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6화

“본점에서도 융자 심사 쪽 일을 맡고 싶은 건가.”

“아, 넵.”

나도 모르게 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렇군.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늘같이 느껴지는 점포의 대빵, 다차원 출장소 소장님의 말씀인지라 일단은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감사합니다.”

나도 엘라마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서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엘라마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걸 보니.

“1년인가. 얼마 안 남았군. 그동안 토할 정도로 굴려서 본전을 뽑아야 할 텐데….”

“무슨 무서운 말씀을.”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니 저거 분명 진지하게 하는 소리다.

“…일단은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든가.”

나는 엘라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조용히 라운지의 소파에서 일어났다.

“김지안.”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엘라마가 나를 멈춰 세웠다.

“조심해라.”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엘라마가 나를 걱정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 * *

린딘 교외의 거대한 저택의 정원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여신의 거처로 알려져 항공기와 헬리콥터, 그리고 드론이 근방을 비행하는 것조차 금지된 이 구역은 세간에선 신비의 땅이라 불리며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이 극도로 제한된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만용을 부리는 이들이란 꼭 존재하기 마련인지라, 그레이트 후리텐의 황색 언론 소속 기자들 역시 최대한 접근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가 멀리서 대포를 닮은 거대한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저택을 겨냥하곤 했다.

이들의 시도는 1년 365일 중 최소 300일가량은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한 번이라도 신의 사생활을 촬영하는 순간 인터넷에서 조회 수가 폭발하고 막대한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까닭이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린딘의 모 멀티플렉스에서 부와 저승의 여신 오커스 디스파테르가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영화관에서 그녀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린딘 전체의 카메라맨이 쫙 깔렸다.

그들은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물론, 그 곁에 가족으로 추측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밀려 했다.

물론, 행장의 차량은 완벽하게 선팅이 되어 있었고 그녀가 대동한 경호원들은 전원 경력이 오래된 프로 중의 프로.

당연히 고객의 사생활이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디코이 차량을 마련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 기자들을 따돌리려 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출구를 나서기 전부터 행장과 그 가족이라고 알려진 수수께끼의 여인은 은밀히 이동해 주차장으로 향했고, 매스미디어의 주구들이 따라잡기 전에 이미 차에 올라타 집으로 출발했다.

비슷한 차량이 몇 대씩 다른 코스로 향하느라 기자들의 차량은 런던 시내 곳곳으로 분산되었고, 의도적으로 출발 시간을 늦춘 행장의 진짜 차는 유유히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본가의 사유지 주위에도 이미 언론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어우, 장난 아니네. 언니 맨날 이러고 살아?”

정원의 테이블 앞에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던 플루토 디스파테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뒤엔 커다란 장우산을 펼친 경호원과 저택의 사용인이 수십 명씩 줄지어 서 있었다.

외부에서 저택을 촬영하려 드는 이들의 시선에서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알려지지 않은 혈육인 플루토의 모습을 가리려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나야 이미 익숙해졌지만 네겐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구나. 체하겠다. 천천히 먹도록.”

“이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식사하라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데, 뭐 어쩌겠어. 언니는 유명인이니까. 아니, 유명신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유명세는 감수해야지 뭐.”

오커스는 여동생의 치기 어린 불평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저택 안에서도 식사할 수 있는데 굳이 정원에서 바람을 쐬며 저녁을 들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야외 테이블은 거대한 나무의 곁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나무는 두 자매가 어린 시절 함께 심은 것이었다.

오커스는 모처럼 가족과 단란하게 식사를 하며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플루토 역시 그런 심중을 모르진 않고 있는지 크게 투덜대는 일 없이 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제는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은행에서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두 여신의 추억.

직장 동료와 부하들에 관한 대화.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의 죽은 부모의 기일에 대한 이야기.

“…얼마 안 남았네. 한 달 뒤엔 인사드리러 가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이다. 올해가 벌써 몇 번째지?”

“65년? 70년? 그쯤 된 거 같은데.”

부모의 화제가 나오자마자 식탁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신들에게도 수명은 있다. 그녀들의 부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날한시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신과 여신의 최후치고는 상당히 평온하고 평범한 날이었다.

오커스도 플루토도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배다른 자매였지만 딱히 서로의 어머니를 남처럼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가족을 잃은 우울함이 가시지 않아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피조물의 영혼은 언데드의 형태로 세상에 묶어 둘 수 있지만 이런 편법은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연에서 신앙으로 인해 태어난 신의 영혼은 죽음과 함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순리의 일환.

