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조선을 탈출한 다라...정말 해봐?'
그는 갑작스럽게 나온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정성국은 이곳에서 개혁하겠다고 피를 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다른 나라에서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차피 이대로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테고, 고통받을 테고, 결국엔 멸망하겠지. 차라리 내가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 하나를 더 만들어준다면...?'
그는 조선 백성들이 비록 순박할지언정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었다.
만약 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고 계속 양반들에게 착취를 당하면서 살려고 할까?
그리고 계속해서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조금은 백성들을 잡기 위해 더 대우해주지 않을까?
'뭐 그러기보단 이주 자체를 막으려들 것 같긴 한데...'
그는 지배자들의 행동을 예상해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고민했다.
'만약 정말로 조선을 탈출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당장 여러 지명이 떠오른다.
가까운 간도, 연해주, 대만, 해남도, 홋카이도, 필리핀, 호주, 아메리카 등등.
일단 간도와 대만, 해남도는 제외했다.
곧 있으면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리는 청나라의 최전성기가 시작된다.
청나라의 영토에 인접한 간도와 대만, 해남도를 개척해봐야 바로 옆에 있는 청나라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거기에 지금 시기에 대만은 정성공(鄭成功)이 장악하고 있을 테고.
연해주도 제외했다.
연해주에 세력을 떨치면 청나라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거기에 곧 있으면 경신 대기근이 온다.
그 이야기는 소빙하기의 정점이 곧 온다는 의미인데 이 시점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자리 잡아봐야 식량의 자급자족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홋카이도도 제외했다.
거기에 홋카이도는 일본과 너무 가깝다.
동남아는 지금 시점이면 동남아에 수많은 서양 세력들이 판을 칠 시기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필리핀이긴 한데...지금 시기이면 필리핀은 이미 스페인 세력이 자리 잡고 있을 테고.'
그는 혀를 차며 남은 장소를 생각해보았다.
'남은 건 호주나 아메리카 대륙, 정확히는 북미인가?'
그가 기억하기로는 호주에 유럽인들이 이주하는 시기는 18세기 말.
1770년에 영국이 호주 동쪽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선언하고 1788년에 죄인들을 수송하면서 이주가 시작되는 만큼 가능성은 있다.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그곳에 가려면 수많은 해적이 들끓고 있는 동남아를 지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분명 호주가 넓긴 한데 인구 부양력에서는 조금 의문이 드는 정성국이었다.
'내 기억에 호주의 인구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땅은 넓어도 농사를 지을만한 비옥한 토지는 얼마 안 되는 건가?'
그는 그런 의문에 잠시 호주는 보류하고 넘어갔다.
남은 곳이라면 아메리카.
정확히는 북아메리카. 소위 북미 대륙.
'근데 지금 북아메리카로 들어가기엔 좀 늦은 감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떠올랐다.
먼저 스페인 제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북미 전체는 스페인 제국의 땅이라고 선언되어 있기는 하다.
다만 지금쯤이면 어차피 유명무실한 조약이니만큼 무시한다 치더라도 멕시코에 자리를 잡고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뿐이랴.
이미 북미 대륙의 동해안에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영국은 제임스타운에, 네덜란드는 뉴 네덜란드에, 프랑스는 퀘벡에 이미 자리 잡은 시기일 텐데...'
어차피 조선에서 출발한다면 북미 서해안으로 도착할 테니 당장은 스페인만 신경 쓰면 되겠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저 나라들도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100년 후에 생길 영국 식민지 연합, 즉 미국이 될 테지만.
정성국이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고 있을 때 그를 향해 뛰어오는 댕기 머리 소년이 있었다.
"대방 나으리!"
"음? 석두구나. 이곳엔 어인 일이냐?"
"마포 나루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대방 나으리가 보여서요. 헤헤."
"녀석. 그래. 별일은 없느냐?"
"아! 참! 정 도방 어르신이 대방 나으리를 급히 찾으십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가자꾸나."
* * *
정성국이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정평국이 그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래. 나를 찾았다고?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예. 개척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지급 함선의 건조가 거의 마무리 되었답니다. 형님."
"뭐라?! 그것이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형님. 그동안 나 행수가 그렇게 고생하더니 결국은 성공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정성국은 답답한 속이 풀린 듯 호탕하게 웃었다.
지(地)급 함선.
그가 설계한 1천 톤급 함선이다.
물론 그가 직접 설계했다기보다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1천 톤급 갤리온의 설계도를 거의 그대로 그려낸 것에 가깝지만.
무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가 중요했다.
해서 기억하고 있는 여러 배의 설계도 중에서 3가지를 골랐다.
500톤급 갤리온, 1천 톤급 갤리온, 2천 톤급 마닐라 갤리온.
이를 조선장에게 넘기면서 인(人)급, 지(地)급, 천(天)급 함선이라고 명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2천 톤급 마닐라 갤리온을 만들고 싶었지만, 최대 250톤급의 판옥선만 제작하던 조선의 조선장들이 그게 가능하겠는가.
