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4화
“말도 안 돼.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자리에 모인 신들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내민 계약서를 노려보았다.
사전에 머릿수만큼 인쇄해 둔지라 그들은 계약서를 직접 손에 들고 꼼꼼하게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허어. 이건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그래.”
암울했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포세이돈을 필두로 아폴론과 하데스까지, 이곳에 모인 신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악마의 대행자는 눈을 가져갈 수 없겠어.”
“그뿐인가요. 놈은 인질을 계약을 따라 인질을 풀어 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만, 유독 플루토만큼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서, 확인 다 끝났어. 대리님다운 발상이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이런 짓을 저질렀다간 대리님은….”
나는 검지를 들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괜찮아. 아직 하루하고 절반 남았잖아.”
“…….”
내 의중을 파악한 플루토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무모한 짓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이런 역할’을 맡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만일 내가 여기서 겁쟁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간 악마와 그 대행자가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앗아가고 세상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고작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용기를 내 움직이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나는 틀림없이 다치는 게 무섭고 두려운 겁쟁이지만 남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타이밍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오커스 행장님의 눈이 내게 주어진 것이 모종의 운명에 의한 것이라면 이 결말 또한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거겠지.
예전엔 운명이란 걸 단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따윈 없지만, 내가 하는 순간순간의 모든 선택이 그 운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운명은 내가 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밀라와 차원신용금고를 살리고, 잘하면 나 자신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싶다.
“대리님…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해.”
“그건 약속할 수 없지만 최선은 다해 볼게.”
플루토가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을.
“서명해 주시죠. 모든 위험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못 할 것 없지.”
뒤늦게 내가 맡은 역할이 어떤 것인지, 내가 지게 될 위험 부담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한 세 명의 남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계약으로 인해 악마의 대리인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놈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파묻기 위해선 우리 역시 지닌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걸 필요가 있었다.
<담보 대출 계약서>
계약서에 적힌 첫 줄을 힐끔 바라보고 난 다음 나는 먼저 서명을 마쳤다.
“여러분의 힘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이번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신들이 차례대로 계약서에 직필 서명을 남겼다.
“포세이돈의 이름으로.”
“하데스의 이름으로.”
“아폴로의 이름으로.”
“플루토 디스파테르의 이름으로.”
계약의 준수를 맹세한다.
-파아앗!
신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계약서가 환한 빛을 발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이치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이들의 권능과 신언神言에 의해 보장된 계약.
나는, 나의 오른쪽 눈의 권리를 담보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명의 신이 지닌 권능, 재산, 지위, 신격, 기타 모든 것을 ‘대출’받았다.
* * *
내가 키키와이로 돌아온 건 1시간 후의 일이었다.
똑같은 계약서 수십 장에 서명을 마친 다음 팩스로 올림포스에 없는 다른 모든 신들에게도 연락해 서명을 받기로 했다.
기한은 내일 정오.
과연 얼마나 많은 신들이 일면식도 없는 인간 나부랭이와 담보 계약을 맺어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었다.
“쉬고 싶은데, 누울 시간이 없네.”
나는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켜서 연락처를 주욱 훑어보았다.
여태껏 이쪽 세상에서 일하며 알고 지낸 사람들의 명단이 고스란히 전화부에 남아 있었다.
아이작, 과타노차, 이로울, 밀라를 비롯한 특채 동기들.
우리의 뒷담화를 자꾸 까댔지만 결국은 사과하고 인사할 정도까진 관계가 개선된 공채 행원들.
프레드 선배와 델 몬테 지점장님을 비롯해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함께 일하던 행원들.
은행의 돈을 횡령한 사내의 전처로서 책임을 지고 기업 경영을 정상화시킨 나볼리 대표님.
왕년의 유명 아역 시절과 무명 시절을 거쳐 다시 한번 영화계에 돌아온 플랫 샤펜도라 배우님.
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고 있는 아폴론의 총아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님.
33차원에서 명품 가구 회사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를 운영하는 고대 엘프 종족의 면면들, 경리부장 돈쥬바라 팔르리와 감비안 툴레아 대표님.
나노이 행성방위연구소 소장으로 생체병기의 침공에서 별을 지켜 낸 리바이 사우 박사님.
서로를 증오하는 두 초콜릿 제조 명문가에서 태어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아디젠 바이나우스와 미놀리 레오니아브 고객님.
그들에게 겁을 주어 관계를 파탄 내도록 의뢰받았다가 이를 포기하고 나중엔 우리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던 암살자 요하네.
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여론과 하나의 차원의 절반의 인구를 적으로 돌렸음에도 무모한 연구를 계속한 끝에 열매를 맺은 용기 있는 의사 닥터 마르쿠스 베르나데.
그의 도움으로 인해 목숨을 건지고 새로운 몸을 얻은 소녀 레이나.
