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5화
평소엔 화만 잔뜩 내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상사지만 엘라마는 유능하기론 차원신용금고에서 제일가는 인간이다.
늦은 밤, 나는 엘라마의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엘라마는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도 제쳐 두고 호텔 라운지로 나를 불러냈다.
“스카우트?”
“네.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말이 안 되는 일인 거 같긴 해요.”
자초지종을 들은 엘라마는 미간을 짚고 고민에 빠졌다.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새어 나갔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는군.”
“동감입니다.”
“진짜로 그냥 널 차원신용금고에서 빼내겠다는 소릴 아니겠지. 애초에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이 출행하면 그 후로는 직무권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건 차원신용금고 근무자만이 아니라 어지간한 금융업 종사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채업자라 해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그게 문제죠.”
엘라마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대충 무슨 기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부하 직원들을 소유물처럼 다뤘다.
험하게 굴리는 만큼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는 점을 보면 좋은 상사는 맞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감히 제3금융권에서 일하는 수상한 사채업자 나부랭이가 나를 데려가려 했다?
심지어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알 수 없는 개인 정보를 토대로 위치를 추적해 호텔 로비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그의 분노가 얼마나 끓어오르고 있을지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럴 땐 엘라마의 존재가 든든하기 그지없다.
원래 미친개는 아군일 때 제일 든든한 법이니까.
아, 역시 상사를 미친개로 취급하는 건 좀 너무했나.
어쨌든, 지금 당장 저 베리알 뉴블랙인가 하는 사내가 내 주위를 알짱대는 걸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지금도 불안해서 잠도 안 오는 중이다.
어쩌다 저런 미친놈이 나를 찾아와 가지고 이렇게 된 건지.
“참. 놈이 준 명함인데 이상한 점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베리알이 건넨 명함을 엘라마에게 보여 줬다.
엘라마는 그것을 낚아채 당장 찢으려 했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경악한 듯 눈을 부릅떴다.
“차갑군.”
“네. 맞아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마도 공학 기술을 사용해 만든 물건이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아는 녀석 중에 이쪽 방면이라면 도가 튼 놈이 있다. 아마 이 물건의 정체도 알려 줄 수 있을 거다.”
평범한 사채업자가 마도 공학 기술까지 사용한 고급 수제 명함을 지니고 다니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엘라마는 그렇게 덧붙였다.
“확실히 그러네요. 돈 끌어모으기 바쁜 사람이 그런 짓까지 할 것 같진 않으니까요.”
명함도 그렇고 불길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놈의 근처에 서 있을 때에도 기묘한 오한이 느껴졌습니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군. 그냥 착각은 아니고?”
“실제로 기온이 내려갔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무엇보다 놈의 앞에서 말하는 동안 입에서 김이 나왔습니다.”
“…….”
간과하기 힘든 현상이었던 걸까, 엘라마가 잠시 말을 잃었다.
“…김지안.”
“예. 듣고 있습니다.”
“방금 했던 말은 취소다. 내 지인 녀석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니야. 이 일은 직접 행장님께 보고드리도록 하지.”
“네?”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나.
솔직히 말해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엘라마의 눈을 보니 전혀 호들갑을 떨거나 나를 겁주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걱정하는 케이스에 해당될지도 모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가족분들과 단란한 시간 보내시던 걸 방해한 건 죄송한데 이런 식으로 그냥 얼버무리시면서 겁만 주는 건 좀 그렇거든요.”
“연수원에서 차원신용금고를 사직한 이들에 관해 들은 적이 있나?”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길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출행한 이들이 뭘 하고 지내는진 알고?”
“대체로 다른 제도권 은행에 취업하거나 증권 회사 혹은 보험 쪽으로 이직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저질러 은행에서 쫓겨난 놈들은 어찌 되는지도 잘 알고 있겠군.”
“예. 얼추 배웠습니다.”
나는 연수원에서 배웠던 지식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배임 및 횡령을 저질렀을 경우 관련 업종 재취업이 오랫동안 불가능해지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비공식적인 사례지만 업계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당분간 취직이 어려워진다죠.”
“잘 알고 있군.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네?”
“차원신용금고의 연수원에서 배울 수 없는 현장의 지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정치라든지, 파벌 간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든지. 이것저것 많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말하자 엘라마가 특유의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 외에도 네놈이 알지 못하는 게 이 은행의 역사 뒤에 산더미처럼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아, 하긴. 합병 전까지 생각하면 수백 년은 족히 운영 중인 곳이니까요.”
