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8화

“아.”

문을 연 다음에야 깨달았다. 노크하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꺄아!”

밀라는 장난스럽게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렸다.

“환자복 갈아입고 있는데 들어오면 어떡해욧!”

“…미안.”

“농담이에요. 아까 새거로 갈아입었지롱.”

밀라는 혀를 비쭉 내밀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로 나를 반겼다.

녀석이 말한 대로 이불을 내린 그 상반신은 깨끗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행장님의 배려로 이번 사건에 휘말린 밀라는 휴가를 받아 VVIP 병동의 일인실에서 치료를 받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몸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는데, 아무래도 거래의 대가로 사용하기 위해 악마의 대행자가 밀라를 최대한 정중하고 안전하게 대했던 모양이었다.

“진짜 별일이 다 있네요. 살면서 납치 같은 걸 당해 볼 줄은….”

“미안. 내 탓이야.”

“아니 그게 어떻게 오빠 탓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납치한 놈이 나쁜 거죠.”

밀라는 손사래를 치며 내가 자책하는 걸 말렸다.

“아무튼, 오빠가 이렇게 무사하고 저도 병원에서 건강에 지장 없다고 하는 걸 보니 잘 해결된 거죠?”

“응. 그건 내가 보장할게.”

“그럼 됐어요.”

“뭐야. 자세한 이야기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

“굳이? 괜히 머리 복잡해지기 싫어요. 지금은 그냥 오빠랑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수다나 떨면 좋겠어요.”

나는 그제야 밀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서웠겠지. 이틀 내리 모르는 놈에게 납치당해 감금되고 있었을 테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처야 없지만 그 마음속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을 거다.

“괜한 일에 휘말려 버렸네.”

“그러게 말이에요. 저 진짜 무서웠다니까요.”

생글생글 웃던 밀라의 눈에 천천히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빠가 어떻게 해 주겠지… 하고 버텼어요. 계속 묶여 있었는데 화장실도 못 가고, 배는 고프고… 진짜 나쁜 새끼라니까요.”

밀라의 어조가 평소보다 조금 더 격양되었다.

처음 들었다, 녀석이 새끼 같은 단어를 쓰는 거.

“울지 마.”

밀라는 침대에 달린 스위치를 눌러 상반신을 일으켰고 나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녀석의 근처에 앉았다.

“아니, 이제 다 끝났는데, 다 괜찮아졌는데….”

밀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코 흥.”

내가 휴지를 건네자 녀석은 거기 대고 코를 풀었다.

“후우….”

그제야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두 장째 휴지로 눈물을 닦은 밀라가 말없이 내 가슴에 얼굴을 폭 하고 묻었다.

“…나 잡혀 있는 동안 오빠 곤란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상한 소리 안 하고 꾹 참았어요. 잘했죠.”

“안 그래도 됐는데….”

“나 같은 거 인질로 잡아가도 그 남자한테는 아무 의미 없다고, 계속 말했거든요.”

“…….”

“뭐야. 설마 진짜예요? 저 인질로서 가치 없던 부분?”

내가 잠시 입을 다물자 밀라가 입을 댓 발 내밀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사실 녀석이 갑자기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길래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나 모솔이라고. 왜 이러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손은 의지를 떠나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미안했던 까닭이다.

내가 악마와 엮이게 된 탓에 아무 상관 없는 밀라가 무서운 경험을 하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내 의사와 하등 상관이 없이 발생한 일이라곤 해도 휘말린 건 사실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녀석의 어리광을 받아 줄 의무가 있다.

그것 말고는 지금 밀라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당연히 아니지. 가족 같은 건데. 특채 동기는.”

“딱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어… 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밀라도. 어느샌가 자각하지 못하던 사이 서로를 향한 호감이 싹텄던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밀라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지금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나도 너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하는 건 뭔가 강요당해 호감을 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런 얘긴 좀 더 좋은 자리에서 해야 한다. 병원 병실이 아니라.

“쳇. 나 진짜 고생했는데.”

“그 얘긴 나중에 근사한 곳에서 다시 하자.”

“…와.”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내 말을 들은 밀라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다.

“…그러든가. 음. 좋네.”

뭐가 좋다는 건지, 하여튼.

“참. 너네 집에 소포 왔다더라.”

“아. 얘기 들었어요. 조금 전에 행장님 여동생분이 잠시 전화하셔서. 마침 제가 깼던 때 전화 왔거든요. 들었어요, 악마는 모든 행동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혹시 위험한 물건일까 봐 저주니 뭐니 다 검사했는데 평범한 현금 뭉치였다고. 납치의 대가, 인 거죠 그거? 정당한 수익으로 법원도 판단할 거라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미리 플루토 씨가 돌아다니면서 다 확인해 밀라에게 연락한 모양이니.

이럴 때 플루토의 분신 능력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필요한 법적 절차라든지 언론 대응, 기타 등등 인력이 필요한 곳에 플루토는 분신을 보내 빠르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

덕분에 나와 밀라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잠깐의 휴가를 누릴 수 있는 거고.

“아무 보람도 없진 않았네요. 돈도 그렇지만, 오빠 마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선.”