“고모부네 부부처럼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그나마, 신들의 적대자에게 영혼이 삼켜진 친척들을 생각하면 수명이 다해 평온하게 눈을 감는 건 그야말로 호상 중의 호상, 신들에게 허락된 가장 큰 사치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플루토가 한 말은 오커스의 마음에 박힌 가시를 건드리고 있었다.

플루토는 당시 아직 어렸기에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커스는 친척 어르신들에게 고모부과 고모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들었기에 더욱 마음이 쓰렸다.

“그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해 봤자 좋을 게 없으니.”

“…그러네. 내가 실수했어, 언니.”

플루토는 뜻밖에도 순순히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그만큼, 이 화제가 민감하다는 사실 자체는 여신으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이해하고 있었기에.

“…….”

“…….”

기분 나쁜 침묵이 두 여신 사이를 가로질렀다.

신들의 천적에 관한 이야기는 과할 정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피조물들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어 공표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신앙에서 태어난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신앙에서 태어난 초월적인 존재를 집어삼키는 또 다른 어둠 역시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악마.

가증스러운 이름이었다.

인간의 탄생보다 오래된 존재인 최초의 신들과 함께 세계의 기원에서 태어났던 최초의 악마들은 인류의 신앙에서 태어난 두 번째 신의 세대처럼 자신의 뜻을 이어 갈 존재를 찾지 못했다.

그들에겐 수명이라고 할 것이 없었고, 영원히 지저의 어둠에서 삼킬 것을 찾아 도사리고 있었다.

두 번째 세대와 그다음 세대의 신들이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닌 악마들은 개체 수가 적었지만 일정 주기마다 예고 없이 나타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곤 했다.

그 존재를 막기 위해 지금도 여러 신들이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어둠이 그들의 힘을 계속해서 키운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

신들이 피조물 사이에 섞여 들어가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데엔 악마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이유도 있었다.

가만두었다간 방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와 신들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악마였기에.

놈들은 이성과 감정을 모두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교활했다.

그들이 신들을 삼킬 수 있는 것처럼 신들 역시 힘을 모으면 악마 하나 정도는 대적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이길 수 있을 때에만 싸움을 걸어왔다.

놈들이 가장 애용하는 방식은 바로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악마의 대리인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신들의 정보망에 조용히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똑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200년도 더 된 오래된 이야기를 마치 최근 벌어진 것처럼 말하며, 플루토가 쓰게 중얼거렸다.

오커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업에 뛰어든 계기는 바로 친척에게 일어난 비극이었다.

당시 플루토는 어린아이였기에 언니가 하룻밤 만에 표정이 달라져 일터로 향하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며 돌변한 언니를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때의 일이 어린 마음에 상처로 남은 탓일까, 플루토는 제대로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다잡은 건 지극히 최근.

오커스에게 설득당해 차원신용금고에서 비정규 창구 담당자가 된 게 바로 그 계기였다.

“동감이다.”

오커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플루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악마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오커스는 그 손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플루토에 닿지 않길 원했다.

물론, 다른 신들에게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커스는 참사를 막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사적으로 고용한 전문가에게 악마의 대리인을 추적하도록 지시해 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택 문을 열고 집사가 황급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손에 음식이 담긴 쟁반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는데 표정만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오커스는 식사를 방해했다고 화를 내는 대신 곧바로 집사에게 물었다.

“엘라마 소장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긴급 상황인 듯합니다.”

긴급 상황.

집사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때엔 어김없이 차원신용금고에서 큰일이 터졌다.

오커스는 망설이는 일 없이 집사가 가져온 스마트폰을 집어 엘라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엘라마가 전화를 받았다.

<슬리크 엘라마입니다. 행장님.>

“무슨 일인가. 간결하게 요약해 보고하도록.”

<고리대금업자를 자칭하는 자가 김지안 대리와 접촉해 스카우트를 시도했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지 않나.”

<특이 사항으로는 놈이 건넨 명함이 끝없이 주위에서 열기를 흡수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추가로, 본점에도 알려지지 않은 김지안이 투숙 중인 호텔을 찾아내 기다리고 있던 모양입니다.>

“뭐……?!”

오커스의 머릿속에 차갑게 얼어붙은 채 발견된 고모의 시체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