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신들을 끌어들인다.
확실히, 상대가 악마와 그 대행자인 이상 플루토의 아이디어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을 듯했다.
당장 가용전력이 얼마나 있는진 몰라도 우리 같은 필멸자보단 신들의 힘을 빌려오는 것이야말로 현 상황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전략인 건 틀림없으리라.
“방법이 없어. 일단 김지안 대리님을 보호하려면 친척 언니, 오빠들에게 부탁해야 해. 걱정하지 마, 다들 예전에 당한 게 있어서 복수심에 활활 불타고 있거든.”
“복수심…?”
“그런 게 있어. 예전에 우리 중 하나가 당했거든. 대리인 녀석 말고, 악마한테.”
플루토는 그렇게 말하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쨌든, 언제 어디서 놈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고 정례 이사회까지 남은 시간도 열흘밖에 없어. 분명 그사이에 움직임을 일으키겠지.”
“정례 이사회 외에도 걱정되는 부분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때였다. 델 몬테 지점장이 조용히 우려를 드러낸 건.
“정례 이사회에 앞서 차원신용금고를 지배하는 지주 회사인 차원금융지주의 주주 총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
“그러니까 더더욱, 신들의 힘을 빌려야겠죠.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대리인이 주주들을 동원해 무언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지분 거래가 활발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그 배후에 놈이 있다고 생각해도 문제없겠죠.”
“그렇군. 확실히 대주주인 신들이 총회에 참석한다면 악의적인 안건이 상정되고 통과되는 걸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스파인 이사가 동의를 표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여 오는 적의 손길. 척추가 싸늘해지는 듯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일단 김지안 대리는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군요. 주총과 이사회에서 적에게 협력하고 있는 자들을 찾아낸 다음 다시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스파인 이사의 말을 듣고 곧바로 엘라마의 표정을 살폈다.
당연히 안 될 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장은 그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의 눈이 악마의 대리인에게 넘어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차원신용금고는 물론 범차원 세계를 덮칠 겁니다. 그럴 바엔 며칠 쉬게 만든 다음 돌아와서 빡세게 일하도록 굴리는 게 낫겠죠.”
“그렇다면 일단은 악마의 대리인이 찾아올 수 없는 안전한 세이프 하우스를 마련하는 게 최우선 사항인데… 과연 세상에 그런 장소가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스파인 이사가 말한 대로였다.
적은 행장님의 저택 침실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차원의 벽을 자유롭게 뚫고 이동하는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놈에게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의문이었다.
“당장 놈이 쫓아온다 해도 김지안 대리님의 눈을 가져갈 수는 없을 거야. 언니의 눈은 대리님의 안와에 신왕의 힘으로 이식되었으니까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어…. 예를 들어, 계약이라든지.”
플루토는 평소와 다른 차분한 어조로 계약의 위력에 관해 알려 주었다.
신들과 인간의 관계는 계약으로 정립되었고, 악마 역시 그 힘을 세상에서 행사하기 위해선 계약을 필요로 한다는 것.
아예, 범차원 세계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태초의 계약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대리님이 동의하지 않는 한, 놈은 눈을 가져갈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대리님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겠지. 예를 들어, 대리님의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협박한다든지 말이야.”
“…….”
내게 있어 소중한 것이라.
솔직히 말해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나고 자란 3-1차원 지구에도 애착을 지닌 것이 없었다.
당연히 어른이 되고 한참 지난 다음 건너와 이제 겨우 2년 정도 지낸 이 6-2차원 그레이트 후리텐에는 소중한 것 따위….
“아.”
있었다.
내게도, 소중한 것이.
“잠시 연락 좀 하고 와도 될까요.”
나는 플루토와 엘라마, 델 몬테 지점장과 스파인 이사가 동의를 표하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제발 받아….”
스마트폰 화면에는 밀라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결음.
한참을 기다렸지만 밀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직 퍼질러 자고 있으려나. 하긴, 어제 술 많이 마셨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어딘가 눈에 익은 번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누르며 다시 발걸음을 돌려 회의실로 돌아갔다.
“김지안 대리―”
델 몬테 지점장이 말을 걸려 했지만 나는 검지를 세워 침묵을 요구했다.
“여보세요.”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안녕하십니까.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전화 주시지 않았더라고요.>
“……?!”
어째서 화면에 표시된 번호가 눈에 익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남자였다.
호텔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수상한 사내.
놈이 건넨 명함에 적혀 있던 번호였다.
플루토와 엘라마의 추측에 따르면 그야말로 차원신용금고와 내 오른쪽 눈을 노리는 악마의 대행자.
“베리알 뉴블랙…!”
<아아. 그런 이름을 적어 두었던가요. 잊어 주셔도 괜찮습니다. 제겐 이름 따윈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쪽 세상에서 신들에게 의해 존재 자체가 도려내진 날부터, 쭈욱.>
놈은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제 전화를 받으셨다는 건 어지간히 급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네요.>
“…….”
