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9화

잠깐의 휴가를 마치고 키키와이에 돌아온 다음에도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밀라에게 하고 싶던 말은 기어코 린딘에 있는 동안 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뭐, 빠른 업무 복귀를 희망한 나와 달리 납치의 정신적 후유증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행장님이 밀라 녀석에게 며칠인가 더 휴가를 쓰도록 배려해 주신 덕에 밀라가 이틀 후 키키와이로 찾아올 예정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겠지.

아무튼,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업무 환경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건 은행의 상층부뿐.

물론 그 상층부와 직접 커넥션을 지니고 있는 슬리크 엘라마 차장과 불파사 비슈티 과장, 그리고 엑토플 라즈마 과장은 모든 사정을 듣고 이해한 듯 내게 가혹한 업무 폭탄을 던지거나 자신들의 일을 돕도록 지시하진 않았다.

반면, 아이작과 플루토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아이작과 같이 점심 식사를 했고 플루토는 업무 중에도 자주 나를 놀려 댔다.

오히려 이쪽이 내겐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참. 동기 채팅방에서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밀라를 제외한 특채 동기들 중에서도 내가 겪은 일을 아는 건 이사회 회의를 남김없이 도청하던 과타노차 정도였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업무와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놀랍군.>

다만, 과타노차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내게 품고 있던 인상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지만.

<네놈에게 그런 배짱이 있을 줄이야. 내 신도로 데려오고 싶을 정도야.>

뜻밖에도 놈은 나를 극찬하고 있었다.

중간에 뭔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이 섞여 있었지만.

<신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고 보니 알려 준 적 없었군. 나는 신이다.>

<?????>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헛소리겠거니 넘어갔을 테지만 과타노차가 이질적인 생명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과타노차는 촉수 생명체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생물이 아니고 이쪽 세상에서 사람이라고 구분되는 종족 중에 녀석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이 실력 하나로 특채를 통해 뽑힌 사실 자체가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다만 미개척 차원이라 불리는 3-1차원에서 온 내가 그런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뻔뻔한 것 같아 여태껏 관련된 화제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을 뿐이지.

아무튼, 입행 이후에도 나는 과타노차의 종족이 무엇인지 궁금했던지라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고객들의 종족 분포 등을 알아보는 중 녀석의 종족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과타노차가 범차원 세계의 생명체인지 자체가 조금 의심스러웠는데….

<…진짜?>

이 녀석이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니까 뭔가 거짓말이 아닐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잘 생각해 보니 과타노차 녀석 여태껏 내게 단 한 번도 농담이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 않나.

권능을 지닌 신의 특징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거라던데, 설마….

<사실이다. 범차원 세계의 신이 아닐 뿐. 나는 세계 밖에서 온 방문자이며 내가 살던 세계를 창조했던 신들 중 하나다. 물론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희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옮긴 단어고 나의 세상에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조에 관여한 이들을 부르지만.>

<…….>

이제야 조금 납득이 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연금술과 프로그래밍 지식으로 마키나를 만든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녀석이 신이었으니까 오랜 연구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던 거였군.

“허….”

특채 동기가 신이라고 들으니까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저런 생물 같지도 않은 촉수 덩이가 어떻게 정식 행원으로 입행했나 싶었다.

뭐, 말이 싸가지 없을 뿐이지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서도.

<그, 있잖아. 과타노차.>

<마음을 정했나.>

<어. 아니, 그, 어. 맞아. 그냥 우리 관계는 여태껏 그래 왔던 대로 특채 동기랑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흥. 결국은 하찮은 이족보행 탄소 생명체인가. 어리석긴. 무궁한 영광과 지혜를 얻을 기회가 왔는데 붙잡지 않다니.>

과타노차와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특채 동기들의 면면이 밀라 빼곤 굉장히 특이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한 번 더 자각한 까닭이었다.

재벌가 막내 손자에, 살아 있는 대량 학살 병기인 천사, 그리고 이계의 신까지.

밀라랑 나 빼곤 죄다 스케일이 남다르지 않나.

나랑 밀라가 특히나 서로 가까운 사이를 유지한 것도 어찌 보면 다른 셋이 상식 밖에서 놀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린 처음부터 이런 관계로 발전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모든 건 각자가 선택이 쌓이고 쌓여 생겨난 결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내가 고른 길이니까.

<이틀 뒤, 기다리고 있을게요.>

스마트폰 화면에는 과타노차랑 떠들던 사이 도착한 밀라의 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 내 나이는 이미 스물아홉.

슬슬 나도 미래를 준비할 때가 됐지.

* * *

이틀 후, 주말.

나는 택시를 타고 키키와이의 유일한 공항으로 향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 위해 밀라의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먼저 공항 터미널에 와 벤치에 앉았다.

“후우.”

그냥 생각을 말로 풀면 되는 일인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걸까.

연신 심호흡만 하다가 밖으로 가서 담배 한 대 태우고 나왔다.

“아. 담배 냄새나면 안 되는데.”