거기에 한선을 만들던 방식과 범선을 만들던 방식이 좀 다르기도 하고.
해서 우선 몇 번 실패를 각오하고 인급 함선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다만 최소한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모형을 만들어가며 범선에 대한 이해도를 축적하게 했고.
처음엔 좀 헤매던 조선장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배를 만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 적응해 인급 함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일부는 계속 인급 함선을 건조하는 데 투입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지급 함선을 건조하는 데 투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결실이 맺어진 셈이다.
아직 천급 함선의 건조가 남아 있었지만, 생각외로 조선장들의 솜씨가 좋았고 설계도가 있으니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거기에 지급 함선 정도만 되어도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고.
정성국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때였다.
"이제 해금령만 철폐되면 되겠군요."
형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짓던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고 정평국은 안색이 굳었다.
"설마...?"
"그래. 조정이 시끄럽다고 나중에 이야기하잔다."
"이런...허면 지급 함선도 물류를 운반하는 데 투입해야겠군요."
애초에 형인 정성국의 계획에 따르면 인급 함선은 조선의 해운에 투입하고 지급 함선부터는 대외 무역에 투입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대외 무역 자체가 당분간 불투명해졌으니 연안해운에 투입하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라도 연안해운을 장악하고 건조비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정평국에게 정성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지급 함선은 따로 쓸 곳이 있단다."
"예? 그 큰 배를 어디다 사용하시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생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는 정성국이었다.
'1천 톤급 갤리온이면...태평양을 건널 수 있겠지? 한번 북미를 직접 탐험해볼까?'
* * *
정평국은 상단의 대행수이자 자신의 친형인 정성국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예전 말투로 소리 질렀다.
"뭐요! 형님! 미쳤습니까?"
"이놈이.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더냐? 목소리를 줄이거라."
"아니! 형님!"
"어허! 그래도 이놈이!"
자신이 누구보다 존경하는 형님이었다.
또한, 정평국은 형님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보았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형님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였다.
그가 기억하기론 이런 경우 형님의 뜻은 꺾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정평국은 자연스럽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형님."
"그냥 탐험이나 좀 다녀오겠다는 게다."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비록 형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라고는 자평하나 그것은 형님과 비교했기에 그리 이야기할 뿐.
조선 내의 어느 양반보다도 똑똑하고 세계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정평국이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의 말이 그냥 둘러대는 말임을 모를 리 없다.
"절 바보로 아십니까? 태평양이 얼마나 드넓은지 형님이 보여주신 세계전도로 확실히 알고 있어요. 헌데 항로 개척에 형님이 직접 나서시겠다고요? 형님이 하신 말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콜럼버스가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항해한 끝에 간신히 미주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을요. 헌데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더 광활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정평국의 탄식 어린 말에 입을 열지 못하는 정성국이었다.
분명 그의 기억력 덕분에 명확한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신항로 개척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정성국이 아무런 말을 못 하자 희망을 얻은 정평국은 가문을 들먹이며 설득하려 애썼다.
"형님...형님 아직 혼인도 안 하셨습니다. 후계도 없이 어찌 그런 위험한 일에 나서시겠다는 겁니까.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자중하시지요. 정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싶으시다면 다른 행수에게 맡기시지요."
"아니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해야 해. 직접 두 눈으로 북미 대륙을 한번 봐야겠다."
"대체 왜 또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더는 조정 신료들을 믿지 못하겠다."
형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동생 정평국은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하오면...설마? 뜻을 세우신 겁니까? 만약을 대비하러 북미를 살피시려는 겁니까?"
"예끼. 이놈. 내 말 하지 않았느냐. 반정도 혁명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문을 생각하라는 놈이 언감생심 그런 참담한 일을 떠올리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럭대면서도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동생을 꾸짖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형님을 보면서 정평국은 입을 삐죽였다.
유학은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하등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대충 읽어보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쳐왔던 양반이 그 무슨.
유교 경전을 던져주면서도 절대로 그 사상에 물들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던 사람이 형 정성국 아니던가.
"...형님. 입에 침이나 바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참담한 일은 무슨."
그 말엔 정성국도 별로 할 말이 없는지 헛기침을 하고는 바로 주제를 바꿨다.
"크흠. 해서 뜻을 바꾸었다."
"..."
"새로 정착할 곳을 찾을 생각이다."
"예엣? 그게 무슨...?"
"조선을 뜰 생각이란 말이다."
정평국은 형이 이야기해주었던 유럽 여러 왕국의 식민지 개척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형님은 식민지 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형님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저기 유럽의 나라들처럼 식민지라도 개척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식민지? 아니다. 이주하겠다는 의미니라."
"어...음."
'이주하겠다고? 그 먼 북미 대륙으로?'
정평국은 형의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