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5화
오전 업무를 얼추 마친 다음 아이작과 플루토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고기 위주였다.
평소였다면 마음에 들었을 테지만 입에 모래라도 들어간 듯 텁텁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맞나….”
솔직히 말해서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도 인간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가만히 있는 건 어렵다.
“으음….”
특히나,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지금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해가 있을까 봐 말해 두는 거지만, 내 오른쪽 눈은 멀쩡히 안와에 박혀 있는 중이다.
다만, 나는 눈을 담보로 잡아 신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대출받았고, 그 탓에 눈에 관한 소유권은 지금 그들 손에 넘어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출 받은 힘이든 돈이든 뭐든 당장 내 손에 있는 건 아니고, 안구가 저들의 손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눈의 권리가 넘어가 있는 탓에 나는 오른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었고, 신들은 지금 내 오른쪽 눈을 통해 원격으로 내가 보는 광경을 확인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말 그대로 저들의 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이 사기극을 무사히 마쳐야만 한다.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저것은 점점 다가오는 12시의 발걸음 소리.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 지금도 서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한 끼가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사형수가 누리는 최후의 만찬이 따로 없다.
죽기 전에 누리는 최후의 사치라고 그러던데.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죽을죄를 지은 사람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나는 평범하게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아가고 싶었는데.
물론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소린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있으니까.
인생의 방향을 전환해도 삶의 만족도가 엄청 높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의 산증인 같은 게 아닐까, 나는.
머릿속에서 은행원으로 보낸 짧은 햇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도 참 많았고 미운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 전부가, 지금 이 순간 운명을 만들어 가는 나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그들 모두가 지금 나를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 그들과 웃으며 마주하고 악수하기 위해선 이 정도 난관은 쉽게 헤쳐 나가야만 한다.
“다녀왔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아이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것과 달리, 반대쪽 자리에 앉아 있던 플루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분신이 아닌 본체다.
라즈마와 비슈티 과장은 내게 관심 따윈 보이는 일 없이 자기들 일만 하고 있다.
그래. 매일이 그냥 이대로 흘러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만일 오늘 내가 세운 계획이 실패로 끝나면 그런 일상을 보낼 수 없게 되겠지.
은행이 망하고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심지어 나는 살아 있지도 못할 거고.
“…….”
고개를 돌리자 소장실에서 걸어나온 슬리크 엘라마가 조용히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았다.
엘라마는 90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키워 온 햇병아리가 은행 전체를 구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중인데.
나름 날 여기까지 키워 온 사람으로서 뿌듯함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아니면, 걱정일까.
미우나 고우나 직접 뽑아 온 부하인 내가 죽게 된다면 엘라마의 성격상 자신을 탓하게 될 것이다.
그 표정도 몹시 보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엘라마가 오래오래 고통받았으면 좋겠다. 사람 저딴 식으로 험하게 굴리는 사람은 고생 좀 해야 해, 진짜.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내가 이 은행과 행장님, 그리고 같이 인연을 쌓아 온 이들에게 보답을 하는 날.
아쉽지만, 엘라마를 울리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 두고 밀라와 은행을 구하는 데에 전념하도록 하자.
-째깍
시계가 마침내 12시 정각을 가리켰다.
엘라마와 플루토가 곧바로 고개를 치켜들고 곧바로 정면의 출입구를 주시했다.
-고오오!
그리고 다음 순간, 로비 한가운데에서 새까만 구멍이 열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출현한 어둠.
그 사이를 가르고 나온 한 명의 사내가 로비 바닥에 착지했다.
“…저놈이냐.”
“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텅 비어 있던 로비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내가 풍기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챈 경비원 영감님과 비슈티 과장이 곧바로 일어나 그 주위를 에워쌌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반듯한 정장에 입에 달라붙은 미소. 사채업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름 없는 악마의 대행자.
놈은 카운터 너머의 나를 주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거래에 응할 마음은 드십니까?”
“그, 고객님. 번호표부터 뽑아오시겠어요?”
“…예?”
“번호표 뽑아야 상담 가능하다고요.”
“…….”
놈은 미친놈이라도 보는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다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하고는 머쓱한 얼굴로 번호표 발행기로 돌아가 표를 뽑았다.
-딩동
“A-117번 고객님. 2층 상담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놈의 번호를 부르며 싱긋 웃었다.
기선제압, 성공.
* *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나를 따라 2층으로 올라온 악마의 대행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중얼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은행원으로서 있고 싶었을 뿐이야.”
“눈을 가져간다고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은.”
“악마랑 그 하수인의 말을 어떻게 믿겠어. 처음 명함에 적었던 이름도 가짜였다면서.”
“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행장님의 힘을 무효화하려 했잖아.”