“…….”

얘는 진짜,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무서운 일을 경험한 다음이라 그런지 체통이고 나발이고 그냥 하고 싶은 말 다 쏟아 내 버리네.

나였다면 저만큼 솔직해질 수 없었을 것 같다.

역시 밀라는 대단하다.

아무리 무거운 고민도 녀석 앞에선 깃털처럼 가볍게 변한다.

녀석은 늘 한결같았다.

특유의 호들갑 및 과한 리액션, 그리고 지나친 솔직함과 밝음이 이 녀석과 대화할 때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회생활의 활력소란 바로 이런 걸 칭하는 거겠지.

보면 볼수록 비타민이나 영양소 같은 녀석이다.

계속 옆에 두고, 잊지 않고 챙기고 싶은, 그런.

“오빠 제 얘기 듣고 있어요? 뭐라 말 좀 해 봐요… 사람 답답하게 진짜 아휴.”

“…좋네.”

“네?”

“좋다고.”

“뭐가요?”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아….”

잠깐 본래 색깔로 돌아왔던 밀라의 옅은 갈색의 피부가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다시 물들기 시작했다.

“아… 지안 오빠 진짜 왜 그래요 나한테. 하….”

나는 말없이 녀석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병원 음식 입에 맞아?”

“아뇨. 죽 조금 질려요.”

“소화 기능만 좀 나아지면 나가서 먹자. 맛있는 거 살게.”

내가 말하자 밀라는 자동차 운전석에 다는 해바라기 인형처럼 빠르게 고개를 수직 방향으로 흔들어 댔다.

“좋아요!”

나는 병원을 나서는 일 없이 녀석의 곁에 앉아 밀라의 수다를 들어 주었다.

가끔은 호응하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며 그저 말없이 무한대로 쏟아져 나오는 밝은 활기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작고 귀여운 다크엘프를 바라보며, 녀석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내겐 과분할 정도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 * *

며칠 후.

나는 다시 플루토와 함께 올림포스를 찾았다.

밀라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 마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포세이돈이 지배하는 도시의 모처, 신들과 다시 재회한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저번 모임에 오지 못했던 신들과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까지, 열댓 명의 초월자가 모인 테이블.

나는 협조해 준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다음 담보로 맡겨 둔 안구를 돌려받았다.

안구는 단단한 용기에 봉인되어 있었는데, 눈의 형체를 잃고 그 안에 담긴 권능만이 투명한 유리병 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허무한 빛무리 같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지만 그 힘이야말로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강력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파아앗

담보를 돌려받고 계약을 마무리하자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권능과 기타 강력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출받았던 신들의 권능과 다른 능력들이 빠져나가자 느껴지는 허탈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안도감과 벅찬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단 본래 주인이 지니고 계시는 게 낫겠군요.”

나는 마지막으로, 잠재력을 보는 눈의 힘을 원래 주인인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님께 돌려드렸다.

이미 내 눈에서 꺼낸 권능이니, 계속 내가 보유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김지안 대리….”

“전 이런 게 없어도 은행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점도 적지 않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디스파테르 행장에게 나는 말했다.

“잠재력이 없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안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고작 인간인 제가 누군가를 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것저것 판단하는 건 영 좋지 않아 보여서요. 인간미가 없다고 할까. 다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는 법이니까요. 은행은 공평하게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사니까 무작정 호구처럼 퍼 주자는 뜻은 아니고….”

나는 그저, 믿어 보고 싶었다.

여태껏 잠재력이 높은 고객만, 상환 가능성이 높은 고객만 상대해 왔지만 그건 은행과 해당 고객에게만 이득을 끼칠 뿐이다.

성공할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차원신용금고에서 돈을 빌리지 못해도 분명 어딘가에서 혜안을 지닌 이들에게 발견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어디서 위기를 넘어설 자금을 구하라는 말인가.

은행은 우산을 빌려주고, 돌려받는다.

하지만 우산을 빌리려 하는 사람을 과도할 정도로 고르려 든다면 은행의 사회적 역할을 다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제게 이 눈은 필요 없습니다. 성과급이야 제가 조금 덜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다시금 고객과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특별한 힘을 가진 낙하산이 아니라, 내 경험과 직감과 판단 능력으로 업무를 수행해 은행에 적절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고객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싶다.

“정말 괜찮은 건가.”

“직무권능이야 행장님이 따로 다시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왕이면 편리한 게 좋겠네요. 굳이 탕비실에 가지 않아도 컵을 커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권능이라든지.”

직무권능을 내가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이번에 악마와의 싸움에서 신들의 도움이 있었긴 해도 승패를 결정한 건 결국 찰나의 발상이었다.

굳이 권능 같은 게 없어도 인간의 지혜가 있다면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을 다하며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앞으로도 차원신용금고의 대리로서 고객님들을 성심성의껏 응대할 생각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필요하신 서비스가 있으시다면 언제든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김지안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신들에게 명함을 한 장씩 나눠 주고 모임 장소를 떠났다.

“진짜 대리님답네.”

옆에선 동행하고 있던 플루토가 킥킥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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