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3화

한 시간 전.

포세이디아노스의 시청 시장 집무실.

이곳에는 연수원 근처에서 산 타고 구보 뛰고 산책 다닐 때 자주 마주치던 얼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일단은 나와 함께 키키와이에서 차원 관문을 타고 건너온 플루토 디스파테르.

한때는 언니와 함께 저승은 물론 지하에 묻힌 귀금속과 광물에 관한 모든 권리를 쥐고 있던 부富의 여신.

권능을 포기하고 피조물들 사이에 눌러앉아 살아가고 있는 지금 강대한 힘을 휘두를 순 없지만 그동안 신들과 부대끼며 살던 그녀의 혈연과 인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당장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아니 신들의 면면만 봐도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일단은 저승의 관리 권한을 포기한 디스파테르 자매 대신 모든 망자의 영혼을 관리하는 금목걸이 찬 배불뚝이 아저씨 하데스.

이분께선 연수원 근처에 살고 계시는데 맨날 머리 셋 달린 지옥견 데리고 산책 나가시는 게 일과다.

듣자 하니 디스파테르 자매의 삼촌이라는데 둘이 태어나기 전까진 혼자 저승을 관리하느라 엄청난 과로에 시달리다 최근 100년 동안 자동화 공정이 완성되어 어떻게든 지상으로 빠져나와 꿀 빨며 인생 아닌 신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모님과 알콩달콩 살고 있다고 한다.

저번에 넥타르인가 그거 연수원 시절 인사드렸다가 자판기에서 뽑아서 주셨는데 어째 그걸 먹고 난 다음 잔병치레 단 한 번 없이 업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진짜 신화에 나오는 신비한 과즙 같은 거였으려나. 살짝 알코올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당시 마실지 말지 고민하다 대주주님이라는 걸 알고 있어 마지못해 원샷하고 박수받았는데 마시길 잘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동안 이름만 들어 본 예술의 수호신이자 영화 도시 로렐트리의 지배자인 아폴론의 모습이 있었다.

기타를 등에 메고 찾아온 그는 치렁치렁한 금발을 늘어뜨린 장발 미남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얼굴은 하데스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젊어서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흔히 말하는 히피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그저 그런 가난한 락커로 보일 법한 그런 모습이었다.

다만 막상 직접 대화를 해 보니 어째서 이 사람이 널리 예술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폴론 님은 뭐라 해야 하려나, 음…. 직접 만나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마음씨 자체가 아름다우십니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외모는 신이니까 뛰어나신 건 당연한 거고.’

처음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신이길래 매스터한트 감독이 그렇게까지 극찬을 하나 싶었다.

그야,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신을 나쁘게 말할 리는 없지만.

다만 저번에 매스터한트 감독과 마키나를 위해 치밀한 연극을 벌이며 느낀 점인데, 그는 거짓말이나 빈말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사업가로서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아무런 거짓 없이 상대에게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실력과 언변을 지닌 사람이었다. 진심을 전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는 아폴론이라는 신이 정말로 신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피조물과 같이 마음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수양을 쌓아 한 단계 높은 격을 이룬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마주한 그 실체는 실로 완벽한 신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김지안 대리라고 했나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촌 동생들이 신세를 지고 있군요.”

“아,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이번에 오커스를 위해 큰 위험을 짊어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신왕께서 저지른 일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 듣고 걱정이 되어 잠을 설쳤습니다. 무어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황송하게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나에게 극존칭까지 쓰면서 사과하고 감사를 표하는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보면 신답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초월적인 수명과 힘을 지닌 존재가 그 발밑에도 도달할 수 없는 인간 따위에게 불가능한 수준의 겸손함을 보이는 걸 보고 나는 그의 품성이 실로 대단하다는 매스터한트 감독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도시의 주인 되는 포세이돈.

그는 눈썹이 긴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물의 도시라 불리는 포세이디아노스의 지배자답게 점잖게 양복을 입고 자리에 앉은 그 주위를 물방울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 도착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굳이 무언가 감정을 표출하지 않아도 무거운 위엄이 코트처럼 그 몸을 덮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신들 중 가장 연장자, 라고 플루토가 말했는데 어르신답게 딸이나 손녀뻘쯤 되는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의 몸에 일어난 비극에 분노하고 있는 듯 지팡이를 쥔 그의 손등에는 잔뜩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평소엔 소유한 수력발전소에서 대량의 전기를 생산해 범차원 세계 전역에 공급하는 거물로서 세상을 지탱하는 데에 막대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데, 나도 연수원 시절 딱 한 번 올림포스에 그가 들렀을 때 얼굴을 본 기억밖에 없어 무어라 반갑게 인사하고 그러진 못했다.

