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허면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랑방의 상석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양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자네도 지금 조정의 분위기를 알면서 이러긴가?"
그 말을 끝으로 그냥 넘어가려는 듯 보였기에 정성국은 속에서 끌어 오르는 화를 애써 삭히기 위해 주먹을 꽉 쥐면서 숙이고 있던 머리를 살짝 들고 입을 열었다.
"허나 소인과 약조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이 못마땅했던 양반은 헛기침하며 살짝 노기를 내뿜었다.
"헛참! 이보시게! 대방! 지금 분위기에서 해금령에 관해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고 꺼낸다 한들 논의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는가?"
"..."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시발. 상복을 1년을 입든 3년을 입든 그게 뭔 상관이라고.'
양반은 정성국이 별말을 못하자 이내 노기를 지우고 일단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 자네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은 해보았으나 지금은 허목이 올린 상소로 인해 조정이 몹시 시끄럽네. 허니 일단은 기다려보게."
"기다려라...또 얼마나 말입니까."
"흐음...조만간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
그저 얼버무리려는 양반의 말에 정성국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예송 논쟁이 바로 끝났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1차 예송논쟁이래도 꽤 오래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중에 윤선도가 송시열을 저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 아닌가? 아. 잘못하다 윤휴 그 양반이 개입하기라도 하면 불똥이 우리 쪽으로 튈 수도 있겠구나. 젠장. 일단 그 양반부터 설득해야겠네.'
정성국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양반은 지그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요새 남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네. 이럴 때일수록 많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말꼬리를 흐리며 은근히 상납을 요구하는 양반의 행동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최소한 처먹은 만큼 무언가 토해내야 계속 처먹일 마음이라도 들지.
'하. 지금껏 가져간 돈이 얼만데 또 내놓으라고? 후우. 참자.'
해준 건 별로 없으면서 계속 요구만 하니 짜증만 나는 정성국이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장은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지라..."
정성국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양반이었다.
"허허. 원상이 조선 5대 상단 중 으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돈 많은 거 뻔히 알고 있으니 개소리 하지 말고 상납하라는 의미의 말에 순간 정성국은 화를 제어하지 못했다.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열어주시고 요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
"조선 내의 규방에서 돈을 벌어봐야 얼마나 더 벌겠습니까.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에 청이나 왜국에 진출하려 했던 것인데 결국 당분간은 불가능하단 뜻 아니 옵니까?"
"크흠!"
순간 고작 상인 나부랭이가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던 양반이었다.
그러나 화를 터트릴 수는 없었던 것이 척을 지면 그동안 쏠쏠하게 받아왔던 돈이 더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성국이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했었던 일을 결국 처리해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또한, 정성국이 그리 만만한 인사도 아니고 원상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해서 헛기침을 하며 장죽을 무는 양반이었고 한바탕 쏘아붙이자 머리에 가득 찬 분기가 조금은 풀리면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우...뻗대긴 했는데 이 양반이 개척촌을 어느 정도 비호해주고 있으니...쯧.'
"...일단 상단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재정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일보 후퇴를 선택한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이 먼저 항복을 했기에 양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러시게나."
* * *
정성국은 양반집의 대문을 나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가 기억하던 미세먼지가 섞여 뿌옇던 하늘과는 다른 시리도록 청명한 푸른 하늘.
그 하늘을 올려보며 이곳이 조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한 정성국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옮기며 고심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정말 확 엎어?'
정성국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그냥 현실에 순응해서 살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그는 전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기억을 가지고있던 그에게 신분제가 존재하는 1660년의 조선은 그저 야만의 시대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백성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양란을 겪으면서 신분제가 문란해져 돈 있는 양민들은 양반 문서를 샀기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은 줄어들었다.
세금은 계속 늘어나는데 이를 감당할 백성들은 줄어들었으니 자연스럽게 더 많은 세금을 감당해야 했던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나라가 있는 게 오히려 더 힘든 폭정의 시대였다.
그나마 그는 중인으로 태어났고 가문에 재물이 넉넉했기에 큰 불편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가 자란 고을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조선의 양민들과 노비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았던 그로서는 이런 불합리한 조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차라리 왕으로 환생했다면 최소한 책임감 때문이라도 인생을 바쳐 조선을 개혁하겠다만...'
정성국은 고작 중인이었다.
벼슬길에 올라봐야 고위직은 불가능한.
그런데 조선을 개혁하겠다? 어렵다고 봤다.
거기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하늘이든 신이든 조선을 개혁하라고 나를 환생시켰다면 최소한 왕으로 환생시켰겠지. 그게 아니니 굳이 내가 조선을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어.'
다만 그렇다고 뻔히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곧 경신 대기근이 오고 백만이 넘는 백성들이 아사하고.
