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4화
“와. 미쳤다. 호텔에 그런 서비스도 있어요?”
로비에 도착한 다음 컨시어지가 레스토랑 예약을 잡아 줬다는 얘길 들은 밀라는 의외로 엄청 놀라는 눈치였다.
예의상 연락처 교환한 공채 동기 행원들을 보면 여자들끼리 비싼 방 예약해서 묵고 호캉스 가서 이것저것 즐기는 게 생활화되어 있던데.
밀라는 그런 동기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호캉스 같은 걸 한 번도 안 가 본 건 아닐 텐데.
“하긴, 호캉스 가도 보통은 컨시어지 서비스까지 써먹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 같긴 해.”
“저 입행하고 딱 한 번 가 봤는데 진짜 그냥 뷔페에서 밥만 먹고 완전한 사육당하다 나오긴 했어요. 저런 것까지 있을 줄은 몰랐죠.”
“지금 보니까 일반 객실도 컨시어지 서비스되나 봐. 직통 전화 걸고 빠르게 도와주는 건 팀이 다른 것 같긴 한데.”
“그렇구나…. 저도 다음에 기회 있으면 시도해 보는 거로.”
우린 곧바로 택시를 타고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출발했다.
* * *
식사하는 동안 이렇다 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우린 평소처럼 즐겁게 떠들며 밥을 먹었고 1년 후로 확정된 내 본점 근무를 축하하며 잔을 부딪쳤다.
해산물과 고기가 적절히 조합된 코스는 훌륭했고 페어링 된 와인의 조합 역시 소믈리에의 센스가 느껴졌다.
나처럼 가난하게 자라서 좋은 거 얼마 못 먹어 본 사람조차 설명 듣고 음식과 같이 맛을 보았을 때 굉장하다고 느낄 정도면 술 잘 아는 사람들은 더 환장할 테지.
“후후. 이제 1년만 기다리면 오빠 본점에서 보겠네요.”
“그러게. 근데 어느 부서 가려나.”
“그러게요. 행장님이 직접 부르려 하시는 거니까 근데.”
“그래서 더 걱정이긴 해.”
“왜요. 오빠 직무권능 잘 살릴 수 있는 곳으로 알아서 배치해 주시지 않을까요.”
“진짜 네 말대로 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사실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술 때문에 알딸딸한 기분을 그저 즐기며 밀라와 떠들고 싶었을 뿐.
“오빠 진짜 잘 먹었어요. 담엔 꼭 제가 사게 해 주세요. 휴가 때 지구 가지 말고 린딘 놀러 와요. 에어씨앤씨 잡고. 맛있는 거 살게요. 아예 제가 거기 가서 요리해도 될 듯?”
“뭐야, 너 그런 것도 해?”
“헤헤. 옛날부터 엄마가 시집가면 이런 것도 다 해야 한대서 할머니가 물려준 레시피 공책 줬거든요. 자취 시작한 다음 전부 마스터했어요.”
“와. 그게 돼? 조모님 레시피 공책이면 엄청 두꺼울 거 같은데.”
“그쵸. 아무래도 할머니가 오래 사셨잖아요. 그래도 대학 4년이랑 입행 후 1년 동안 한두 번씩은 레시피에 나온 요리 해 먹어 보니까 실력 많이 늘었어요.”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연수원에 있을 당시엔 엄청 덤벙대는 모습만 보이던지라 요리에 소질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난 또 캠핑할 때 거하게 말아먹는 것만 보고 요리 못하는 줄 알았지.”
“아, 오빠. 솔직히 야외에서 뭐 하는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감안해 줘야 하는 거 아녜요?”
“그건 그래.”
적당히 밀라를 놀리니까 괜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
집에서 같이 사는 정령들 배를 간지럽히면 비슷한 반응을 보여서일까.
밀라가 점점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 걸 보니 나도 말기인 모양이다.
이게 다 취기가 올라온 탓이다.
하여튼, 나이 스물아홉이나 먹고 이러고 앉아 있을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아직 꿈에 부풀어 있던 내가 보면 믿지 않겠지.
그땐 스물일곱 정도 되면 화가로 자리 잡고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때의 나는 어지간히 현실을 얕보고 있던 게 틀림없다.
“아무튼, 본점에서도 실수 안 하고 잘해 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이지만.”
“오빠 자각이 없구나. 오빠 완전 엘리트예요. 행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자는 엄청 눈여겨보고 있다니까요?”
“차원신용금고에서야 뭐 출세 코스니 뭐니 말이 많은 건 아는데 외부는 또 무슨 소리야.”
“그야 당연한 얘기 아니겠어요?”
“당연하다는 건….”
밀라는 진짜로 모르겠냐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평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스카우트요.”
* * *
디저트와 홍차까지 싹싹 긁어먹은 다음에야 나는 밀라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왔다.
기분 좋다고 와인 마시고 해롱대는 녀석이 ‘스위트 룸 방 많다면서요, 저 좀 쉬고 갈래요’ 같은 소릴 해 대서 택시에 억지로 태워 집에 돌려보내느라 고생 꽤나 했다.
