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7화

사태는 긴급을 요했다.

악마의 대리인이 나타났다.

심지어 놈은 자신이 점찍어 둔 김지안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거기에 무슨 의도가 감춰져 있는 건지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의 계획에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놈의 눈에서 김지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행장님? 듣고 계십니까?>

“…엘라마.”

<예.>

“놈이 남긴 단서는?”

<김지안에게 명함을 한 장 남겼습니다. 이름은 베리알 뉴블랙.>

“쉬는 날에 미안하게 되었지만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 그자의 명함을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자마자 오커스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언니.”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여동생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오커스는 과거 자신과 친지들이 겪었던 비극을 플루토에게 다시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오커스와 플루토의 시선이 동시에 나뭇가지에 걸린 기다란 그넷줄을 향했다.

과거 플루토가 타면 오커스가 밀어주었던 그네였다.

오랫동안 다시 앉아 본 적 없는 두 여신의 추억이 깃든 그네.

오커스는 오랫동안 손수 그넷줄과 그네 본체를 관리해 왔다.

다시 한번 동생을 저기 태우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들어가자. 플루토.”

동생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산을 든 고용인들이 일제히 파파라치의 카메라에서 플루토를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다.

린딘 교외의 밤, 차가운 달이 굽어살피고 있었다.

* * *

잠시 후, 엘라마가 탄 세단이 오커스의 저택에 도착했다.

엘라마는 말 한마디 없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커스 행장의 집사에게 명함 케이스를 건넸다.

집사는 금속제 케이스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한기에 흠칫 놀랐으나 금방 동요한 티를 가라앉히고 엘라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늦은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행장님께 안부 전해 주시오.”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엘라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세단을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흐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사는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신의 가문을 지척에서 보필해 온 그의 가문의 핏줄에는 어지간한 차원신용금고 행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축복이 흐르고 있었다.

축복의 근원은 신들이 지닌 성스러운 힘.

그렇기에, 집사는 명함 케이스 안에서 한기를 발하는 내용물이 냉기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은 기본적으로 오커스 디스파테르 여신을 섬기는 사제와도 같은 존재.

그 직급이 높아질수록 핏줄 속을 흐르는 신의 축복은 강렬해진다.

슬리크 엘라마는 차원신용금고에서 최연소 차장을 달성한 인재.

아마도 그 역시 집사가 느낀 사악한 기운의 존재를 눈치챘을 터.

엘라마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기괴한 물건을 마주하는 건 인간의 삶이 100년에 달한다 해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

집사는 짧은 감상을 속에 담고는 그대로 명함 케이스를 들고 조용히 저택 3층에 위치한 오커스의 방으로 걸어갔다.

-똑똑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도록.”

이미 밤이 깊었지만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복장으로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사에게서 명함 케이스를 받아 들고는 곧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플루토는 이미 재워 두었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엘라마의 보고가 사실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끼릭

-달칵

오커스는 집사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다음에야 명함 케이스를 열었다.

그 순간, 안에 갇혀 있던 강렬한 한기가 방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크윽!”

공기 중의 온기를 모두 흡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강렬한 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거대한 저주가 깃든 물건.

소유자는 필시 악마의 총애를 받는 대리인이 소지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같은 놈인가.”

고모부 부부의 시체를 목격한 날의 기억이 불현듯 뇌리에 되살아났다.

신의 힘은 세상에 무언가를 더하는 권능.

반대로 악마가 지닌 힘은 세상이 가진 것을 집어삼킨다.

간단히 말하자면 덧셈과 뺄셈.

지금도 매 순간 팽창하는 우주를 조금이나마 잡아 붙들어 매는, 세계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하는 일 없이 그저 앗아가기만 하는 지독한 권능.

아버지는 말했다. 놈들은 언제나 허기가 져 있다고.

악마든, 그 하수인이든 신들이 창조한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무언가를 약탈하려는 것만이 그들의 타고난 본능이라고.

놈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명함을 쥐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명함은 방 안의 모든 ‘덧셈’을 무로 되돌리는 중이었다.

방 안의 온기, 습도, 그 외에도 0보다 큰 모든 것을.

이 명함은 끝을 모르는 탐욕의 조각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오커스는 이 명함의 소유자인 베리알 뉴블랙이 어째서 굳이 김지안에게 악마의 대리인으로서 접촉한 건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신들은 계속해서 악마의 대리인을 찾아다녔다.

만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어째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김지안을 데려가려 하고, 심지어 명함까지 건넨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가 없다.

김지안에게 접촉한 이유는 얼추 짐작이 갔다.

아마도 김지안의 오른쪽 눈, 그러니까, 신들의 왕이 자신에게서 빼앗아 인간 중 이를 담을 수 있는 이에게 이식한 안구를 노리고 있는 것이리라.

오커스의 오른쪽 눈은 수많은 신들의 보물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는 귀중한 보배로 알려져 있다.

