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2화

“그런 게… 가능하려나?”

계획을 들은 플루토는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계약의 허점을 이용하려는 자에게 세계는 페널티를 가하는 법이니까. 다만, 그런 일을 저지르면 악마의 대리인을 엿먹일 순 있어도 대리님 역시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무엇이든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건 이쪽 세상에 오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불이든 후불이든, 반드시 이 세상은 우리에게 제값을 치르도록 요구하는 법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번 사건을 겪는 것이야말로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일지도 모른다.

재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고 성공을 갈망하는 주제에 거기서 가장 먼 곳에 앉아 홀로 쓸쓸히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삶을 포기한 것 갖고는 잘나가는 엘리트 은행원의 인생을 보내기엔 모자랐을지도 모르지, 그야.

“내 눈도 내 몸의 일부야.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어. 그렇다면, 밀라를 희생시키는 일 없이 놈을 물 먹일 방법을 찾아야만 해. 눈을 주었다간 은행과 행장님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

“플루토 씨의 제안은 고마워. 신들의 도움, 필요할 거 같아. 플루토 씨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이 될 테지만.”

“…전부 대리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좋을 텐데.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지.”

“미안. 근데, 따로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플루토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 말대로야. 조금 우습네, 상황이. 여신이란 게 아무 도움도 못 주고 있다니.”

“플루토 씨가 계약에 관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이 계획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게 말해 주니까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 같아. 그럼, 고모님한테 연락하고 있을게. 대리님은 호텔 가서 짐 싸고 있어.”

“잠깐, 그 전에 하나 더….”

나는 엘라마와 델 몬테 지점장, 그리고 스파인 이사가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단 사실을 확인한 다음 플루토에게 속삭였다.

“놈은 밀라를 인질로 잡은 것처럼 다른 임원들의 가족에게도 손을 대고 있을지도 몰라.”

“안 그래도 저기 보이는 셋, 표정이 안 좋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밀라가 조용히 행장님의 세 측근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다행히도, 세 명의 표정은 아까보단 조금은 밝았다.

아무래도 연락을 돌리는 틈틈이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한 것이리라.

“…세 분은 안심해도 될 것 같네.”

눈이 세 명의 주위를 감싼 진한 주황색의 아우라를 감지했다.

안심하고 있다는 증거.

다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악마의 대행자는 철저한 녀석이니까, 아마 내게 접근하기 전에 이미 이사회나 주주들의 약점을 잡고 협박을 마쳐 두었을지도 몰라. 아니,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거야.”

내가 말하자 플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언니에게 도움을 구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이.”

“그럴 상황이 아니었겠지. 당장 나만 해도 밀라가 인질로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 못 차리고 있었잖아.”

“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대리님 밀라 레브리에 대리랑은 무슨 사이야?”

“그건… 아까도 전화로 말했지만 특채 동기지 뭐. 그냥 친한 사이….”

“흐응.”

플루토의 콧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아무튼 대리님 말대로 미리 놈이 이사회나 주주들에게 손을 써 뒀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되었어…. 주주 총회야 올림포스의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들 모셔 오면 대주주들 힘으로 어떻게든 찍어 누를 수 있을 테지만 이사회에 안건이 상정되고 통과되는 건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나마 다행인 건 정례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놈이 날 찾아올 예정이란 것 정도려나….”

잘만 흘러가면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계획을 마치고 놈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공한다면… 행장님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저지할 수 있겠지.

여신이 직접 행장을 맡고 있다는 건 범차원 세계의 은행에게 있어 크나큰 상징성을 지닌다.

아무리 파벌이 셋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이사회라고 해도 오커스 행장님이 계속 자리를 지켜 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사회에서 행장님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악마의 대행자가 손을 쓴 까닭이리라.

“남은 시간은 이틀…. 서두르는 게 좋겠어.”

플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상세한 아이디어를 회의실의 행원들에게 설명한 다음 서둘러 본점 건물을 나섰다.

“무운을 빕니다, 김지안 대리.”

델 몬테 지점장님의 응원이 긴장한 등에 날아와 꽂혔다.

“…네.”

꼭,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 * *

-타닥

“여긴….”

말라비틀어진 장작이 불타는 소리에 눈을 뜬 밀라.

그녀의 입술에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암적응하는 시야, 이내 밀라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벽난로가 있는 아늑한 방.

몸은 소파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고정되어 있다는 표현엔 어폐가 있었다.

밀라의 얼굴과 몸 주위엔 투명하고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무수히 떠다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녀를 찢어발기겠다는 기세로 예기를 발하는 흉기들.

