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200화

“저희가 협박당한 외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

“일개 대리에게 차원신용금고가 구원받았다는 뜻입니까. 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믿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사회에 출석한 면면들은 오커스 행장이 설명한 이번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악마의 대행자에게 가족 등을 인질로 잡혀 협박당하고 있었다.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을 끌어내리라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지시에 휘둘릴 뻔한 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절대 안 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달리 방도가 없던 상황.

하지만 악마의 대행자가 사망한 순간 변방의 차원을 감시하던 올림포스의 장비가 거대한 폭발을 확인했고, 그로부터 하루도 지나지 않아 놈이 인질을 가두어 둔 장소를 발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올림포스의 신들과 오커스 행장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이.

그것도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리 나부랭이가.

“이에, 본 행장은 김지안 대리의 노고를 비공식적으로 치하하고 싶은 바이다. 당연히 악마의 대행자가 벌인 일을 공공연하게 외부에 드러낼 순 없으니, 나와 이사회가 승인하는 범주 안에서 김지안 대리가 더욱 차원신용금고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종의 배려를 하는 게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찬성하는 이들은 손을 들도록.”

행장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은행을 구해 낸 행원에게 상을 주는 건 그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사회에 속한 모든 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말 그대로 고작 대리 따위를 밀어주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파격을 넘어서 어딘가 기묘하기까지 했다.

“행장님. 곤란합니다. 김지안 대리에게 포상을 내리는 거야 반대하는 이가 없겠지만 아무리 행장님이라 해도 인사 규정을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건―”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운데 행장의 측근이라 알려진 사내가 총대를 메고 발언했다.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 역시 그 의견을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노골적으로 불공평할 정도의 편의를 제공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건 있지. 이 정도 각오를 지닌 인재가, 은행을 위해 자기 눈을 내어 주고 악마를 무너뜨리는 행원을 나는 본 적이 없다.”

“…….”

좌중은 침묵했다.

행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애써 알아내려는 눈빛.

그들은 직감했다.

오커스 행장이 무언가 큰일을 결심한 것이 틀림없다고.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언젠가 김지안이 나의 자리를 물려받길 원한다. 물론 그게 현실이 되기까진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

마침내, 행장이 속내를 드러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의 의미는 노골적이었다.

김지안을 후계자로 앉히겠다는 말.

혼란에 빠진 세 파벌의 임원들이 머리를 감쌌다.

그들에게 있어 파벌 간의 싸움은 일상이었다.

구E와 구C의 대결. 이를 중재하려 하는 행장이 이끄는 구D 출신 간부들의 노력.

그 세 가지 힘이 얽히고설킨 차원신용금고의 내부 항쟁 구도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파벌은 행장을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행장의 능력과 출신, 그리고 지혜가 거대 은행인 차원신용금고를 이끌어가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창끝은 행장을 겨눈 적이 없었다.

행장이 제공하는 직무권능은 차원신용금고를 업계의 다른 경쟁자보다 우위로 올려놓았으며 여신이 책임지는 은행이라는 꼬리표는 고객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기에.

그런데, 그런 오커스 행장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은퇴를 선언하다니.

그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심지어 그 뒤를 잇게 되는 것이 다른 우수하고 검증되고 오랫동안 은행에 충성해 온 다른 임원이 아닌 입행하고 고작 1년하고 조금이 지난 햇병아리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건.”

“맞습니다. 아무리 김지안 대리가 우수한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모든 일에는 합당한 절차가 있는 법.”

“그야 앞으로 더욱 뛰어난 행원이 될 게 틀림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후계자로 거론하시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의합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김지안 대리가 정말로 행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신 그대로의 인재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거듭되는 이사회의 반발.

파벌을 가리지 않고 세 파벌의 중진들이 잇따라 행장에게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은 충분히 이를 이해하고 예상하고 있던 듯 느긋하게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도록 하라. 그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행장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김지안 대리를 신용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제 겨우 1년하고 조금 일했을 뿐인 사내를 뭘 믿고 차원신용금고의 미래를 맡기려 하는지 궁금하겠지.”

행장이 말을 맺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안심한 얼굴이었다.

처음엔 행장이 심한 일을 겪고 나서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자신들의 반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이 알고 있는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대들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김지안을 지켜보고 매의 눈으로 평가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 그 평가는 반드시 공정해야 하고 은행의 미래만을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이 서린 그 목소리.

파벌 간의 싸움조차 직접 지시를 내려 말린 적이 없던 지도자는 단 한 사람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이사회에게 부탁을 했다.

차기 행장의 자리는 오커스 디스파테르라는 신의 존재 탓에 상상도 하지 않고 있던 각 파벌의 수장들에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음모를 꾸며도 닿을 수 없던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낙하산에게 건너가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강력한 이성으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이는 김지안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시험대를 마련하려는 행장의 의도.

그렇다면 거기 어울려 주면 된다.

기준 미달의 꼬맹이라면 쳐내면 그만.

굳이 훼방을 놓을 필요도 없다.

