어. 그렇게 이야기해도 못 들은체하더니만."
"괜히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전에 도공들을 수배했었지?"
"개척촌 근처에 정착시키지 않았소. 그리고 괴상하게 생긴 그 골도자긴지 뭔지를 만들게 했었고."
"그래. 그랬지. 밀무역으로 그걸 팔면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금액은 충당이 될 것이다."
"그걸 대체 누가 산단 말이오?"
"서양 상인에게 보여주면 잘 팔릴 게다."
"허면...그 마카오? 거기까지 가야겠구려?"
"그래도 되고 나가사키에서 서양 상인들에게 팔아도 될 테고."
"나가사키? 아 장기(長崎) 말이오?"
"그래. 그곳에 서양 상인들이 상관을 열어두고 있을 게다. 다만 밀무역이니 정체는 좀 숨겨야 할 것이고."
"그거야 뭐. 인급 함선만 해도 조선의 배와는 모양이 다르니 옷만 적당히 바꿔입으면 되지 않겠소."
"그래. 내가 탐험을 떠나는 동안 네가 할 일이 무척이나 많다. 슬쩍 소문을 흘려 이주민도 구해야 할거고 밀무역으로 돈을 벌어 배도 많이 건조해야 한다. 관찰사도 적당히 구워삶아야 할거고. 거기에 슬슬 무기도 양산해야 하고."
온갖 할 일을 줄줄이 늘어놓는 정성국을 보면서 점점 표정이 구겨지는 정평국이었다.
"...차라리 내가 북미로 가면 안 되겠소?"
"안된다 이놈아."
동생을 보며 정성국은 유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