과타노차가 만들어 낸 영혼을 지닌 최초의 인공 지능 생명체 마키나.
마키나의 존재가 악용당하지 않도록 그를 전적으로 도왔던 바라칸 이사님.
마키나를 맡아 주었던 델 몬테 이사님의 사모님, 레핀 씨.
우여곡절 끝에 차원신용금고의 VVIP 고객이 된, 6-2차원 최고의 브로커 홉고블린 클렛 고객님.
바리타스 제국에 맞서 행성을 지켜 낸 용감한 아비아노 정부와 시민들.
마키나의 연인으로서 마침내 증오하던 기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미래의 천재 컴퓨터 공학자 필로아 허버트.
그 외에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함께 일해 온 엑토플 라즈마 과장과 불파사 비슈티 과장,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수상할 정도로 강하고 본점 구E 파벌 행원들에게 이상하리만치 존중을 받는 경비원 영감님.
앞날이 보장된 전통 연극배우의 삶을 그만두고 은행업에 뛰어들어 나를 한 명의 정규 행원으로 키워 낸 악마 같은 슬리크 엘라마.
마지막으로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님과 그녀의 여동생 플루토 디스파테르까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협조를 얻어왔고 그들과의 관계로 인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만큼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전화 통화는 내 목소리에 울음이 섞일 것 같으니 간단하게 문자를 통해서라도 좋으니 내 마음이 어떤지 알려 주고 싶었다.
“고마워요, 다들.”
몇 줄씩 짧은 메시지를, 어쩌면 작별 인사라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말을 적은 나는 콜로서스를 기동하고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없어지면 그땐 아이작이랑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록 해. 분명 너희들을 잘 보살펴 줄 거야. 아, 어쩌면 콜로서스는 마키나를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정령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듯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규우우….
이 녀석들에게도 정이 많이 들었다.
괜히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해지는데.
과연, 나는 내일 어떤 식으로 악마의 대행자와 마주해야 할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하기 전, 정령들에게 돌아오는 길에 사 온 비싼 고급 육포를 하나씩 나눠 준 다음 다리미를 꺼냈다.
“마지막은 은행원답게 있어야지.”
셔츠와 정장 상‧하의를 받침대 위에 펼쳐 두고 뜨겁게 달군 다리미로 꾹꾹 눌러 가며 주름을 펴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일단은 다리미질과 청소 끝난 다음 밀린 영화 한 편 보면서 생각해야겠다.
* * *
사표와 유서는 매우 닮았다.
한쪽은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취지를 적어 둔 종이고, 다른 한쪽은 삶을 그만두며 적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손과 필체, 펜으로 쓰게 된다는 점도 몹시나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밤 나는 사표와 유서 중 어느 쪽을 써야 옳은지 두 시간 남짓 고민했다.
결과 내가 쓴 것은 유서였는데, 그 이유는 차원신용금고라는 직장이 내겐 몹시나 마음에 드는 곳이었던 까닭이었다.
처음엔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삶의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굳이 직장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들어 사표부터 던져 둔 다음 키키와이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다이아몬드 펄 헤드에서 악마의 대리인을 만날까 고민했다.
잘 풀리면 다시 엘라마가 이를 받아들이기 전에 취소하면 되겠다는 안이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나약한 생각이 들면 그게 필연적으로 결과에 반영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유서를 적었다.
유서를 적는 건 군대에 입대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군인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을 품어야 하니까 유사시 집에 보낼 유서를 적으라고 했는데 어찌 된 게 훈련소 생활관 동기들 중 제대로 유서를 적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놈들 중 그 누구도 어디 한 곳 다치는 일 없이 군을 제대해 사회로 돌아왔다.
그걸 본 나는 오히려 유서를 쓰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높아질지도 모른다는 미신을 품게 되었다.
그, 서브컬쳐에도 자주 있지 않은가. 사망플래그라는 단어.
흔히 말하는 남자들의 주된 유언은 ‘괜찮아, 안 죽어’, ‘죽기보다 더하겠냐’, ‘설마 죽을까 봐?’, ‘그럼 죽지 뭐’, ‘인생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어휴 X신들 나와 봐, 그것도 못 하냐’, ‘휴~ 큰일 날 뻔했네… 어라?’, ‘X발 X됐다….’ 등이 있는데 이런 발언은 전부 자신이 죽을 리 없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역으로 죽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유서까지 진지하게 쓰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딱히 근거는 없다.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고.
“출근해야지.”
나는 잘 다리미질을 마친 정장과 반짝반짝 윤을 낸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차원신용금고 다차원 출장소에 출근한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쪽을 보고 웃는 플루토와 엘라마 소장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준 다음 점포 오픈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12시에 예약한 고객님 한 분 오신답니다. 2층 써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서류를 정리하고 일할 준비를 마쳤다.
평소와 똑같이,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사든 악마든, 고객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이유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