김지안이라는 애송이가 정말로 은행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인재라면, 쳐 내고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군으로 회유하면 되는 이야기니까.

“좋습니다. 어떻게 될지 지켜보도록 하죠. 다만, 행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흰 그를 철저하게 지켜볼 것입니다.”

“좋다. 내 기대하도록 하지.”

약간의 신경전을 마지막으로 오커스 행장의 안건 상정은 끝이 났다.

* * *

~15년 후~

밀라에게 고백한 이후로 15년이 지났다.

나는 행장님께서 약속했던 대로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를 거쳐 본점으로 왔고, 새로운 직무권능을 얻게 되었다.

내가 배정된 부서는 제1 기업 여신 심사부.

매일같이 대출을 신청하기 위해 은행과 연락하는 유수의 대기업을 상대하는 일.

당연히 큰 고객을 상대하는 만큼 본점에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지닌 이 부서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다차원 출장소에서 단련받은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나는 베테랑 심사역들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해 서서히 실적을 올렸고, 상대가 고객이 은행에 맡긴 소중한 자금을 빌려주어도 괜찮은 기업인지를 확실히 파악해 내는 노하우를 익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를 대하는 본점 사람들의 눈은 매섭기 그지없었지만 낙하산이라는 편견을 이겨 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욱 노력했다.

계속해서 내가 그리는 이상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해 나갈 수 있다면 결국은 언젠가 차원신용금고라는 은행의 체질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직무권능은 그런 나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었다.

‘진실의 순간’.

내게 새로 주어진 직무권능의 이름.

과거 눈을 빼앗기기 전까지 사용했던 ‘여신심사’가 타인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편리한 능력이었던 반면, 진실의 순간은 얼핏 보기엔 하찮은 능력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게 새로이 주어진 직무권능은 그저 나의 진심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 외엔 아무런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겐 그거로 충분했다.

나는 고객과 본점의 동료, 선배 행원들에게 자주 나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진심을 본 이는 다시는 나를 의심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김지안 대리는―’

‘김지안 과장은―’

‘김지안 차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진정으로 고객을 위하는 마음으로, 은행이라는 내가 속한 조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 준 이상, 내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거란 의심을 버리게 된 까닭이다.

물론 나를 경쟁자로 여기는 이들 역시 있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들과 선의의 라이벌이 되어 절차탁마를 통해 더욱 뛰어난 행원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김지안 부장님. 엘라마 이사님께서 부르십니다.”

“아. 바쁜데 진짜 사람 가만히 안 두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상 위의 가족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진에 비춘 건 아리따운 밀라와 그녀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의 모습이었다.

인간과 다크엘프의 혼혈인 이란성 쌍둥이는 현재 한창 골치 썩일 나이인 초등학교 6학년.

나는 밀라에게 고백한 정확히 1년 후 다시 다이아몬드 펄 헤드에서 프러포즈를 했고, 우린 모두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마쳤다.

그로부터 다시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느 가장과 다름없이 대출과 카드값을 갚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예전처럼 불안에 시달리거나 스스로의 불행을 한탄하는 일도 없었다.

지금 나의 곁에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곁을 지켜 주는 동료들 역시도.

“…너도 호출당한 모양이군.”

복도에서 마주친 개인 여신 심사부 차장 아이작 래리어트가 나를 보고 쓰게 웃었다.

“그 대머리가 오늘은 또 무슨 지랄을 할지 걱정이야.”

쓰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인사부 실세가 된 마나님, 그러니까 지금은 나와 결혼한 밀라 레브리에와 마주쳤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그녀의 손가락엔 내가 선물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우린 조용히 아이작 몰래 손을 뻗어 깍지를 꼈다.

이쪽을 힐끗 올려다보는 밀라의 입꼬리에 진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결혼 전엔 몰랐지만 밀라는 퍽이나 부부간의 애정 표현에 적극적이었고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셋째가 태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할 텐데. 주식이라도 시작해야 하나.

“둘 다 그쯤 해 두지. 일터에서 무슨 짓인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아이작이 앞을 주시한 채로 뒤에 있던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 안 그래도 혼나러 가는 참이라 스트레스받는데.”

“예전엔 좀 더 공사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 같다만….”

나는 밀라를 보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깍지 낀 손을 풀고 아이작 몰래 직무권능을 발동하자 글자가 새겨진 하트 모양의 환상이 허공에 나타났다.

밀라는 그것을 보고 잠시 얼굴을 붉히고는 피식 웃었다.

“그때그때 양쪽 모두 최선과 진심을 다해 임하게 되었을 뿐이야.”

범차원 세계를 살아가는 평범한 지구인인 나에겐 한 가지 무기가 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고 옳은 것을 추구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마음.

이것만 있다면 나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계속해서 이 세계에서 적응하고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렇게 확신하며 밀라에게 짧은 작별을 고하고 엘라마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도 분명 꾸지람을 들을 게 뻔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성실한 은행원과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자부심을 품은 김지안은.

예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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