“그래. 기나긴 차원신용금고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몇 놈인가 은행 임원진이 기록조차 말소하려 드는 놈들이 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기록까지 말살당하는 겁니까? 돈이 오가는 과정을 무조건 기록하는 게 은행이란 조직의 철칙 아닌가요?”
“그 철칙을 어기면서까지 묻어 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뜻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은행에서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는 한계가 있다.
끽해 봤자 거액의 돈을 빼돌리거나 고객의 돈을 유용하거나 그런 게 한계다.
당연하지만 이런 일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에 은행 측에서 손을 써서 고객의 손해를 메꾸고 관계자를 처벌하거나 공개적으로 드러나 은행장이 고개를 숙이는 식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모든 케이스를 통틀어 기록 자체가 지워지는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기록까지 말소시킬 정도의 잘못이라면 대체 어떤 짓을 저지른 걸까.
“혹시, 그게 어떤 과거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엘라마는 조용히 라운지에 앉은 이들과의 거리를 눈으로 쟀다.
그리고는 우리의 대화가 저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확신한 듯,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조용히 속삭였다.
“악마다.”
“예?”
“악마와 계약한 놈들이 가끔씩 나오거든.”
“악마, 말입니까?”
“그래.”
엘라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백 년에 한 번씩은 그런 일이 있다지. 신의 권능을 탐한 악마가 사제를 꼬드기는 일 말이다.”
“사제라고 하시면, 설마.”
“네놈이 생각하는 그대로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은 부와 저승의 신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대리인이자 사제. 악마와 계약한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은 퇴출당한 후에도 신의 권능의 파편을 그 몸에 지닌 채로 살아가지. 물론, 그 힘은 악마와 계약한 이후로 변질되어 전혀 별개의 것이 되지만.”
“맙소사.”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이 갔다.
베리알 뉴블랙이 두른 짙은 회색의 기운은 내 눈을 가지고도 어떤 감정인지 읽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주제에 감정의 크기와 강함만큼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떠한 감정보다 더욱 거대해 나를 삼키려 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감정의 이름이 탐욕이 아닐지 추측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오늘 끔찍한 놈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거군요.”
“그리되겠지. 아무튼, 이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행장님께는 내가 직접 말해 두도록 하지.”
“숙소를 옮기는 게 좋을까요?”
“소용없을 거다. 네가 어딜 가든 그 베리알인가 하는 놈이 정말로 악마와 계약했다면 네 위치쯤은 언제든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놈이 보유한 타락한 직무권능의 힘일지도 모르고.”
“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런 놈과 마주치고도 무사히 지금 엘라마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
“…….”
무거워진 분위기.
나는 화제를 돌릴까 고민했다.
엘라마 역시 지독할 정도로 경계하는 표정을 띠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좋은 날을 망친 게 아닐까 싶어 죄스러웠다.
이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그냥, 오랜 친우가 성공한 걸 축하하는 자리에 가족과 함께 놀러 와서 호텔에서 호사스러운 2박 3일을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부하 직원이라는 놈이 달려와서 무서운 경험을 했답시고 떠들어 댄 꼴이니까.
엘라마의 죄는 나의 상사인 것과 그동안 나를 말도 안 될 정도로 부려먹었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음, 그 정도면 이런 꼴을 당해도 충분한 죄로군.
암, 그렇고말고.
“뭔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기분 잡치신 게 아닐까 싶은데.”
“그걸 알면 앞으로 똑바로 처신하든가. 그래도 하나는 약속해 주마. 네놈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로 불러들인 게 나였던 이상, 네 몸에 어떠한 이변도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참 든든하네요.”
“농담할 기분이 아닌데.”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엘라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나를 비롯해 모든 부하 행원들에게 냉철하게만 대하던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너무 적응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런 얘기까지 들어 버린 이상,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감춘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다차원 출장소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또 뭐.”
“행장님께서 아까 저를 불러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아까 그걸 보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행장님이 네게 뭐라고 하셨지?”
“1년 뒤에 본점으로 부르시겠다고 하시더군요.”
“…….”
엘라마는 말이 없었다.
표정이 딱히 암울해지거나 경악한 티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엘라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군. 그래도 축하할 일이긴 한가, 행장님께서 네놈을 생각보다 빨리 인정하셨다는 뜻이니까.”
“예상하셨다는 건 대체….”
“네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행장님의 심복이라고 불리는 몸이다. 중요한 인사 정보는 델 몬테 지점장처럼 행장님 밑에서 오래 일한 행원들에게 뒤처질진 몰라도 그 심중 정도는 헤아리고 있다는 뜻이다.”
“아….”
엘라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한동안 기분 나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러다, 엘라마가 예고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