나는 애써 불길한 예감과 저항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놈은 내가 묵고 있던 호텔과 시사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내가 누구와 함께 시사회에 같이 갔는지도 알고 있었을 거란 뜻이다.
“…그 여자는 평범한 입행 동기다. 그저 그런 친구 사이에 불과해. 협박하려 해도 소용은 없다.”
애써 침착한 척 말을 꺼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이야아. 역시 엘리트는 다르군요. 어쩜 그리 눈치가 빠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자식, 밀라를 데리고 있다.
<밀라 레브리에 양이었던가요? 인사부에서 일하는 다크 엘프 대리. 업무 실적은 우수한 모양이군요. 확실히 차원신용금고에 어울리는 훌륭한 인재입니다.>
“개자식…!”
<기왕 연락을 받으신 거,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마의 대리인은 퍽이나 이지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레브리에 양을 안전하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김지안 대리의 오른쪽 눈을 주십시오. 답은 직접 들으러 가겠습니다. 사흘 후, 정오. 김지안 대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의 시계를 기준으로 삼는 거로 하죠.>
-뚝
그게 끝이었다.
녀석은 멋대로 용건만 말한 다음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하아, 하아….”
“무슨 일이냐, 김지안.”
“그게―”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엘라마와 다른 이들에게 통화 내용에 관해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 * *
한 시간 후.
나는 여전히 회의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머지 셋은 각자 가능한 일을 찾아보겠다고 창가로 걸어가 연락을 돌리는 중이었다.
끔찍하다. 나로 인해 밀라가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놈의 전화번호로 다시 한번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존재하지 않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만 들릴 뿐이었다.
“미치겠네….”
행장님의 용태에 관해선 외부에 유출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내게 가능한 방식으로 이름 없는 악마의 대리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건 역시나 특채 동기들과 마키나.
나는 유출 불가능한 정보를 제외한 모든 정보를 그들에게 보냈다.
과타노차와 마키나는 차분하게 추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지만 녀석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작 역시 래리어트 그룹의 정보망을 동원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울은, 싸울 일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신이 나서겠노라 이야기해 주었고.
“하아….”
다만 그들의 조력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적은 신들조차 찾아내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다.
수백 년 동안 세상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신들의 추적을 따돌린 놈이니까 분명 쉽게 발견할 순 없을 터.
“밀라를 죽게 할 순 없어.”
내 것도 아닌 눈깔 하나 지키겠답시고 친구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다.
아무리 내가 은행이라는 상명하복의 조직에 속한 일원이라 해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일 따윈 불가능하다.
만일 차원신용금고가 그딴 집단이었다면 진즉에 일을 때려치웠겠지.
“포기하지 마. 뭐든 방법이 있을 거야. 언니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야. 자기 안위를 지키려고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신이 아니었으니까, 언니는.”
스쳐 지나가듯 속삭인 플루토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지만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질을 잡은 건 계약의 힘으로 눈의 권리를 양도받기 위함인가….”
놈이 밀라를 노릴 거란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만일 밀라가 위험하다는 걸 알아채고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고 해도 놈은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마키나나 마키나의 연인을 데려간다든지, 어떻게든 내게 있어 소중한 무언가를 담보 삼아 눈을 앗아가려 했을 테지.
“계약… 계약이라….”
계약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것 없이는 악마의 대행자는 내게서 아무것도 앗아갈 수 없기에 인질을 납치했다.
그렇다면, 놈에게 엿을 먹이는 것도 계약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계약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케이스… 생각보다 많지.”
가장 가까운 예시를 들자면 3-1차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세 사기가 있다.
받아야 하는 돈을 받지 못하고 길거리에 내쫓기는 케이스.
어떻게든 놈의 눈을 속이고 밀라만 일방적으로 돌려받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이 분야에 관해 가장 잘 아는 건―
“플루토 씨. 잠깐 나 좀 볼까.”
“응?”
나는 플루토를 불러다가 계약에 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당연히, 현행법상 용인되는 그런 계약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먼 옛날 통용되던 신과 인간의 계약 같은 것에 관해서 말이다.
“영혼 담보 대출, 그런 게 있었다고 들었는데 옛날엔.”
“공인된 건 아니고, 일부 질 나쁜 은행원이나 사채업자가 쓰던 방식이지. 그 짓을 하다 세상에서 추방당한 게 방금 김지안 대리님이 통화하던 악마의 대행자이고.”
“그렇다면 신이나 악마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속아 넘어가 잘못된 계약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
“그, 대리님 설마… 아니야. 그런 무모한 시도는 그만둬. 위험하다고.”
“밀라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나는 만류하는 플루토의 귀에 대고 내가 떠올린 계략을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