그 눈에 감춰진 힘은 바로 인간의 성실함과 잠재력과 열정 등, 자신이 처한 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모든 선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 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는 신이나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곧 세상의 미래를 결정하는 권리를 손에 쥐게 되는 것과 같다.

과거 인류가 아직 우매하여 신의 인도를 필요로 하던 시절 그들이 앞다퉈 부의 여신인 오커스를 숭배했던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오커스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며, 게으르고 행실이 악하거나 그 어떤 선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재화를 분배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성품을 이겨 내고 타고난 마음가짐을 고치고 가진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이들에게 오커스는 항상 관대했다.

인류의 욕망과 발전이 정체된 거짓된 황금의 시대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이유는 그녀의 오만이었지만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힘이 분명 그 눈에는 담겨있었다.

한때 자신이 인간의 모든 악을 부정했던 그릇된 판단을 반성하는 의미로 기꺼이 지금은 잠든 신들의 왕에게 바쳤던 눈.

그 힘이 김지안에게 깃든 건 필히 신보다는 인간이 작은 곳에서부터 이 세상을 좋게 바꿔나갈 수 있을 거라고 신들의 아버지가 판단한 까닭일 터.

오커스가 김지안을 정식 행원으로 들인 건, 눈의 소유자를 발견하고 잠든 신들의 아버지가 뜻한 대로 그에게 뜻을 펼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의 다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신이 쥐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

올바른 피조물의 손에 들어 있어야 비로소 세상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눈의 힘을 다루는 그릇으로 김지안은 적격이었다.

평범한 인간인 데에다 범차원 세계 밖에서 살고 있던 미개척 차원의 생명이었지만 김지안은 계속해서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으로서 그 가치를 증명해 왔다.

이제는, 본점으로 불러들여 마음껏 그 마음과 눈이 이끄는 대로 차원신용금고의 기둥이 되어 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악마 따위에게 절대 내줄 순 없지.”

명함을 쥐고 있던 오커스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명함은 분명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고 힘을 가하면 꾸깃꾸깃하게 구겨져야만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베리알 뉴블랙의 이름과 미심쩍은 사명이 적힌 명함은 멀쩡했고, 도리어 힘을 쥔 오커스의 손아귀가 명함 모서리에 찔리고 베여 피가 흘렀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여신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신의 권능은 비단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창조자로서 타고난 힘엔 강인한 육체 역시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도 노화를 거진 겪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고 피조물이라면 당연히 사망할 만한 충격 역시 버텨 낼 수 있었다.

신과 피조물을 구분 짓는 차이점은 다양했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사이에는 이 세상에서 생을 얻은 존재로서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격의 고하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커스를 비롯한 신들은 오랫동안 아픔이라는 것을 겪은 적이 없었고 피를 흘려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고로 지금 손아귀 안에 고인 핏물을 주시하는 오커스의 머리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고작 종이로 만든 명함 따위가 신의 손을 상처입히고 피를 흘리게 만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오커스는 이런 불길한 현상을 일으킨 명함을 금방 바닥에 내동댕이치려 했지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촤아아아악!!!

명함이 오커스의 손에서 핏물을 있는 대로 빨아들이며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오커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도 잠시.

은은한 조명이 닿지 않는 방구석의 어둠에서부터 한 명의 사내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짝

-짝

-짝

느긋하게 손뼉을 치며 다가온 사내의 입매는 웃음으로 뒤틀려 있었다.

“네놈은…?!”

망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여신에게 있어 그 얼굴은 퍽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차원신용금고를 퇴출당한 것으로 모자라 모든 기록이 말살당한 최악의 범죄자가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당신이라면 함정에 걸려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유쾌하다는 듯 웃는 사내를 노려보며 오커스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황금과 저승의 힘이 방 안을 잠식하며 금빛과 검은색의 기운이 사내를 옥죄기 시작했다.

명함은 함정이었다.

김지안을 미끼로 오커스에게 직접 실물을 만지도록 했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조건이 만족되면 저주가 발동하도록 제작된 명함.

“소용없습니다.”

이미 새빨갛게 물든 명함은 피와 함께 여신의 권능의 대부분을 빨아들인 다음이었고 사내는 가볍게 오커스가 끌어올린 기운을 흩트려 놓았다.

마도 공학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 세상을 지탱하는 법칙을 뒤집는 힘. 마법.

“그러게 조심하셨어야죠.”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낸 오커스가 사내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인사만 드리러 온 거니까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행장님이 애지중지 아끼시는 보물, 제가 가져가도록 하죠.”

사내는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과장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함은 묵직한 벽돌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 떨어지더니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증발하고 말았다.

“허억, 허억….”

홀로 남겨진 행장은 다시 권능을 끌어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커스 디스파테르.

부와 저승의 여신은 그날 신격의 대부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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