200년 후에는 결국 조선이 망하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그러니 무언가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문제라면 조선을 바꿀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
흥미로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왕으로 환생하거나 빙의라도 했다면 그나마 개혁을 시도해 볼 여지라도 있지.
중인 출신인 그로서는 언감생심 조선의 개혁을 이끌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반정이라도 일으킨다?
40년 전에 일어났던 반정을 다시 한번?
약 40년 전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도 명분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대다수 사대부가 합세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인 천하인 지금에 와선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 한들 중인인 그가 전권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또 정말로 사병을 육성해서 정권을 잡고 개혁을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지방의 수많은 사대부가 난리를 칠 테고 결국 수많은 조선인의 피가 흘러야 가능하리라.
그렇기에 그는 애초에 그쪽은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교조화된 유교 탈레반이래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좀 변화하지 않을까?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까?'
일본 역시 폐쇄적이었지만 최소한의 교류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0년 후의 미래도 변화하지 않을까?
거기에 곧 있을 경신 대기근도 저 강남이나 동남아에서 쌀을 들여와 큰 피해 없이 넘길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한 후 정성국은 해금령 철폐를 목표로 삼았다.
그 이후 그는 어릴 때부터 만들어 두었던 여러 발명품을 팔기 위해 상단을 만들었다.
그는 중인이라 고위직 관리가 될 수 없으니 돈으로 고위직 관리를 움직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렇게 그는 상단을 만들어 고작 3년 만에 자신의 상단을 송상에 필적할 정도로 키웠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나 그가 예전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일반적인 상황과는 조금 달랐다.
전생에 모든 기억이 또렷하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펼쳤던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전공 서적에 논문과 더불어 슬쩍 살펴보았던 사전부터 여러 인터넷의 기사와 수많은 커뮤니티의 글들까지.
그가 원하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초점을 맞추면 그가 한 번이라도 그에 대한 글을 보았다면 명확하게 떠올랐다.
그러한 현상에 몹시 놀랐던 정성국은 이내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의 처지에선 나쁠 것 없는 능력이니까.
아무튼, 그러한 기억력 덕분에 그나마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여러 발명품을 만들었다.
비누로 시작해서 향수에 여성용 화장품까지.
어차피 이 시대에 재물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왕실과 양반이니만큼 그들을 타겟으로 잡고 상품들이다.
정확히는 미용에 환장한 여성들을.
남편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면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정성국이 만든 물품들은 불티나게 팔렸고 덕분에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어차피 타겟이 타겟이라 굉장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제품을 만들고 엄청 비싸게 팔아먹었으니까 가능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여러 발명품을 생산하기 위해 강원도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강원도에 자리 잡은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지하자원과 수많은 목재.
정성국의 목표대로 조선에서 해금령이 철폐되거나 완화된다면 큰 배가 필요했다.
또한, 지금 시대에 바다는 수많은 해적이 들끓고 있었기에 방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무기가 필요했고.
그렇기에 그는 강원도의 해안가 근처 한적한 곳에 넓은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짓고 노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보부상에게 부탁해 유랑민들을 대거 끌어모았다.
인력이 아주 많이 필요했으니까.
그가 자리 잡은 개척촌은 농사를 짓기 위한 곳이 아니라 원상이 팔 여러 물품을 만드는 일종의 공단에 가까웠다.
거기에 적당히 부패한 관리들을 통해 뇌물을 먹여 개입을 최소화했다.
괜히 이곳에 관청을 세우고 간섭하면 귀찮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이제 슬슬 해금령 철폐를 논의할 시점이라고 생각해 운을 띄웠다.
헌데 그렇게 공을 들였건만 그동안 수많은 돈을 처먹었던 서인 양반들이 이제 와 딴소리를 한다.
해금령 철폐는커녕 해금령 완화조차 조당에서 논의하지 못하겠다니.
오로지 그것만 바라보고 행동해왔던 정성국으로서는 꽤 힘 빠지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예송 논쟁 때문에 논의가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그저 변명하기 좋은 이유가 생겼기에 가져다 붙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1차 예송 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끝난 후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해금령 철폐를 밀어줄까?'
지금껏 꽤 많은 재물을 가져가 처먹였고 해금령이 철폐만 되면 더 많은 재물을 줄 수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서인 양반들이?
정성국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반정이든 혁명이든 준비해야 하는가?
목숨을 걸고?
'그건 영 내키지 않는데 어쩐다...'
정성국이 그렇게 고심하며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마포나루였다.
그는 문득 코에서 맡아지는 물비린내를 느끼고 정신을 차려 이곳이 어딘지 파악했다.
'마포나루구나.'
그는 그저 멍하니 한강을 이동하는 조그마한 배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누런 황포돛을 달고 유유히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는 배를 바라보던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간다고...그냥 조선을 탈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