하여튼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칠칠하지 못하긴 오지게 칠칠하지 못 해가지고.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이렇게 마음 졸일 정도면 부모님 기분이 어떨지 쉬이 상상이 간다.
그나마 밀라가 평소 남자들이랑 술 안 마시고 다녀서 다행이지.
“음, 아닌가. 그냥 내가 편해서 저렇게 구는 거려나.”
모르겠다.
인사부라고 아예 회식을 안 하는 건 아닐 텐데.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사부에서 술 마시러 가면 폴로미 선배 같은 사람이 알아서 케어해 줄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밀라도 생각이란 게 있는 녀석이니까 사수랑 상사들 있는 자리에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할 테고.
“뭐, 친하니까 저렇게 구는 거겠지.”
아무리 내가 신사적이라고 해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나오면 곤란하다.
다음에도 저러면 반드시 꿀밤을 먹여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텔 로비로 들어섰는데.
“김지안 대리님 되시죠?”
“…네?”
처음 보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 * *
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사내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언제든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호텔 로비에서, 사내 앞에 선 나는 오한마저 느끼고 있었다.
마치 사내를 중심으로 기묘하리만치 차가운 기운이 퍼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김은 그것이 착각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말끔한 차림새. 보풀 하나 보이지 않는 옷가지의 매끄러운 실루엣을 지닌 사내의 주위엔 어째서인지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오른쪽 눈은 상대가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을 때 입을 열지 않아도 아우라로 보여 주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자의 주위에는 짙은 회색의 안개 같은 것이 몸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직감이 저절로 어떤 색깔이 어떤 감정을 대표하는지 알려 주는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가 두르고 있는 회색 기운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이 자의 존재 자체가 마치 칼로 이 세상에서 도려낸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데에다 내 몸이 생리적인 거부 반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시죠?”
“실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사내가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베리알 뉴블랙>
<블랙카우 & 캐시 린딘 지점장>
한눈에 봐도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사명.
누가 봐도 고리대금업자다.
‘왜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이름만이 아니다. 대리라는 직함까지 알고 있다.
내 직함을 알고 있다는 건 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역시 높은 확률로 알고 있을 거란 뜻.
눈앞의 사내가 내가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근무 중인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다.
‘대체 어떻게….’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개인 정보야 그야 살다 보면 새어 나갈 수도 있다.
내가 살던 3-1차원 지구의 대한민국에선 아예 개인 정보가 거진 공공재 취급당하며 온갖 사기꾼들에게 전화번호와 주소가 노출되는 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쪽 세상, 그러니까 6-2차원 린딘에선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대뜸 내 이름과 직책을 말하고 명함을 건넸을 때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개인 정보가 새어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레벨이다.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키키와이의 집도 아니고 린딘에서 묵고 있는 호텔 로비에 나타났다고?
아무리 신과 마도 공학인가 하는 기괴한 기술이 존재하고 신의 권능을 받아 쓰는 은행원이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이라 해도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경계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뇌에 문제가 있거나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 피해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절대적인 강자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상대가 누구든 등쳐먹을 자신이 있는 또 다른 사기꾼이겠지.
“어우,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진 마시죠.”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려는 제스처.
당연히 그 손을 내가 맞잡는 일은 없었다.
“뭡니까, 당신.”
이자가 평범한 사채업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냥 그런 놈이었으면 내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까진 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지금 이 타이밍에 린딘에서 호텔에 묵고 있다는 사실까진 몰랐어야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자의 정체는 물론이고 품고 있는 의도 자체가 내게 위협이 될 거란 사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함, 드렸잖습니까.”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이 내게 보여 줬던 명함이 어느샌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성적인 사고가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 나오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돈 빌릴 생각 없습니다. 돌아가십쇼.”
이대로 방으로 돌아간다면 방 번호까지 추적당할 것 같아 과감하게 나섰다.
필요하다면 경찰의 힘을 빌리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든 할 생각이었다.
묵는 호텔을 바꿔 달라고 말하는 건 어렵지만 내 돈으로 다른 곳에 투숙하는 정도라면 가능할 터.
“너무 그러지 마시죠. 좋은 얘기 들고 왔는데.”
“…관심 없습니다.”
“스카우트 이야기입니다.”
“……?!”
농담인가?
아니다. 베리알인가 하는 놈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악질적인 장난이나 치러 온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눈이 아니다.
사람 몇 명 담가 본 자들이나 보일 법한 얼굴.
비슷한 인상을 주는 자를 최근에 본 적 있다.
예를 들어, 초콜릿 명문가의 후계자 두 사람을 보호 중이던 우릴 찾아온 킬러라든지.
아니면 가장 가까운 예시를 찾자면 불파사 비슈티 과장.
“관심 없습니다.”
“5분이면 되는데. 이야기만 들어 보시죠.”
“거절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곧바로 대화를 끊은 다음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밀라에게 연락했다.
내일 호텔에서 저녁 먹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고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뭔가 이상해.”
사내의 명함은 얼음으로 만든 것처럼 내 손에서 열기를 앗아가고 있었다.
베리알 뉴블랙.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곤란한 일에 휘말릴 듯한 예감이 든다.