“호오.”
놈은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징글징글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긴 한데 놈이 발하는 한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은 오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앉아.”
2층 상담실에 들어간 나는 놈에게 의자를 권했다.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내가 가져가고 싶었지만, 일단은 인질을 잡고 있는 건 놈이니까 순순히 놈의 제안에 응하는 척 행동해야만 한다.
“밀라는 무사한 거지?”
“그럼요. 계약의 대가인데 제가 손을 댈 리가 있겠습니까.”
놈은 의자에 앉자마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기 중의 수분이 바싹 마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입술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사라진 수분은 놈의 검지 끝에 모여 커다란 육각형의 얼음 결정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투명해서 그 너머가 훤히 보이는 단단한 주먹만 한 얼음덩어리.
그 안에는 하나의 광경이 투사되고 있었다.
소파에 묶인 밀라. 영상을 중계하는 마법 같은 걸까.
“녹화된 걸지도 모르니까 실물을 보고 싶어.”
“그 숙녀분이 어지간히 중요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부정은 안 할게.”
“좋습니다. 거래할 상품에 흠이 없는 걸 보장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을 테니까요.”
놈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아까 처음 은행에 나타났던 것처럼 새까만 타원형의 어둠이 허공에 나타나 소파에 묶인 밀라를 천천히 토해냈다.
“으으….”
눈가리개를 한 밀라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운반하기 편하게 기절시켜 둔 모양이었다.
“미안, 밀라.”
잠시 손을 뻗어 맥을 짚어 보았는데 정상이었다.
다행히 밀라의 몸에 무언가 위험한 약물을 투여하거나 그러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는 딱히 과학적인 근거에 뿌리를 둔 추측은 아니었다.
그냥 온전한 직감. 만일 밀라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도록 하든가 해야겠다.
“좋아. 밀라의 안전은 확인했어. 뭘 원한다고 했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의 오른쪽 눈입니다. 제가 당장 뜯어 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건 계약이 아니면 손에 들어오지 않는 물건인지라.”
“눈 외의 요구 조건은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악마의 대행자는 신이 나 죽겠다는 얼굴로 가방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교환 계약서입니다.”
놈이 작성한 계약서 두 부 중 한 장을 집어 든 나는 내용을 쭉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독소 조항이라곤 하나도 없는 깔끔한 계약이었다.
밀라의 신병을 양도하는 대신 눈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계약서.
내가 순순히 눈을 넘기도록 교환 순서는 밀라를 먼저 이쪽에게 보내겠다고 적혀 있었다.
“…꼼수 안 부리고 정직하게 작성했네.”
“악마의 대행자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비열한 수법을 쓰는 건 그 외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을 때 말곤 없습니다. 레이디를 납치하는 것도 실은 하기 싫었단 말이죠.”
웃음이 나왔다.
가장 악독한 짓을 벌이는 놈들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헛소리를 하는 걸까.
동시에, 계약 자체를 공정히 진행하겠다는 놈의 태도에서 그동안 수많은 상대를 농락해 온 연륜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질의 목숨이 저쪽 손에 달려있다는 불공평하기 그지없는 조건에서 얼핏 보면 공정해 보이는 계약서를 보여 주고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제 딴엔 이게 페어플레이로 보이는 걸까.
안구가 넘어가는 순간 은행까지 전부 집어삼킬 생각인 녀석이.
그러니까, 이 계약에 있어 내가 놈에게 건네는 건 단순히 오른쪽 안구가 아닌 신의 권능과 은행, 더욱 나아가 이 범차원 세계의 미래와도 같다.
그런데도 저런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신경일까.
저 정도로 악해야 악마의 대행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어쨌든.
“좋아. 서명하겠어. 일단은 그쪽이 먼저.”
“아쉽게도 저는 이름이 없으니 제가 섬기는 분의 권능으로 맹세하도록 하죠.”
놈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에서 커다란 도장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아니, 그건 도장이 아닌 무언가의 손가락이었다.
처음 보는 크기의 엄지손가락은 비늘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지독한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내가 발하는 한기와는 수준이 달라 당장 방 안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탐욕의 악마, 그리고 세계의 약탈자의 이름으로 계약을 승인하겠습니다.”
놈은 그렇게 말하고는 들고 있던 악마의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자신의 손가락 끝을 푹 찔렀다.
이내 검붉은 피가 스며 나와 엄지손가락을 적셨고, 악마의 대행자는 그것을 종이에 대고 꾹 눌렀다.
“자, 이젠 당신 차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야만스러운 방식으로 서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날을 위해 면세점에서 구해 온 만년필을 꺼내 묵묵히 서류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김지안, 세 글자.
나의 이름.
악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최후의 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