-히끅

겁에 질린 밀라의 입에서 딸꾹질 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어났군요.”

그때였다. 근처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슬며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정황상, 자신을 납치한 자일 거라고 밀라는 추측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소개를 하고 싶은데 이름이 없어서 말이죠.”

“…대체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가 뭐예요. 저희 집 돈도 그리 많지 않은데.”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몸값 좀 받자고 밀라 레브리에 대리님을 여기에 모셔 온 건 아니라서 말이죠.”

“……?!”

아무래도 평범한 납치범이 아닌 모양이다.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스토커일까. 아니면 여성만 노리는 연쇄살인마…. 그것도 아니면―’

불길한 상상에 다크 엘프 인사부 대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쩌면 내일 자신의 몸이 토막 나 드럼통에 채워진 채 바다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범죄자를 자극해선 안 되는 법.

밀라는 애써 꾹 울음을 참고 딸꾹질도 억눌렀다.

“저, 선생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다음부턴 숨만 쉬면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해 보았지만 사내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상대.

배지를 건드릴 수도 없어 직무 권능으로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밀라가 더욱 겁에 질리기 시작한 무렵, 맞은편 소파에 앉은 사내가 천천히 다리를 꼬고 입을 열었다.

“그쪽 연인분께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연인이요…? 저 솔로인데….”

거기까지 말한 다음 밀라는 상대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아, 지안 오빠….”

연인이 아니라고 설명할까.

잠시 고민하던 밀라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지안 오빠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대뜸 당돌한 어조로 도발하는 듯한 말을 뱉는 밀라를 본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쁘지 않은 인선이었던 모양이군요, 그쪽을 데려온 건.”

사내가 손을 뻗자 음료가 든 잔이 허공을 날아 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지안 대리가 중요한 물건을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건 계약에 의해서만 다른 것과 교환이 가능한지라…. 예를 들어, 소중한 인질이라든지 말입니다.”

“아…. 근데 의미 없을지도 몰라요. 제 경우는 짝사랑이라.”

“글쎄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김지안 대리가 그쪽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만 한다면 제게 필요한 물건을 줄 게 분명하거든요.”

멋대로 주워섬기는 사내를 보며 밀라는 속으로 탄식했다.

김지안은 무골호인까진 아니어도 자기 주위 사람을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분명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원하는 걸 내놓으려 하겠지.

사내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상황이 여러모로 곤란하다는 것만큼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외부와 연락이 불가능하고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직무 권능이야 남의 감정 파악할 때에나 도움이 되지, 심지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지금은 그마저도 발동이 불가능한 상황.

단순히 배지를 건드릴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원신용금고 행원들은 여신의 권능을 나눠 받아 행사하는 일종의 사제와도 같은 존재.

고로, 행원들의 내면에는 여신에게서 받은 힘이 언제나 든든한 열기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밀라의 내면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몸에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엿이나 먹으라지. 헷.”

밀라는 사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일단은 김지안과 차원신용금고, 그리고 공권력 등이 움직여 자신을 구해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문제는 범인이 생긴 건 평범한 인간처럼 보여도 그 내용물이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놈이 틀림없다고 밀라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몸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여신의 권능이 사내의 존재 자체에 심각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항체가 바이러스와 맞서는 것처럼.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저 사내에게 협박당하고 있을 김지안을 생각하자 마음이 쉬이 놓이지 않았다.

당장 이 자가 자기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해도 김지안이 거래에 응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

‘오빠가 무사해야 할 텐데….’

밀라는 내심 김지안이 이 자의 제안에 응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에 하나 놈의 수작에 놀아났다간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 까닭이었다.

무사히 김지안과 다시 한번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밀라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 * *

나는 곧바로 항공기를 타고 키키와이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차원 관문을 개방. 12차원 올림포스산으로 달렸다.

차원신용지주라는 거대한 금융 그룹의 대주주인 신들이 다수 거주 중인 이곳에선 이미 플루토의 연락을 받은 신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건 세 번째 봉우리에 위치한 수상 도시 포세이디아노스.

산봉우리 위에서 강물이 흘러넘치는 이곳에는 지구의 베네치아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수상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 중앙의 시청 건물 꼭대기 층, 이 도시를 지배하는 오래된 옛 신 중 하나인 포세이돈의 집무실에서 나는 하나의 서류에 이름을 적어넣는 중이었다.

“됐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대리인을 엿먹일 수 있는 무기.

만일 내가 은행원이 아니었다면 이런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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