그리고는 민트 사탕 하나를 입에 넣고 천천히 녹였다.

시간을 보니 아직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이토록 느리게 흐르는 것이었던가.

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디게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쳐다보다 안절부절못하고 벤치에 앉았다 일어나 걷다 다시 앉길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유익하지 않은 30분을 보낸 즈음,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저 방금 비행기 내림!>

“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나 게이트로 걸어갔다.

밀라와 함께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 * *

“와. 오빠 차까지 렌트했어요?”

“응. 업무용 차량 쓰긴 좀 그렇잖아. 사적인 일인데.”

밀라의 키키와이 방문은 두 번째였는데, 저번에는 얼마 있지도 못해서 아쉬웠다고 한다.

밀라는 면허가 없는지라 이번엔 내가 렌터카로 데리고 다니기로 약속했는데 큰맘 먹고 빌린 오픈카 뚜껑을 열고 해안가 도로를 달리니 낭만이 따로 없었다.

“아, 그냥 타다 팔 생각으로 중고차 구해 둘 걸 그랬나.”

“그건 좀 낭비죠. 오빠 본점 와야 하는데.”

“그것도 그래.”

나는 밀라의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걸 곁눈질하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첫 목적지는 키키와이에서 일한 지 꽤 오래 지났는데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장소.

키키와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현지 커플들이 자주 찾는 데이트 코스의 대명사.

특수한 광물로 언덕 전체가 뒤덮여 있어 사시사철 반짝반짝 화려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펄 헤드였다.

“우와아….”

해안선을 따라 달리던 차의 전방에 웅장한 다이아몬드 펄 헤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밀라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야 가끔 섬 안에서 왔다 갔다 할 때 택시 창밖으로 보곤 하는 광경이었지만 밀라는 저번 방문 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봤는데.

“좋아하는 사람이랑 가고 싶었어요.”

라고.

“어…. 그렇구나.”

그래서 똑같이 대답했다.

“나돈데.”

“…….”

우리 둘은 한동안 앞만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듯한 감각.

가득 찬 주차장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발견해 차를 세운 다음 밀라와 함께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마침내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간 우린 푸르른 키키와이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거 알아?”

“뭘요?”

“키키와이섬은 상공에서 촬영하면 한없이 완벽한 원에 가깝다더라. 차원 역장이 얇은 영향이라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고….”

“옹… 들어 본 거 같아요. 사진은 못 봤지만.”

“비행기 타고 있는 동안 못 봤어?”

“네.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비행기 타고 푹 잤죠.”

그렇다면 이런 얘길 하는 보람이 있다.

“여기, 다이아몬드 펄 헤드는 섬 가장자리에서 가장 높게 솟아 있는 언덕이고 보다시피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잖아. 낮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보석 반지처럼 보이나 봐.”

“아하…!”

“그래서 이곳이 프러포즈의 명소라고 하더라고.”

“지안 오빠, 저, 그, 아직 그, 마음의 준비가….”

“반지 얘긴 그냥 해 본 소리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더 진지하게 고민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인지….”

“진짜 몰라서 물어?”

밀라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저었다.

“아뇨, 그냥. 직접 듣고 싶어서.”

“…사귀자. 우리 잘 맞는 거 같아.”

내가 말하자 밀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 다른 이유는 없는 거예요? 잘 맞는다 그런 거 말고….”

“좋아해.”

“…휴우.”

밀라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저도요.”

녀석은 옅은 갈색의 얼굴과 밝은색의 눈동자를 내게 향한 채 손을 꼭 쥐었다.

“그래요. 우리 사귀어요. 결혼이 전제여도 저 좋아요.”

장소와 풍경 외엔 낭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백.

모태솔로답다면 모태솔로다운 짓이었지만 밀라는 받아들여 주었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키키와이.

다이아몬드 펄 헤드에서 우린 연인이 되었고.

“다음엔 여기서 반지를 줄게.”

“어어? 벌써 그런 약속 남발해도 되는 거예요? 공수표면 어떡해요.”

“수표 발행하는 게 은행원 일인데, 뭐. 나 신용 그렇게 없어?”

“은행원이면… 신용 점수 높지 않나요?”

“그럼 믿든가.”

“헤헤…그냥 아주 뼛속까지 뱅커라니까.”

그리고 미래를 약속했다.

* * *

린딘. 차원신용금고 본점. 이사회실.

구D와 구C, 구E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차원신용금고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온 이사들이 전원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승진을 거쳐 이사들이 된 이들 외에도 사외 고문과 사외 이사까지, 차원신용금고와 오랫동안 연을 맺고 있던 거물들 역시 모인 자리.

금일 긴급 소집된 이사회에선 무려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이 직접 안건을 상정할 것이라고 예고되어 있었다.

과연 행장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까.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는 가운데 마침내 문을 열고 오커스 행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친 점 사과하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겠지. 지금부터 그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 안건의 상정은 그다음이다.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듣길 바란다.”

행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폭풍처럼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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