위의 셋 외에도 다양한 신들이 내 주변에 포진해 계획의 상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모두가 차원신용금융지주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운명공동체.

게다가 그들은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과 끈끈한 혈연으로 묶인 일가친척이기도 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배신할 이유는 없는 상황이고 악마와 그 대행자를 깊게 증오하고 있는 상황.

이들의 협조를 받아 낼 수 있다면 이번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악마의 대행인을 제압할 방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는 밀라의 목숨과 은행의 운명이 걸려 있다.

더욱 나아가, 눈이 악마의 대행자의 손에 들어간 결과 찾아올 이쪽 세상의 파멸을 막고 싶었다.

고작 미대 불합격한 찐따 따위에게 주어져도 엄청난 범지구적 비극을 일으킨 눈의 힘이 악마의 대행자에게 주어진다면 그 피해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나는 이번 기회에 놈을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오직 그것만이 나도 살고, 행장님도, 신들도, 그리고 이 범차원 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다행히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지금 내 손 안에 있다.

금융업 종사자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 방법이라면 놈을 완전히 엿 먹일 수 있을 테니까.

“계획의 골자는 이러합니다. 놈이 제 오른쪽 안와에 박힌 안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니 이를 이용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신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검지를 뻗어 눈을 가리켰다.

“악마의 대행자는 신들이 으레 그렇듯 무언가를 손에 얻기 위해선 거래를 하는 수밖에 없죠. 예를 들어 놈이 지금 차원신용금고 인사부 소속 밀라 레브리에 대리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이 역시 공짜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라 레브리에 대리의 육체의 자유, 이동의 자유, 그리고 시간을 빼앗는 대가로 무언가 지불했을 테죠. 높은 확률로 레브리에 대리의 계좌에는 거액의 돈이 입금되었을 겁니다.”

“잠깐. 악마가 계약에 민감한 건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인간인 그쪽이 이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던 건지 확인하고 싶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니 나를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다.

좋다. 이 기회에 서로 거리낄 게 없도록 의문을 해소해 주는 수밖에.

“그야, 제가 이를 직접 경험했던 까닭입니다. 악마의 대행인은 호텔에서 제게 명함을 건넸고 저와 대화하며 제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키키와이의 집에 들렀을 때 제가 발견한 물건입니다.”

나는 키키와이의 숙소에 짐을 챙기러 잠깐 들렀을 때 발견한 봉투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봉투를 열고 내가 안에서 꺼낸 내용물은 다름 아닌 상당한 액수의 굴덴 지폐.

봉투 겉면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누군가에게 이름도 적지 않은 봉투에 현금을 잔뜩 넣어 보내는 일은 없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름과 함께한 차례 세상에서 존재가 말소된 대행자가 보낸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들을 둘러보며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놈은 저와 거래를 시도하려 할 겁니다. 모레, 열두 시 정각에 저를 찾아오겠다고 말했거든요. 아마도 밀라 레브리에 대리의 안전과 제 안구를 교환하자고 제안할 겁니다.”

“지금까지 얘기해 온 흐름으로 미루어보아 타당한 추측이로군. 악마는 거래 없이는 무엇 하나 손에 넣을 수 없고 놈의 대행자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계약의 허점을 파고들 생각인가 자네는?”

처음으로 포세이돈이 입을 열었다.

“비슷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내 계획의 중점과는 조금 달랐지만.

“비슷하다는 건…. 흠. 자네의 계획에 관해 더욱 자세히 들어 보고 싶군.”

포세이돈은 재촉하듯 지팡이 끝으로 강하게 바닥을 찍어눌렀다.

아무래도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의 권능이 사라지고 은행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꿋꿋하게 억눌러 오던 분노가 풀려나오려 하는 모양새.

“제 계획은 이러합니다. 놈이 안구를 대가로 계약을 맺으려 했을 때, 안구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밀라 레브리에 대리의 안전만을 확보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본다, 바로 이것이 목적입니다.”

처음에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듯 신들이 벙찐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아폴론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계약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고 부당 계약을 맺겠다 이 말이군요.”

“정확합니다. 부당 계약을 맺어 일방적으로 이쪽만 이득을 보고 놈에게는 무엇 하나 주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 목적입니다. 동시에 놈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좋겠죠.”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야. 악마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말이지. 놈들은 계약을 잘못해 속게 될 경우 본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고 알려져 있지.”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내게 해 준 건 플루토 씨였다.

“악마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빼앗는 존재. 고로, 놈들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을 때 놈들은 자신의 본질과 모순된 결과에 의해 존재 자체에 타격을 입게 되죠.”

“그렇다면, 놈이 안구를 가져갈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싱긋 웃으며 미리 작성해 둔 계약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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